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진양 강공 묘갈명 晉陽姜公墓碣銘-암서집 제29권

천부인권 2022. 4. 6. 07:51

내 선친이 돌아가시고 장사를 지낼 때 고을 이웃의 지구들 중 만사(挽詞)와 뇌문(誄文)을 보내 곡(哭)을 한 사람이 거의 200명이나 되었다. 불초(不肖)는 얼마 뒤 슬픔이 진정되고 차례로 기록해 보니, 같은 마을의 어른 통정(通政) 강공(姜公)이 지은 것이 압권이었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본디 문학(文學)을 전하였고, 또 젊어서는 재주를 가지고 공령문(功令文)을 익혀서 일찍이 한 차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처는 기국과 능력에 있어서, 무릇 고을에 큰일이 있게 되면 공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고, 고을 수령도 여러 차례 불러서 자기를 돕도록 하였다. 성품도 또한 질박하고 솔직하고 간소하고 강직하여 절대로 남을 따르거나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간사한 아전들과 세력 있는 백성들에게 걸려 들어 법망에 저촉되고도 회피하지 않았다. 만년에 산수자연 속에 숨어 살면서 선영 아래에다 집 한 채를 지어 자유헌(自遊軒)이라고 하고, 쓸쓸하게 혼자 지내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고 자손들을 가르쳤다. 가끔 의문(儀文)을 토구(討究)할 때는 깊이 생각해서 자상함과 신중함을 다하였다. 손님이 오면 싫증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일이 없으면 마치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하게 정좌를 하고 있었다. 시 짓고 술 마시며 노는 곳에는 일찍이 발걸음을 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이 시문을 짓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비록 나처럼 한 마을에 사는 사람도 이렇게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을 줄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공이 평소 간직했던 것은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공이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 사손(嗣孫) 신하(信夏)가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다음과 같이 그 대략을 적는다.
공의 휘는 지형(智馨), 자는 화익(和益)이다. 강씨(姜氏)는 본래 진양(晉陽) 사람이다. 고려 말에 휘 회중(淮中)은 대제학(大提學)이다. 이조에서는 휘 효정(孝貞)은 감찰(監察)이다. 휘 숙(璹)은 참봉(參奉)이다. 휘 기룡(起龍)은 부위(副尉)이니, 계사년(1593, 선조26)에 진양(晉陽)에서 순절하여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 증조의 휘는 형목(亨穆)이다. 조부의 휘는 석흠(碩欽)이다. 부친 휘 유영(有永)은 호가 도재(道齋)이고, 문학과 행실을 갖추고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 모친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니, 사인(士人) 희록(熙祿)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憲宗) 을미년(1835, 헌종1)에 태어났고, 돌아가신 것은 금년 신해년(1911) 12월 21일이며, 산소는 □□□ 경좌(庚坐) 언덕 선친의 산소 아래에 있다.
원배(元配)는 하산 성씨(夏山成氏)이니, 기로(琦魯)의 따님이고 자식이 없다. 계배(繼配)는 벽진 이씨(碧珍李氏)이니, 호연(浩然)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만희(萬煕)ㆍ주희(柱煕)ㆍ준희(準煕)ㆍ필희(弼煕)이고, 딸은 윤원효(尹源孝)에게 출가했다. 만희는 후사가 없어서 준희의 맏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니, 곧 신하(信夏)이다. 주희의 한 아들은 신□(信□)이다. 준희의 세 아들 중 맏이 신하는 큰집의 대를 이었고, 다음은 신□(信□)와 양자로 나가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신□(信□)이다.
명(銘)을 붙인다.
진양 강공 묘갈명〔晉陽姜公墓碣銘〕
큰 그릇은 꾸밈이 없고 / 大器無飾
재능이 많아도 마치 어리석은 것 같았지 / 多能若愚
어찌하여 재능을 펴서 / 胡不展布
백 장부의 으뜸이 되지 않았는가 / 以長百夫
벗의 아들인 나의 / 是故人子
명에는 오히려 속임이 없다오 / 銘尙不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