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남호 강처사 묘갈명 정사년 1917 南湖姜處士墓碣銘 丁巳

천부인권 2022. 4. 6. 13:07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선생은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정밀하게 사색해서 노사(蘆沙) 기씨(奇氏)의 진전을 얻었는데, 그의 훌륭한 제자가 있었으니, 남호(南湖) 처사 강공(姜公) 휘 영지(永祉) 자 낙중(洛中)이다.
강씨(姜氏)는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의 알려진 성씨이다. 이조에 와서 휘 석덕(碩德)이 있으니,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고,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이 분이 휘 희맹(希孟)을 낳았으니, 좌찬성(左贊成)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이 분이 귀손(龜孫)을 낳았으니, 우의정(右議政)이고,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그 뒤로 명덕(名德)이 계속 이어졌다. 고조 휘 주동(柱東)은 증(贈)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증조 휘 태환(泰煥)은 수작(壽爵) 가선대부(嘉善大夫)이며, 조부 휘 동면(東勉)은 문과(文科)를 해서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냈으며, 부친 휘 장회(章會)는 예식원 장례(禮式院掌禮)로 남보다 앞서 베풀기를 좋아해서 향리에서는 장자(長者)로 일컬어졌다. 모친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성원(性源)의 따님과 연일 정씨(延日鄭氏) 환봉(煥鳳)의 따님이다. 정씨(鄭氏)가 철종(哲宗) 정사년(1857, 철종8) 정월 24일에 처사를 낳았다. 처사는 형제가 다섯이고, 그중에 셋째이다.
처사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능력을 타고났다. 선생에게 나아가 배울 무렵에는 몹시 순해서 서당의 훈장이 엄격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지만, 일찍이 약간의 꾸짖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공령(功令)과 유학(儒學)의 완급을 알았다. 스승을 만나고 나서는 법도에 따라 더욱 더 스스로를 제어해서, 모든 말하는 것과 자신의 지키는 것과 마음을 보존하는 것과 일에 대처하는 것을 한결같이 속이지 않고 망녕되이 하지 않는 것으로 중심을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사가 배움을 통해 얻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 이미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겨우 6세에도 어머니가 병이 들자 바로 변을 맛보고 약을 드렸다. 젊어서는 부정한 여색이 더럽히려고 하는 경우가 있으면, 문득 정색을 하고 물리쳤다.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드시게 하였고, 어머니의 상에는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입는 의복과 먹는 음식은 화려하고 맛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형제들과 규방에서는 어기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전답을 양보해서 종손에게 돌려주고, 곡식을 내어서 궁핍한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무릇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훌륭한 행실로 음덕을 받는다는 것은 모두 처사가 넉넉하게 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만년에는 선조를 추념하는 일과 자손을 교육하는 일과 후생을 인도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고, 신학(新學)에 대해서는 더욱 경계해서 “성인(聖人)과 우인(愚人),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처사는 병진년(1916) 11월 1일에 돌아가셨고, 시금(時禁)에 걸려 대초산(大草山) 을좌(乙坐) 언덕에 갈장(渴葬)하였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니, 제우(濟佑)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맏이는 성수(聖秀)이고 다음은 숙부에게 양자 간 현수(賢秀)이며, 딸은 진양(晉陽) 정희영(鄭煕永)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약간 명이 있으니, 맏손자 대명(大明)은 재주와 자질이 있었는데 요절하였다.
내 친구 최제효(崔濟斅) 순약(淳若)은 계남(溪南) 선생의 맏아들이고, 바로 처사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그리고 성수(聖秀) 군은 장사를 지낸 다음 달에 짚신 신고 눈얼음을 뚫고 궁벽한 산골로 나를 찾아와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일찍이 《계남집(溪南集)》을 통해서 처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순약의 행장도 또한 모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라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성수 군이 지행(志行)을 갖추고 있어서 군자(君子)의 자식이라고 일컬어진다는 말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붙인다.

진양의 강씨는 그 고장에서 으뜸이네 / 晉陽之姜雄厥鄕
부유함과 높은 벼슬 대단함을 다투었네 / 肉粱朱紫競芬侈
아름다운 한 사람이 참다운 옷 입었네 / 有美一人被服眞
경전 가르침 익히면서 바른 도를 실행했네 / 咀茹典訓履繩準
손수 《주자서절요》 다 베끼니 자획이 분명하네 / 手竟晦書字較如
성경으로 성인 된다 늘 말을 하였다네 / 恒言誠敬乃作聖
몸 보전해 한 갑자를 살다가 죽었다네 / 保躬以終甲子同
새겨서 길이 보여 이름과 함께 전한다네 / 刻示永久名與壽

 

[주-D001]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과 북천면에서 살았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전라남도 장성에서 강학하던 기정진(奇正鎭)을 찾아가 사사한 뒤, 스승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을 주장하였다. 동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정재규(鄭載圭, 1843~1911)와 함께 경상우도 삼가ㆍ단성ㆍ옥종 등지에 기정진의 학문을 전파시킨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주-D002] 노사(蘆沙) 기씨(奇氏) :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조정의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수립하였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문도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에도 폭넓게 포진해 있었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D003] 시금(時禁) : 
일제가 1920년 공동묘지법을 전면 시행하기 이전에 자신의 선영에다 매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시행한 일을 말한다.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부터 자신의 선영에다 매장을 하는 조선 사람들의 매장 방식을 바꾸기 위해 법령 등을 만들거나 고친 끝에 1920년에는 결국 공동묘지법을 만들어 이를 전면 금지하였다.
[주-D004] 계남집(溪南集) : 
최숙민의 문집을 말한다. 30권 10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주-D005] 손수 …… 분명하네 : 
강영지는 젊어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구입해 두고 보려 했지만 책을 구입할 수 없자, 그 책을 해정하게 베껴서 두고 보았다고 한다. 《南湖遺稿 卷5 附錄 行狀》

암서집 제29권 / 묘갈명(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