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도통사 道統祠

천부인권 2022. 11. 20. 10:57

2022.9.22. 진주시 도통사 전경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724(내축로577번길 29-9)에는 우리나라에서 안자安子라 칭하는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을 공자孔子·주자朱子와 함께 모시는 도통사道統祠가 있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65m, 좌표는 35°07'58"N 128°00'56"E를 가리킨다.
도통사道統祠는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처음에는 대평면 하촌리 547-2번지에 있었는데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1995년 이곳으로 옮겼다.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주자(朱子)를 배향하고 안자(安子)를 종향(從享)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공자탄신일인 8월 27일에 제향한다.

 

2022.9.22. 진주시 도통사 전경 측면

안향安珦은 1290년 왕과 왕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장의 화상을 그려서 이듬해에 돌아와 연구하고 성인의 학문을 배웠다. 1297년 집뒤에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으며 만년에 회암晦庵 주희朱熹선생의 영정을 걸어 놓고 경모하며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다. 1303년 김문정金文鼎을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 사용할 제기·악기 및 육경·제자사·주자서 등을 구해 오게 했다. 1306년 64세로 죽자 왕이 대덕산에 장사지내게 했고 1318년 충숙왕은 학교를 세운 공을 치하하여 안자의 화상을 그리게 했고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자학은 이제현·정몽주 등 여말 향리 출신 학자들이 익히고 통치의 학문적 배경으로 삼으면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고 배원친명排元親明으로 전환하게 했다.

 

2022.9.22. 진주시 도통사 전경 뒤쪽
2022.9.22. 진주시 도통사 전경 마당
2022.9.22. 진주시 도통사 솟을삼문 계동문


道統祠顚末記
道統은 何謂也오 蓋自上古로 聖神이 繼天立極而道統之傳이 有自來矣라 蓋嘗論之컨댄 以天縱之聖으로 建太極于萬世而行天下之大道하야 集群聖之大成者난 至聖先師孔子也오 以亞聖之姿로 道高德崇하고 繼往開來하야 集聖賢之大成者난 文公晦菴朱子也오 祖孔宗朱而首倡理學하야 以啓東方萬世之淵源者난 文成公晦軒安子也라 隆熙三年己酉冬에 安子實記刊役이 告功하야 翌年庚戌九月十五日에 用紙榜行舍菜禮하고 仍修儒契하니 國中章甫가 聞風響應하고 越三年壬子에 送李相福安洛鎭하야 自長湍永慕堂으로 奉來安子眞影하고 翌年癸丑에 建影閣하고 自華城闕里祠로 摹奉孔朱二夫子眞像以來하고 孔子行敎眞像은 自闕里奉來하다 掌禮院副卿蔡龍臣이 加彩安子巾服이라 追安子精舍故事하야 奉先聖于中하고 配以朱子而從祀以安子하고 定其號曰道統祠라 祠門曰太極인니 祠額은 孔子七十六代孫衍聖公令貽가 書하고 越二十二年甲戌에 僉議謂講堂이 湫隘에 不能容多士라하야 重建而新之曰同文堂이라 堂額及昌平日月紫陽江山八字楹聯은 令貽之子衍聖公悳成이 書하다 自是闕里硯山이 音信陸續에 萬里如咫尺이라 東有光明閣하니 孔朱安三聖賢編年年譜若安子實記己卯名賢錄板本所藏이오 西有萬卷室하니 諸生肄業之所오 門樓曰啓東이오 創祠碑난 中華福建省武夷五曲紫陽書院朱緝齋敬熙所撰이오 碑頭篆은 鄭承旨承鉉書하고 碑面은 退陶胄孫李忠鎬가 書하다 凡此首先倡論에 賢勞終始者난 李南川道默李惠山祥奎趙霞峯鎬來鄭驥汀圭錫安芝山孝鎭僉先生也라 同文堂外額은 尹判書가書하고 光明閣萬卷室은 沙月李永根이 書하고 硯山齋난 京城權東壽가 書하고 啓東門은 黃磵宋友用이 書하고 太極門은 安明植이 書하고 同文堂外柱聯은 禮安李源一이 書하고 其外諸般柱聯은 亦尹判書筆也라 祠南巖面敬字난 摹紹修院愼齋先生筆敬字하야 刻焉이오 光明閣建築과 三聖賢編年年譜刻板費全額을 朴士人弼鍾이 獨擔其額하니 不惟有光於吾林이라 亦爲模範於一國則豈非偉矣盛哉아 嗚乎라天不變이면 吾道亦不變인니 凡百君子난 盍思所以相勉之道哉아

 

도통사 전말기顚末記¹⁾
晦岡 安明植 해강 안명식
도통(道統)은 무엇을 말함일까? 대개 上古로부터 성신(聖神)²⁾이 천위(왕)(天位(王))를 계승하고 법(法)을 세우면서 도통(道統)의 전(傳)함이어디로 부터 내려옴이 있었다.
대개 일찍이 논(論)하기를, 하늘이 낳은 성인(聖人)으로서 태극(太極)을 만세(萬世)에 세우고서 천하(天下)의 대도(大道)를 행(行)하여 여러 성인(聖人)을 집대성(集大成)한 자(者)는 지성 선사(至聖 先師)이신 공자(孔子)이시고, 아성(亞聖)³⁾의 자태(姿態)로서 도(道)를 높이고 덕(德)을 숭상하여 지나간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다가오는 후인(後人)을 개도(開導)하여 성현(聖賢)을 집대성(大成)한 자(者)는 문공(文公)이신 회암(晦菴) 주자(朱子)이시며, 공자(孔子)를 원조(元祖)로 삼고 주자(朱子)를 종사(宗師)로 삼아 성리학(性理學)을 맨 먼저 밝혀 동방(東方)에 만세(萬世)의 연원(淵源)을 열게 한 자(者)는 문성공(文成公)이신 회헌(晦軒) 안자(安子)이시다. 
융희(隆熙)3년[기유(己酉)1909년] 겨울에 『안자실기安子實記』를 간행하는 일이 끝났고, 다음 해인 경술(庚戌 1910년) 9월 15일에 지방(紙榜)을 사용하여 석채례(舍菜禮)를 거행하고, 그로 인하여 유계(儒契)를 모았더니 국내(國內)의 선비들이 풍문(風聞)을 듣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였고, 3년을 지난 임자(壬子 1912)년에 이상복(李相福)과 안낙진(安洛鎭)을 보내어 장연(長淵)의 영모당(永慕堂)으로부터 안자(安子)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여 오고, 다음 해[계축(癸丑)1913]에 영정각(影幀閣)을 세우고 화성(華城=중국)의 궐리사(闕里祠)로부터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두 부자(夫子) 분의 진상(眞像)을 그려서 왔으며, 공자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진상(眞像)은 궐리(闕里)로부터 받들고 왔고, 장례원(掌禮院)의 부경(副卿)인 채용신(蔡龍臣)이 안자(安子)의 유상(遺像)을 추가로 색칠을 하고서, 안자(安子)께서 정사(精舍)에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모시던 고사(故事)를 추념(追念)하여, 선성(先聖) 공자(孔子)를 중앙(中央)에 봉안(奉安)하고 주자(朱子)를 배향(配享)하고 안자(安子)도 종사(從祀)하고는 그 이름을 도통사(道統祠)라고 정(定)하고, 도통사(道統祠)의 문(門)은 태극문(太極門)이니, 도통사(道統祠)의 현판은 공자(孔子)의 76대손(孫)인 연성공(衍聖公) 영이(令貽)가 썼다.
22년을 지난 갑술(甲戌 1934)년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며 강당(講堂)이 좁아 능히 많은 선비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하여 중건(重建)하여 새롭게 하고 동문당(同文堂)이라고 하고서 동문당(同文堂)의 현판과 창평일월(昌平日月)과 자양강산(紫陽江山)의 여덟 글자의 영련(楹聯=주련柱聯)은 영이(令貽)의 아들인 연성공(衍聖公) 덕성(悳成)이 썼다. 이로부터 궐리(闕里)와 연산(硯山)은 서신(書信)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만리(萬里)의 먼 거리가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동쪽에 광명각(光明閣)이 있으니, 공자·주자·안자(孔子·朱子·安子) 세 성현(聖賢)의 편년년보(編年年譜)와 안자실기(安子實記)와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의 판목(板木)같은 것을 소장(所藏)하고, 서쪽에 만권실(萬卷室)이 있으니 여러 생도(生徒)들이 학업을 기르는 곳이고, 문루(門樓)는 계동문(啓東門)이라고 하고, 창사비(創祠碑)는 중화(中華) 복건성(福建省) 무이오곡(武夷五曲) 자양서원(紫陽書院)의 집재(緝齋) 주경희(朱敬熙)가 지으셨고, 비두(碑頭)의 전자(篆字)는 승지(承旨)인 정승현(鄭承鉉)이 썼으며, 비문[碑石 (창사비創祠碑)]은 퇴계(退溪)의 종손(宗孫)인 이충호(李忠鎬)가 썼다.
무릇 이것을 앞장서서 논의(論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수고를 하신 분은 남천 이도묵(南川 李道黙), 혜산 이상규(惠山 李祥奎), 하봉 조호래(霞峰 趙鎬來), 기정 정규석(驥汀 鄭圭錫)과  지산 안효진(芝山 安孝鎭) 등 여러 先生이었다.
동문당(同文堂) 밖의 현판은 윤 판서(尹 判書)가 쓰셨고, 광명각(光明閣)과 만권실(萬卷室)은 사월 이영근(沙月 李永根)이 썼으며, 연산재(硯山齋)는 경성(京城)의 권동수(權東壽)가 썼고, 계동문(啓東門)은 황간(黃磵)의 송우용(宋友用)이 썼으며, 태극문(太極門)은 안명식(安明植)이 썼고, 동문당(同文堂) 밖의 주련(柱聯)은 예안(禮安)의 이원일(李源一)이 썼으며, 그밖에 제반주련(諸般柱聯)은 역시 윤 판서(尹 判書)의 필적(筆蹟)이다.
도통사(道統祠) 남쪽바위 전면의 「경敬」자(字)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신재(愼齋) 선생(先生) 필적(筆蹟)인 「경敬」자(字)를 본떠서 새겼고, 광명각(光明閣)의 건축(建築)과 삼 성현(三 聖賢)의 편년년보(編年年譜)를 각판(刻板)한 비용은 전액을 사인 박필종(士人 朴弼鍾)이 혼자서 그 거액(巨額)을 부담하였으니, 오직 우리 유림(儒林)에게만 이 영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국가에도 모범(模範)이 되겠으니, 어찌 위대하고 성대하지 않으랴!
아!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의 군자(君子)들은 어찌하여 힘써야 할 바의 길을 생각하지 않으랴!

【주석】
전말기顚末記¹⁾ :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기록한 것.
성신(聖神)²⁾ : 뛰어나서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고 영묘불가사의 한 神이 유교에서 다 聖人을 일컫는 말.
아성(亞聖)³⁾ : 성인聖人 다음가는 현인賢人.공자孔子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안연顔淵과 맹자孟子를 아성亞聖이라고 함.

 

2022.9.22. 진주시 도통사 계동문 편액
2022.9.22. 진주시 도통사 동문당
2022.9.22. 진주시 도통사 광명각

光明閣記   
自混沌而開闢으로 光明이 始生하야 凡天地間萬物之精이 有些子光明者何限而其晉光大明 則莫若日月若也라 故曰日月有明에 容光必照焉이라 硯山之道統祠난 是孔夫子采眞之所而祠下에 有曰光明閣者하니 卽夫子編年板本所藏而朱文公及安文成公年譜板本을 亦從而盍焉이라 昔端木子嘗稱夫子爲日月이라하니 今夫子之編年所在에 其光明이 與日月로 奚異哉아 凡我後學之登此閣覽編年者怳然若月日之照臨於上而光明之著顯於前이 庶幾不迷於趨向之方而明誠兩進하고 敬義偕立하야 篤實而有光輝焉則自家之光明寶藏이 亦充滿而用之不盡인니 此吾夫子所以繼往聖開來學而其惠我而光明者如日月之明이 容光必照也라 雖世屬衰季에  混沌長夜而一陽之復에 萬戶千門이 將次第開矣라 斯道之光明이 其從此而大放而普及也哉전 閣三間은 士人朴弼鍾이 獨出巨鏹以成之하니 其尊聖衛道之誠이 亦有光於吾黨者也

月淵 李道樞 

 

2022.9.22. 진주시 도통사 광명각 편액

藏書光明 能透天下 
장서의 광명으로 천하에 달통하여

浩浩其天 淵淵其囦 
하늘처럼 넓고 못처럼 깊어지리라

白日靑天 兮吾衟尊 
하늘의 태양처럼 우리 도가 높아지면

潮呑百川 雷開萬戶 
바닷물이 온갖 냇물을 삼키고 우레가 모든 문을 열게 하리라

2022.9.22. 광명각 주련

 

2022.9.22. 진주시 도통사 동문당

同文堂記  一山  趙昺奎
夫子之聖은 其尊이 無對라 上自國都로 下至州縣하야 莫不建學立祠하야 以祀之하다 東方이 自麗季로 竺敎盛而學校廢하다 安文成公晦軒先生이 慨然以扶正闢邪로 爲己任하야 平居에 奉孔朱子畵 像於宅後精舍하시와 以寓尊慕之誠하시고 嘗有詩曰滿庭春草寂無人이라하시니 蓋愴感之深也라 遂創立太學하야 悉倣華制하고 納土田臧獲하고 購祭器樂器하고 貯聖賢書籍하니 於是乎禮樂文物이 燦然可觀이라 嘗謂諸生曰吾於中國에 得見晦菴著述호니 發明聖人之道하고 攘斥禪佛之學하야 功足以配仲尼라欲學仲尼댄 先學晦菴이 可也라하시니 先生之於我東에 其興儒之功이 又豈不足以配晦菴哉아 晉州硯山居安氏晦軒後裔也라 嘗謀及于吾黨老儒李道默李祥奎趙鎬來鄭圭錫諸公曰吾祖之所嘗尊慕者孔朱夫 子也라於此焉建夫子廟하야 爲道學之祖宗하고以配晦菴晦軒配享一室則甚得一體尊術之道오 亦衰世扶正之一道也라하니 諸公이 樂聞而爲之先後之라 歲癸丑迺立祠堂하야 妥孔子影幀於堂中南面하고 朱安二子影幀은 東西配從享하고 顔曰道統祠라하니 曲阜衍聖公이 記其事書額하고 祠前에 立同文堂하야 以爲藏修遊息之所하고 堂前에 左爲閣曰光明인니 以藏編年年譜實記之板하고 右爲齋曰萬卷인니 以資諸生讀書肄業之所하고 春秋享菜禮於祠하고 將事訖에 行鹿規藍約하야 衣冠絃誦濟濟洋洋矣라 嗚乎라吾道茫茫에 墜緖之寄在吾林者如一髮引千斤이라 諸君이 興居于斯하고 講習于斯하야 扶樹斯道을 如指南之車와 障川之柱면 任大矣오 責重矣라 諸君은 勉乎哉이다

2022.9.22. 진주시 도통사 동문당 편액
2022.9.22. 진주시 도통사 동문당중수기 편액

同文堂重建記 
晉州治西之硯山에 有道統祠하니 奉安孔朱二夫子及晦軒先生安文成公像하고 春秋에 卜日祀之하다 其多士行禮會講之室曰同文堂이라 始晦軒先生이 爲高麗贊成事時에 獻宅爲國學하고 納土田臧獲하야 以供生徒하고 以餘貲로 付博士金文鼎하야 入中國하야 畵先聖及七十子像하고 竝求祭器樂器六經以來하니 是時에 國中之俗이 惟知祈佛祀神하고 孔子之廟난 只寂然而已라 自是之後로 七管十二徒諸生이 橫經受業者動爲千數라 退陶詩香燈簫管歸何處오 聖廟千間釋菜人者是也라 又先生晩年於宅後精舍에 奉孔朱眞像하고 朝夕瞻敬하야 因自號爲晦軒하니 是祠之奉安孔朱가 實先生精舍遺意而後之人이 以吾東知慕孔子가 自先生始라하야 亦以先生從焉하니 蓋義起也라 祠之創이 在癸丑年間鄕先輩李南川道默李惠山祥奎趙霞峰鎬來鄭驥汀圭錫安芝山孝鎭이 寔主其議而闕里衍聖公孔令貽가書其額하고 後二十二年甲戌에 以講堂이 湫隘에 無以容多士라하야 改建而新之하니 惠山之從子鎭輔와 霞峯之弟相來가與先生之裔明植으로 董其事하고 扁額楹聯은 亦衍聖公孔悳成筆也라 明植以書來曰堂不可以無記오 同文之義을 不可以不明示後人인니 吾子난其圖之라하야날 余曰然하다 思傳에 曰今天下書同文이라하니 孔子之時에 洋外之文이 不入於中國故로 稱之如此라 今之時에 蟹行之文이 一出而天下之文이 日趨於變而不可同也라 然而彼所謂文은 文其所文인니 非吾所謂文也오 吾之所謂文者난 道也니 孔子所云天之未喪斯文이 是斯道未喪之謂也라 斯道者何道也오 在天에 爲日月星辰이니 日月星辰者난 天之文也 오 在地에 爲江河山澤인니 江河山澤者난 地之文也오 在人에 爲詩書禮樂이니 詩書禮樂者난 人之文也라 天地與人으로 其理一也니 其理一故其道同하고 其道同故로 其文이 不可以有易也라 異時天心悔禍에 陰邪滅息하야 將三聖賢之道復明於世則天下之文이 不期 於同而同也라 此同文說也인라 堂之東에 有光明閣하니 藏三聖賢編年年譜己卯名賢錄晦軒實記刻板이오 西有萬卷齋하니 諸生肄業 之所오 門曰啓東이오 創祠碑則武夷紫陽書院朱緝齋敬熙所撰云
歲甲戌秋 晋山 河謙鎭 記

 

2022.9.22. 진주시 도통사 태극문
2022.9.22. 진주시 도통사 태극문 편액
2022.9.22. 진주시 도통사
2022.9.22. 진주시 도통사 편액

 

2022.9.22. 진주시 도통사기

道統嗣記
自生民以來 斯道之統 聖聖相傳 莫不以敬存心 以立人極 若堯舜禹之精一執中 湯之慄慄危惧 交武之翼翼顯承 周公之夕惕待朝 是也 然而後堯舜而集羣聖大成之功 莫盛於孔子 後孔子而集群賢大成之功 莫盛於朱子 後朱子而扶正學闢邪敎 爲東方千載儒宗之功 亦莫盛於交成公晦軒安子也 先生嘗繪像孔朱兩聖賢 朝夕瞻拜 以致其敢而惟玆硯山 乃先生實記藏板遺像虔奉之所 則後學之體先生遺意者可不於釋茶之日 思所以先禮孔朱而從及於先生耶 夫以大聖人萬世垂敎之澤 凡有血氣者莫不尊親 宜其可尸戶祝而古今尙論之士咸曰晦菴 閩中之孔子也 晦軒 東方之朱子也 是故 周愼齋 有道東曲九章則道統之有自來較然矣 一室荣享 庸非沕合於滄洲之舊禮矣乎 僉議旣同 乃於癸丑九月甲子 拓基肇役 翼年甲寅某月日 竣功 三間其廟 扁曰道統 中奉孔子像而南向 東奉朱子像而近北西向 西奉晦軒像而近南東向 廟門曰太極 嗚乎世降而習俗 極駭 詆排正學 專尙異敎 悖德慝禮之事 寧有甚於此時者乎 今當廟焉而 極其肅敬尊衞之道 菜焉而盡其蠲潔薦享之誠蘄 而以瓣香 上格於昭之靈 靡有毫髮餘憾而旣禮之後 一切除却閒謾說話 肆筵開卷 聖賢前後多少謨訓 皆得以仔細講辨 明白討論 書之冊子 攷其果得聖賢本意否乎而旣知明矣 又必行之 以篤本末始終 一於敬無所間斷然後 庶幾不 失吾儒自來相傳之心法 異教頹俗無窮之弊 或可漸祛於不惑也夫 
歲乙卯仲春布儱西 李道黙 謹記
 
도통사기
민생生民으로 시작始作해온 이래以來로 우리 도리道理를 이으며 성인聖人과 성인이 서로 지극至極한 공경恭敬으로 마음을 존存치 아니함이 없어 인간의 극치極致를 세우니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의 하나를 정精하고 중용中庸을 잡음과 탕湯임금의 겁나고 두려움과 교왕交王 무왕武王의 조심스러운 이음과 주공周公의 조석朝夕으로 조심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요堯임금 순舜임금 이후以后에 여러 성인聖人들이 모여서 크게 이룬공은 공자孔子만한이 없고 공자이후孔子以後에 여러 현인賢人이 모여서 크게 이룬 공功은 주자朱子만한이 없으며 주자후朱子後에 정학正學을 붙들고 사교邪敎를 배제하고 동방東方의 유학儒學을 위爲한 공功은 문성공회헌안자文成公晦軒安子만한이가 없을 것이며 선생先生이(회헌晦軒) 공자孔子 주자朱子 양현兩賢의 초상肖像을 모셔서 조석朝夕으로 첨배참례瞻拜參禮하셨다. 그로 인하여 이 마을은 회헌선생晦軒先生 실기장판實記藏板과 유상遺像을 정성껏 모시는 바이다. 후학後學들이 선생의 뜻을 본받아서 사우祠宇를지어서 석례釋禮를 모시며 선례공자先禮孔子 주자朱子하고 종향從享으로 선생을 모셨으니 대저 큰 성인공자聖人孔子는 영원토록 가르쳐 인도하는 은덕恩德이 인간의 삶에 영원토록 존친尊親치 아니 할 수 없어 마땅히 가가호호家家戶戶도모 하시리라. 고금古今의 사림士林들이  항상 이르기를 회암晦菴(주자朱子)은 민閩나라의 공자요 회헌晦軒은 동방東方의 주자朱子라 함으로 주신재周愼齋가 도동곡구장道東曲九章(주자周子가 중국中國 창滄나라 정사精舍에서 채례采禮한 예例)이 있으니 도통道統의 유래由來가 소연昭然하다. 첨의僉議하야 계축구월갑자일癸丑九月甲子日에 시작해서 익년갑인翌年甲寅에 삼간三間을 준공竣工하야 현판懸板을 도통사道統祠라 하고 중앙에 공자孔子를 봉하고 동쪽에 주자朱子를 봉하며 서쪽에 회헌晦軒을 봉하였다. 출입 문은 태극太極이라하니 아! 감탄할 일이로다. 지금의 세태世態는 정학正學을 배척하고 이교異敎를 존상하니 어찌 통탄痛歎치 않으리오. 원하노니 우리의 이 재실에서 채례菜禮를 정성精誠껏 지낸 후에는 쓸데없이 헐뜯는 말로 일절 훼방하는 것은 축출하고 우리는 다같이 성현聖賢들의 나라에서 대계大計가 되는 가르침을 본받을 것이며 자세仔細히 강론講論하고 명백明白히 토론討論하야 기록하고 교집交集하여 독실篤實히 몸과 마음으로 행하면 사리에 맞지 않은 이교異敎나 퇴속頹俗도 깨우치고 혹시나 회심回心하여 우리 정학正學에로 돌아오지에 않을까하야 지금에 이르러 우리가 있고 이 모두가 우리에게 있으니 다함께 힘쓸지어다.
乙卯(1915) 봄이 한창일 때 롱서儱西 이도묵李道黙 삼가 짓다.

 

2022.9.22. 진주시 도통사기

道統祠記
嶠之南晉州之硯山에 有神宇穹隆하야 竝日月窮天地而於穆肅雍 曰道統祠니 卽大聖先師文宣王孔夫子聖靈所妥也라 配以晦菴朱子하고 從祀以晦軒安子하니 以其嫡統相承也라 野闊江淸하고 竹挺木秀하야 地毓이 得宜하니 洞之聖知와 嶺之順德과 潭之皇士가 亦其有應也라 祠之正門曰太極인니 言孔子啓太極倫理講明이오 堂曰同文인니 言天下書同文이오 閣藏編年年譜하고 名以光明은 言光宇宙而明天下오 齋난 所其學者肄業인니 名以萬卷은 言經史富大오 扁其外正門曰啓東인니 言大聖之道啓于東方也라 祠可以巍乎萬代오 敎可以宗乎萬邦故八域方家가 咸皆俯趨하고 中華衍聖公孔令貽와 光祿大夫孔祥霖이 撰序撰頌寫額하야 以崇衛을 無間中東하니 尊親이 極矣라吾知其普天下舟車所至之國이 亦將皆化於大成敎而表準乎斯祠也리라 雖然이나 其在萬餘里外에 無所待而興焉을 有如安子之學孔子하야 先學朱子然後에 可也라 其有所學朱子者則必先學安子也리라 嗟夫라 今洪潮滔天에 吾道若一髮而李南川道默李惠山祥奎鄭驥汀圭錫趙霞峯諸公이 以隻手熱誠으로 克創斯祠하니 此非其天之所命歟아 寔天之所命也니라

歲甲子孟春 安子二十一世孫 孝鎭 謹記

도통사기
지산 안효진
영남(嶺南)의 진주(晋州)에 신성한 집이 높다랗게 있으니 일월(日月)과 함께 하고 천지(天地)와 무궁하며 씩씩하고 엄숙 화합한 곳을 도통사(道統祠)라고 하나니, 즉 대성선사(大聖先師)인 문선왕(文宣王)¹⁾ 공부자(孔夫子)의 성인영위(聖人靈位)를 편안히 모시는 곳이며, 회암(晦菴)인 주자(朱子)로서 배향(配享)하고 회헌(晦軒)인 안자(安子)로서 종사(從祀)하였으니, 그것은 적통(嫡統)을 서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들은 넓고 강(江)은 맑으며 대나무는 빼어나고 수목(樹木)은 수려(秀麗)하여 땅의 정기를 받음이 마땅하나니, 성지동(聖知洞)과 순덕령(順德領)과 황사담(皇士潭)이 역시 그곳에 부응함이 있었다.
도통사(道統祠)의 정문(正門)은 태극문(太極門)이라고 하는데, 공자(孔子)께서 태극(太極)을 열어 윤리(倫理)를 강명(講明)하였음을 말함이요, 당(堂)은 동문당(同文堂)이라고 하니 천하(天下)의 서적(書籍)은 동문(同文)이라는 것을 말함이요. 장판각(藏版閣)에는 편년(編年)과 년보(年譜)를 간수하고 이름을 광명각(光明閣)이라고 한 것은 우주(宇)가 빛나서 천하(天下)를 밝힘을 말함이요, 제실(齊室)은 그 학자들이 학업을 기르는 장소이니 이름을 만권제(萬卷齊)라고 한 것은 경사(經史)가 풍부하고 많음을 말함이요, 그 외정문(外正門)의 현판을 계동문(啓東門)이라고 한 것은 대성현(大聖賢)의 도(道)가 동방(東方)을 계도(啓導)함을 말함이니라.
도통사(道統祠)는 가히 만대(萬代)호 우뚝할 것이고 유교(儒敎)도 가히 만방(萬邦)의 종교(宗敎)가 될 것이기 때문에 팔도(八道)의 대방가(大方家)가 모두 다 머리를 숙이고 달려왔고, 중화(中華)의 연성(聖)이신 공영이(孔令貽)와 광록대부(光祿大夫)이신 공상림(孔祥霖)이 서문(序文)도 짓고 송시(頌詩)도 짓고 현판 도통사(懸板 道道祠)도 쓰시어 높이 보위(衛)을 중화(中華)나 동방(東方)이 차별이 없었으니 존숭(尊崇)하고 친애(親愛)함이 극진하였다. 나는 그 온 천하(天下)에 배나 수레가 다니는 나라들이 한 장차 모두가 대성(大成)한 유교(儒敎)에 감화(感化) 되어 이 도통사를 표준(表準)으로 삼을 것임을 알겠노라.
비록 그러나 그 만여리(萬餘里)의 밖에 있으며 기다리는 바가 없이도 흥성(興盛)하였음을 마치 안자(安子)께서 공자(孔子)를 배울려면 먼저 주자(朱子)를 배우셨던 것과 같이 한 뒤에라야 가능할 것이니, 그 주자(朱子)를 배우고자 하는 자(者)가 있다면 반드시 먼저 안자(安子)를 배워야 한다.
아! 슬프다. 지금 홍수(洪水)의 조류(潮流)가 하늘에까지 넘실거려 우리의 도(道)가 마치 하나의 털끝과 같은데 남천(南川)이신 이도묵(李道默)과 혜산(惠山)이신 이상규(李祥奎)와 기정(驥汀)이신 정규석(鄭圭錫))과 하봉(霞峯)이신 조호래(趙鎬來)등의 여러분이 맨손의 열성(熱誠)으로서 능히 이 도통사(道統祠)를 창건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명(命)하신 바가 아니었겠느냐? 이것은 하늘의 명(命)이신 바이었느니라?

1924년 음력 1월 첫봄에 안자 21세손 효진 삼가 짓다

【주석】
문선왕(文宣王)¹⁾ : 공자(孔子)의 존칭(尊稱),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開元 二十七년(736)에 추증(追增)함.

 

2022.9.22. 진주시 도통사이건상량문

 

2022.9.22. 진주시 도통사이건기


道統祠移建記 
晉州柳樹里 有道統祠 卽光復五十三年丁丑 自硯山所移建 而奉安孔朱二子 及文成公晦軒安先生 像薦享之所也 祠門曰太極 孔子啓太極 而倫理講明之意 堂曰同文取義 於天下書同文之語 閣曰光明所藏編年年譜 光明天下之意 室曰萬卷 學者肄業書 備萬卷之意 正門曰啓東 聖敎啓東方之謂 總以名之曰道統祠 祠之創在於社屋 四年癸丑 而堂則重建 於後二十二年甲戌 往歲癸酉卒然燒失 今鳩材而同時新築 其規依舊而扁亦無改焉斯址也 頭流南脈蜿蜒百里 起三峯山 山之東脈包藏結局 鍾精毓氣 且鏡湖德川之銀波 自北滾滾東流合 爲晉陽湖 蛟龍潛在於汪洋千尋 其通海江流 繞帶數弓地至 於門外而秦達望中 又有松竹 吾柳之鬱林 鳳飛朝陽鶴鳴九皐 豈非天慳地秘之仙區哉 其爲聖地固得宜矣 蓋創設己經八十有四年 而荏苒至今滄桑之劫 無時不在陵化 而爲波祠亦未免浸水漲溢 於是南州之士 相地于斯賴政府之經營閱數月 而工訖山河增彩 洞府改觀矣 逮旣落 先生后孫 星植炳源 日瑀植 以多士之意 責記於寅巑 伏窃惟孔子 天縱之聖 後堯舜而集成群聖者莫盛於孔子也 朱子命世之賢後孔子 而明敎於四海者 莫盛於朱子也 先生百世之師 後朱子 而闡敎於海東者 莫盛於先生也 麗末國俗祈佛賽神 夫子之敎 寂然衰微 當此之時 先生建大成殿 宣揚聖學吾東經學之興 先生之力也 時宋學尙末傳來 先生慕朱子像 以祀之仍 以自號晦軒 其尊慕之忱 於此可窺焉 惟彼硯山乃虔奉先生遺像之所 則後學之景仰者不思所 以享孔朱子 而從祀先生耶 此三聖賢之所 以奉享於一室也 嗚呼天地晦 旨彛倫墜地 異端薰灼 正學斁絶 斯道之不祥寧有甚 於今日耶雖然天之所 廢天必興之其 爲先生後從者 紹承先生之業注心 於殘線興復 則必返之兆不期 而自到矣 盍胥勉哉 道統之說 如右略擧使後來用 是爲依歸柯 則而知有所自厲也 今玆之役 始終賢勞者 移建有司朴尙鳳 其人也
光復丁丑夏至節 後學 朔寜 崔寅巑 謹記

도통사이건기
진주(晋州)의 유수(柳樹)에 도통사(道統祠)가 있으니 곧 광복오십삼년정축(光復五十三年丁丑)에 연산(硯山)에서 이건(移建)한 바로 공자(孔子) 주자(朱子)와 문성공(文成公) 회헌안선생(晦軒安先生)의 상(像)을 봉안(奉安)하고 향례(享禮) 드리는 곳이다. 사문(祠門)은 태극문(太極門)이니 공자(孔子)가 태극(太極)을 열어 윤리(倫理)를 강명(講明)한 뜻이고 강당(講堂)을 동문당(同文堂)이라 하니, 중용(中庸)에서 이른바 천하(天下)의 글은 동문(同文)이라는 뜻이며, 각(閣)을 광명(光明)이라하니 책을 보관하는 곳으로 편년(編年)과 년보(年譜)를 간수하고 빛나서 천하(天下)를 밝힌다는 뜻이고, 집[室]을 만권(萬卷)이라함은 학자들이 학업을 익히는 곳이라 서적 만권(萬卷)을 갖춘다는 의미이다. 정문(正門)을 계동문(啓東門)이라함은 공자(孔子)의 교(敎)를 동방(東方)에 연다는 뜻이니, 총칭(總稱)하여 도통사(道統祠)라 이른다. 사(祠)의 창시(創始)는 사옥사년(社屋四年)계축(癸丑)인데 단지(但只) 당(堂)은 이십이년(二十二年)후 갑술(甲戌)에 중건(重建)을 하였으나 지난 계유년(癸酉年)에 별안간 소실(燒失)되어 신재(新材)를 모아 함께 세우니, 그 규모(規模)는 옛과 같고 편액(扁額)도 바꾸지 않았다.
이 터는 두류산(頭流山) 남맥(南脈)이 백리(百里)를 달려 삼봉산(三峯山)을 일으키고 삼봉산(三峯山) 동맥(東脈)이 결국(結局)하며 정기(精氣)를 모았으며, 또 경호강(鏡湖江) 덕천강(德川江)의 은파(銀波)가 북(北)에서 동류(東流)하여 합쳐서 진양호(晋陽湖)가 되었으니, 그 넓고 깊은 곳에서는 교용(蛟龍)이 잠겨 있고 그 통해(通海)하는 강류(江流)는 얼마쯤 돌고 돌아 문밖에서 진청(秦請)하며, 안계(眼界)에는 또한 송죽(松竹)과 오류(五柳)의 창림(蒼林)이 있어 봉(鳳)이 해돋이에 날고 학(鶴)이 호반(湖畔)에서 우니, 어찌 천지(天地)가 아낀 신선구역(神仙區域)이아니겠는가? 그 성지(聖地)를 마련함에 진실(眞實)로 적당(適當)한 곳이다.
대개 사(祠)를 창설(創)한지도 팔십사년(八十四年)을 지났다. 흘러간 세월(歲月)동안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어 산(山)이 변하여 강(江)이 되니, 사(祠)도 또한 침수(浸水)가 넘쳐들 게 되었다.
이에 남주(南州) 선비들이 이곳을 가려 사지(祠址)를 정하고 정부(政府)의 경영(經營)에 힘입어 수월(數月) 뒤에 역사(役事)를 마치니, 산천(山川)이 경색(景色)을 더하고 동부(洞府)의 모양이 일신(一新)되었다. 그 낙성(落成)에 미쳐 선생후계(先生後孫) 성식(星植) 병원(炳源)이 인찬(寅噴)에게 기문(記文)을 구(求)함으로 엎드려 생각하니, 공자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聖人)이라 요순이후(堯舜以後)로 구성(群星)의 덕(德)을 집성(集成)한 이는 공자(孔子)보다 더 나은 이 없고, 주자(朱子)는 하늘이 명(命)한 현인(賢人)이라 공자이후(孔子以後)로 성교(聖敎)를 천하(天下)에 밝힌 이는 주자(朱子)보다 성(盛)함이 없으며, 선생(先生)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주자이후(朱子以後)로 성교(聖敎)를 해동(海東)에 들춘 이는 선생(先生)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 당시(當時) 국속(國俗)이 신불(神佛)에게 비는 일만 알았으므로 부자(夫子)의 교(敎)는 쇠하여 쓸쓸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선생(先生)은 대성전(大成殿)을 세우고 성교(敎)를 선양(宣揚)하였으니, 동국(東國)에 경학(經學)을 일으키게 된 것은 실(實)로 선생(先生)의 힘이다. 그때 송학(學)이 전래(傳來)하기 전(前)인데도 선생(先生)은 주자(朱子)의 상(像)을 사모(思慕)하여 향사(享祀) 드리고 인(因)하여 회헌(晦軒)이라 스스로 호(號)를 지었으니 그 경앙(仰)한 정성을 이에서 엿볼 수 있다. 생각건대 저 연산(硯山)은 선생유상(先生遺像)을 봉안(奉安)하고 향사(享祀)드리는 곳이 있으니 후학(後學)으로 선생을 이어받는 이 어찌 공주자(孔朱子)를 향(享)하고 선생(先生)을 종사(從할 일을 생각지 않았겠는가? 이가 산성현(三聖賢)을 일실(室)에서 봉향(奉享)하는 까닭이다.
아아! 천지(天地)가 깜깜하여 이륜이 땅에 떨어지고 이단(異端)이 세를 들춰 정학(正學)이 두절하니 우리 도(道)의 불행(不幸)함이 어찌 이보다 더 심(甚)하겠느가? 비록 그러나 하늘이 폐하는 바에 하늘이 일으키나니 그 선생(先生)의 후대(後徒)되는 이 선생(先生) 지업(志業)을 이어받아 쇠잔 사도(道)의 흥(興)에 주심(心)하면 필반(必返)의 한 징조가 기약하지 않아도 자래(自來)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성현도(聖賢道) 통(統)의 설(說)을 위와 같이 엮고 후래(後來)로 하여금 이로써 의귀(依歸)하는 법(法)을 삼아 스스로 힘쓸 줄을 알게 한다. 이번 역사(役事)에 있어 시종(始終) 노고(勞苦)한 이는 이건(移建) 유사(有司) 박상봉(朴尙鳳) 그 사람이다.
광복정축하지절 후학 삭영 최인찬 근찬 光復丁丑夏至節後學 朔寧 崔寅讚謹撰

 

道統祠上梁文 滄上  李商永
自洙泗而閩洛하고 自閩洛而竹溪하니 淵源有所來矣으 由學校而序庠하고 由序庠而書院하니 俎豆勿替引之라聖賢一體安靈에 春秋兩節釋奠이라 伏惟我孔夫子난 生民未有에 群聖集成이오 天地合德에 日月合明이라 名言不得예 宮墻之高와 宗廟之美窺測爲難이라 過者化存者神에 捷于影響이오 日所照露所墜에 莫不尊親이라 禮樂은 監殷周에 縱未遂吾從之願이나 尸祝이 遍於夷夏에 皆曰有罔極之恩이라 念紫陽之挺生에 纘素王之統緖라 鍾得太和元氣에 符尼岑降聖之年이요 志切恢復中原에 値宋室遷都之世라 講顔曾思孟周張程邵之學에 如日中天이오 明君臣父子夫婦朋友之倫에 爲民立極이라 氣像則千仞壁立이오 包括則萬里海涵이라 至若晦軒先生하야난 實倡靑邱理學이라 掛眞幀而北而拜하니 警咳如承이요 抄新書而東灑來하니 奎璧移次로다 奴婢田宅之納에 煥新制於芹宮이오 香燈簫管之歎은 闕邪說於蔥嶺이라 讀魯史而服義에 深恨天下帝單于오 與元官而論經에 皆稱海東有朱子라 地雖距萬里遠이나 道則是一串來라 其在後生尊崇에 莫如同祠合享이라 硯山下卜地營室에 上應三光이오 同聲相應에 踰嶺湖而士赴라 量材爲用에 輸木石而雲委라 進踵周愼齋之白雲에 星霜이 累改하고 揭額衍聖公之墨子에 江山이 增輝라 四境에 無獸蹄鳥跡之交하니 地是乾淨이오 一朝에 化鳶飛魚躍之所하니 人可作成이라 助擧虹梁에 庸替燕賀라抛梁東하니 桃鷄先唱萬邦同이라 聞之而起孜孜者난 舜跖須分一念中이라 抛梁南하니 多少雲山翠積嵐이라 緬想當年登泰快에 聖人氣像可相參이라 抛梁西하니 崦嵫冉冉夕陽低라 寸陰當惜丁寧訓은 大禹千秋是耳提라 抛梁北하니 漠漠幽都深閉塞이라 天理循環此際看에 微陽一線替消息이라 抛梁上하니 正色 蒼蒼日仰望이라 咫尺赫然天帝臨에 心頭有敢一毫忘가抛梁下하니 農夫暑日에 耕於野라 案頭讀罷二程書하니 一蠧格言知者寡라 伏願上梁之後에 風俗丕振하고 士林이 蔚興이라 昏衢之燈燭을 高揭에 正路之荊榛을 廓拓이라 七日陽復之漸이 此爲庶幾에 五星奎運之開是爲兆朕이라 承鹿洞之規制에 闡蝶域之文明이라 九法이 不斁에 三綱이 不淪이라 語其要則居仁由義오 千世在前에 百世在後라 所可勉者난 繼往開來라


출처 및 참조
두산백과
경상국립대학교 고문헌도서관-남명학고문헌시스템

진주누정지-진주문화원/동아인쇄 출판사(199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