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구 다대동 산 31-2는 아미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응봉봉수(鷹峰烽燧)가 있는 곳으로 해발 218m, 좌표는 35°03'57"N 128°58'09"E를 가리킨다.
응봉봉수(鷹峰烽燧)는 제2거직봉 봉수의 시작지 이기에 이곳의 역할을 알기 위해 먼저 찾았다. 나름 인터넷을 통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 했지만 홍티고개에 도착하고 보니 임도가 막혀있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다대사를 경유하는 길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다시 원점 회귀하여 홍티고개에서 등산을 시작하게 됐다. 이정표에는 봉수대까지 0.9km라 적혀있어 용기 내어 출발했다. 산행의 초입에 약간의 오르막이 100m 정도 있었지만 이후 거의 평지처럼 걷는 구간이 있었고 마지막 능선을 오르는 구간은 50m가 오르막이었다. 각오한 것보다 쉽게 능선을 오르고 의자에 앉아 갈 방향을 보니 그곳에 응봉봉수가 있다.
봉수대의 입구에는 기와 파편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봉수군의 주거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버려진 듯한 텐트가 있었으며 봉수대 오르는 계단 옆에는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라는 표석이 있었다. 봉수의 연대(煙臺)를 중심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중앙의 봉수대는 기단의 직경 4m, 높이 1m, 화구는 가로세로 1m이며, 봉수의 직경은 3.4m~2.8m, 높이 3.5m로 만들어 상징성을 크게 했다.
응봉봉수대는 전국 5거 봉수대 중 직봉 제2거의 기점이며 한낮에 봉수를 올리면 다대포 응봉봉수-양산-경주-영천-안동-단양-충주-광주-서울남산에 해지기 전까지 도착하게 된다.
응봉봉수대는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황령산·계명산·간비오산·오해야항 등 4곳의 봉수대만 기록되어 있고,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응봉 봉수대의 기록이 최초로 확인되어 그 기간에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할 기관은 다대진(多大鎭) 이고 도별장(都別將) 1인을 두며, 그 밑에 별장(別將) 6명, 감고(監考) 1명, 봉군(烽軍) 100명을 배치하였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99) 봉수조(烽燧條)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原文 | 한글 |
荒嶺山烽燧 在府南十里 西應龜峰 北報鷄鳴山 相距三十里 | 황령산봉수 부 남쪽 10리에 있다. 서쪽으로 구봉에 응하고, 북쪽의 계명산에 보고하며 서로의 거리는 30리이다. |
鷄鳴山烽燧 在府北二十里 南應荒嶺山 北報梁山渭川 相距四十里 | 계명산봉수 부 북쪽 20리에 있다. 남쪽으로 황령산에 응하고, 북쪽의 양산 위천에 보고하며 서로의 거리는 40리이다. |
吾海也項烽燧 東應荒嶺山 西報金海省火禮山 今廢 | 오해야항봉수*1 동쪽의 황령산에 응하고, 서쪽의 김해 성화례산에 보고하나 지금은 폐지됐다. |
鷹峰烽燧 在府南五十里 左道之初起 東報龜峰 相距二十五里 | 응봉봉수 부 남쪽 15리에 있다. 좌도와 시작했다. 동쪽의 구봉에 보고하고 서로 거리는 25리이다. |
龜峯烽燧 在府西二十五里 吾海也項廢後 移于此 西鷹峯 東報荒嶺山 相距二十里 | 구봉봉수 부 서쪽 25리에 있다. 오해야항에서 폐기한 후 서쪽 응봉으로 옮겼다. 동으로 황령산에 보고하고 서로의 거리는 20리이다. |
干飛烏烽燧 府東二十里 左道之左邊初起 北報機張南山 相距十五里 | 간비오봉수*2 부 동쪽20리에 있다. 좌도의 좌측변에 시작했다. 북쪽의 기장 남산에 보고하며 서로의 거리는 15리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23권–경상도 동래현(東萊縣)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原文 | 한글 |
黃嶺山烽燧 西應吾海也項,北應鷄鳴山,東應干飛烏山 | 황령산봉수 서쪽으로 오해야항과 응하고, 북쪽으로 계명산과 응하며, 동쪽으로는 간비오산과 응한다 |
鷄鳴山烽燧 南應黃嶺山,北應梁山郡圓寂山 | 계명산봉수 남쪽으로 황령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양산군의 원적산에 응한다. |
干飛烏山烽燧 北應機張縣南山,西應黃嶺山 | 간비오산봉수 북쪽으로 기장현 남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황령산에 응한다. |
吾海也項烽燧。東應黃嶺山,西應金海府省火禮山 | 오해야항봉수 동쪽으로 황령산에 응하고, 서쪽로 김해부 성화례산에 응한다. |
〔新增〕 鷹峯烽燧。東應吾海也項,西應金海省火禮山 | 『신증』 응봉봉수 동쪽으로 오해야항에 응하고, 서쪽으로 김해 성화례산과 응한다. |
司僕寺提調啓曰 |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가 아뢰기를, |
東萊 吾海也項, 元放馬七百九十三, 而故失七十八, 虎攬三十八 | 동래(東萊)의 오해야항(吾海也項)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7백 93두였는데 고실이 78두, 범이 잡아 먹은 것이 38두이며, |
위 조선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오해야항봉수(吾海也項烽燧), 즉 '외양간으로 가는 길목'은 말의 방목장에 설치했던 봉수였음을 알게 되고 응봉봉수(鷹峰烽燧)로 이건 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은 두송반도 솔섬 고래섬 화손대 나무섬 쥐섬 몰운대 일부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
출처 및 참조
천년 세월 이어온 부산 땅 이름|작성자 I CAN DO IT
신증동국여지승람 23권–경상도 : 동래현(東萊縣)|작성자 어이무사10
사하구청/https://www.saha.go.kr/tour/contents.do?mId=0302110000
[네이버 지식백과] 응봉 봉수대 [鷹峯烽燧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99) 봉수조(烽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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