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도 못 하고 김해공항으로 가기 위해 중앙동 경유지에 도착해 차량에 올랐다. 남산버스정류소에서 선배 부인이 운전하는 차량은 일행을 태우고 정신없이 공항을 향했다. 다행히 시간은 늦지 않아 다른 일행들과 국내선 2층 약국 앞에서 합류하여 대한항공에 올랐고 그렇게 제주도에 도착해 첫날의 일정이 시작됐다.
공항에서 현지 관광안내인을 만나 줄지어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첫 번째 도착지인 애월한담공원의 물허벅여인상 앞에 다다랐고 일행은 단체 사진을 남긴 후 제주 올레길 15번 해안산책로를 걸었다.
단체 사진을 찍은 물허벅여인상의 뒤쪽에는 『물허벅여인상』에 대한 내력이 석판에 새겨져 있어 옮겨 본다.
『물허벅여인상
물허벅은 이 고장에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식수를 길어 나르던 생활의 도구이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물허벅을 등에 진 제주 여인상은 우리 선인들의 근면함과 애환이 깃든 생활문화의 상징이다.
오늘 애월청년회의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우호JC인 의왕청년회의소와 공동 사업으로 60여 회우의 뜻을 모아 영원히 기념코저 이 상을 세운다.
1992년 8월 19일』
한담공원의 한켠에는 ‘녹담거사(鹿潭居士) 장한철*선생표해기적비(張漢喆先生漂海紀蹟碑) 신묘오월우하근서(辛卯五月雨荷謹書)’라 새긴 비갈이 있고 비갈의 받침돌에 김종호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주석]
애월 출신 장한철은 1770년(영조 46년) 12월 25일에 과거시험을 보러 배를 타고 뭍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일행 29명과 표류하다 일본의 류쿠열도의 무인도에 도착해 8명이 생환하는 4개월의 과정을 39장의 한지에 표해록을 쓴 사람이다. 표해록에는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 전설, 류쿠태자에 관한 전설 등이 실려 있어 해양지리서와 설화집으로서 가치가 있어 문화재로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가린돌 그 파도소리
巡東 김종호*
파도에 물을 누여
해류로 떠 흐른 수만리
필봉석을 갈고 닦아서
天理를 헤아리는가
그 용기와 지혜로
미친 바다를 어르시다
그 세월 ‘표해록’에 누어
물소리 새소리나 듣다가
어릴적 뛰놀던 한담동산에
파돗소리에 씻기는 혼불
문학의 향기는 영원하여
오늘에 살아 숨을 쉬는가
이천십일년 가을 한곬 현병찬
[주석]
巡東 김종호* - 1939년에 제주도 애월에서 태어나 애월에서 살고 있으며, 2007년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뻐꾸기 울고 있다』 『설산에 올라』 『순례자』 『소실점』 『날개』가 있다.
제주 올레길 15번 해안산책로를 걷는 일행들은 약간 덥긴 하지만 물빛과 작은 바람이 주는 해방감에 영혼이 맑아지는 듯 해안 풍경의 매력에 빠졌다. 1.2km 거리를 걸어 곽지해수욕장의 이름 없는 정자에 모두가 모인 후 대기한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월령리로 향했다.
월령리(月令里)는 제주 4.3사건으로 인하여 일생을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의 기구한 이야기가 서려 있는 마을이다. 할머니의 애닲았던 생을 마감한 마을과 집을 보기 위해 도착한 월령리는 해안을 따라 자생하던 선인장군락지가 1976년 9월 9일에 제주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9월 11일에 천연기념물 제429호로 변경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이다.
손바닥선인장으로 불리는 월령리의 선인장은 멕시코가 원산인데 그곳에서 떨어진 열매가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떠돌다가 이곳 해안에 정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월령리 주민들은 뱀이나 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 울타리인 돌담 옆에 선인장을 심게 되었다고 한다.
선인장은 사막처럼 건조한 날씨와 척박한 토양에도 생명력이 강하여 가뭄에도 고사(枯死)하는 일이 없다. 척박한 돌 틈에서도 잘 자라는 선인장은 6~7월이면 노란 꽃이 피고 11월에는 열매가 보라색으로 익는다. 특히 백년초라 불리는 열매는 소화기나 호흡기 질환에 좋은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며 이 마을의 고소득원 식물이 되고 있다.
이 선인장군락은 선인장의 지리적 분포상 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호해야 할 귀중한 자연유산이다. 손바닥선인장의 재배지를 확보하고 월령마을의 특산물로 자리하여 지속 가능한 경제 작물이 되었으면 한다.
제주 올레길 14번 해안길이 통과하는 마을 안쪽 한림읍 월령리 380은 진아영 할머니가 살았던 20㎡(6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의 집이다. 일행들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버스가 기다리는 마을의 반대편으로 이동을 했다.
잠시 마을 안의 풍경을 둘러보다 월령리복지회관 앞으로 오게 됐는데 입구에 4기의 비석과 월령리(月令里) 유래 안내판이 있다. 회관 안의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이 비석의 내용은 모르는 상황이라 사진을 찍고 돌아 나왔다.
여기까지는 일행들과 함께였지만 잠시 마을 안 도로에 무리진 자주달개비를 보고 사진을 남기면서 일행과 떨어지게 됐는데 큰 도로로 나와보니 일행들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버스에 내렸던 곳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버스도 없고 함께한 일행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어 결국 전화로 버스가 있는 위치를 물어 되돌아가는 시간과 걸음걸이를 했다.
아래에는 월령리(月令里) 유래와 비석 4기의 내용을 옮긴다.
在日僑胞愛鄕稱頌碑 재일교포 애향 칭송비
母國耽羅 故鄕山川 모국 탐라가 고향 산천인데
離鄕海外 異國生涯 고향 떠나 해외 이국에서 생애를 다했으나
愛鄕關心 何時不戀 애향의 관심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때가 있었겠나.
僑胞獻誠 後世榮譽 교포로 정성 다해 바치니 후세에 영예가 있으리
월령역대리장 기념비
순위 | 이름 | 순위 | 이름 | 순위 | 이름 |
1대 | 이영찬 | 2대 | 김병옥 | 3대 | 진위현 |
4대 | 윤태백 | 5, 15대 | 박영근 | 6대 | 이명선 |
7,10,12대 | 윤희병 | 8대 | 박두찬 | 9대 | 박행남 |
11대 | 양부홍 | 13대 | 송영배 | 14, 18대 | 고승구 |
16, 19대 | 이여진 | 17대 | 박홍조 | 20대 | 박순집 |
21대 | 이종호 | 22, 26대 | 박용수 | 27대 | 강한철 |
鄕長金公並玉功績碑 향장 김공병옥 공적비
金公性品 正直快活 김공의 성품은 정직 쾌활하고
愛鄕情神 平生念願 고향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평생 염원했다.
四三危機 外勢抗拒 4.3위기에 외부 세력에 항거한
不屈意志 永世不忘 불굴의 의지를 영원토록 잊지 않겠네
鄕長梁公行賢頌德碑 향장 양공행현 송덕비
居住星雪 夸十余年 성설(星雪)에 산지가 10년이 넘도록
愛鄕之心 恒時不變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은 항시 변하지 않고
生業勤儉 鄕約遵守 생업은 검소하며 향약을 준수하니
享年七九 餘名逝去 향년 79세에 세상을 떠나도 이름은 남았다.
월령리 설촌(設村) 유래
우리 민족의 영산인 한라산의 정기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자리 잡은 우리 마을 월령리는 한림읍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우리 월령리의 설촌 연대는 2백년전쯤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남쪽의 ‘북생이 왓’에 사람이 살았으며 마을 동쪽의 속칭 ‘임비장 머생이’에 조선시대 비장 벼슬을 한 임씨가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임비장이 우리 마을 설촌(設村) 시조인 것이다. 그리고 전주이씨와 밀양박씨, 파평박씨, 탐라고씨, 강씨 등이 각각 6대에서 7대를 거쳐 마을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여 이웃 마을인 금능리와의 거리가 2km인데 말을 타고 가다 금능리 마을 어귀를 나서면 나무숲 아래로는 말을 그냥 보내고 사람은 나무 숲 위를 뛰어서 마을까지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만 봐도 얼마나 숲이 울창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우리 마을의 옛지명인 ‘거문질’ 이라는 이름은 마을 주변에 성담(城담)을 연상케할 정도로 쌓여 있는 검은 현무암의 돌무더기에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마을 바닷가 쪽에도 거친 비바람을 막기 위해 높게 돌담을 쌓은 것이 또 하나의 볼거리로서 자리하고 있다.
우리 마을의 유적으로는 선사시대의 주거 유적인 ‘월령리 한들굴유적’이 있으며 한들굴유적은 전체 길이가 1.4km이며 곽지식무문토기와 적갈색무늬토기, 다량의 조개껍질과 동물뼈 등의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 되었다.
위에 소개한 성담같은 돌담위에는 국가 지정기념물 제 429호로 지정된 손바닥선인장(일명:백련초)이 자라고 있는데 손바닥선인장은 멕시코가 원산지이지만 삼백년전쯤에는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바닷물에 떠내려와 우리 마을 바닷가 바위 틈에 착생하여 번식이 되었는데 천식, 소염, 해열제 등으로 쓰이게 되면서 요즘은 건강식품으로 적국각지에 가공용과 생과용으로 널리 판매되고 있다. 손바닥선인장은 혹독한 가뭄에도 잘 견디며 매년 6월이면 노란빛깔의 꽃이 도로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루며 11월경에 열매가 자주색으로 익으면 그때부터 이듬해까지 수확한다.
1990년대부터 알려진 손바닥선인장은 건강식품으로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을 위시하여 여러 학계와 식품관련 업계에서 그 효능 효과가 입증되어 전국의 수 많은 소비자들이 선호하고 있으며 우리 마을의 주소득 작물로서 많은 경제적인 소득원을 올리는 효자 작물로 기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 마을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풍력에너지연구소가 설립되어 제주도의 특성상 풍부한 바람을 이용한 연구개발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며 살기 좋은 농어촌 어느 누구나 와서 살고 싶은 마을을 가꾸는데 마을주민 모두가 노력하는 전형적인 인심 좋은 마을이다.
월령리 해안을 배경으로 일행들 각각은 기념사진을 남기며 일상을 훌훌 벋고 다음 여행지인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齊州 缸坡頭里 抗蒙 遺蹟地)와 전시관이 있는 애월읍 항파두리로 50으로 이동을 했다.(전화:064-0710-6721)
'역사의 기록 > 문화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산 석빙고 靈山 石氷庫 (0) | 2023.08.03 |
---|---|
전단산 우곡사 이야기 (2) | 2022.11.06 |
지리산 노고단을 가다. (2) | 2022.10.28 |
단양 도담삼봉 島潭三峯 (1) | 2022.10.09 |
남해 망운산 망운사 望雲寺 주련 (0) | 2022.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