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전단산 우곡사 이야기

천부인권 2022. 11. 6. 10:12

2022.11.5. 전단산 우곡사 전경

전단산우곡사(栴檀山牛谷寺) 공덕비(功德碑)의 이야기를 티스토리블로그에 기록한 것이 다음블로그에서 tistoryblog로 옮겨지면서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2022년 10월 15일 15시경 카카오톡 서브의 화재로 인해 한때 사용할 수 없으면서 사라진 것인지는 몰라도 ‘역사와 야생화’란 블로그 기록에서 사라져 버렸다. 또한 다른 기록도 없다. 이제 믿을 만한 것이 점점 없어진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대웅전 영역

전단산우곡사栴檀山牛谷寺의 공덕비는 전단산栴檀山의 한자 이름에 대한 기록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다시 찾아가 사진을 남기고 그 내용들을 남겨둔다. 전단산은 정병산精兵山의 옛 지명이고 지금까지 옛 기록들 외에 근래에 세운 금석문金石文으로 남아 있는 한자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옛 기록 중 많은 기록이 한자로는 전단산(旃檀山)으로 기록 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旃-기 전’과 ‘栴-단향목 전’가 존재하는데 이 둘을 혼용하고 있다. 
전단이라 할 때 ‘旃檀’과 ‘栴檀’은 둘 다 단향목檀香木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보니 기록자에 따라 혼용되고 있는 듯하다.
전단산栴檀山 또는 전단산旃檀山은 현재 지명으로 사용하지 않고 “정병산精兵山”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모두 전단산이란 지명으로 등장하고 있어 정병산이란 이름이 언제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하다 보니 창원대학교 교수를 지냈던 박모씨는 일제日帝가 만든 ‘5만분의 1’ 지도에 처음 등장한다며 일본에 의한 지명 찬탈이라 주장하면서 정병산이 “봉림산鳳林山”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병산精兵山 정상에 봉림산이란 표지석을 세웠는데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국토정보공사가 창원시에 통보해 표지석을 정병산으로 교체해 지금은 정병산 표지석이 있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대웅전


언제 정병산이란 지명이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데, 일제강점기에 퇴촌마을에 살았던 유학자儒學者 안경석安庚錫 선생의 유설遺說에 의하면 『고려말高麗末 오합지졸정병어단산烏合之卒精兵於檀山』이란 구절을 인용해 “정병산精兵山”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사실을 살펴보니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들이 연합하여 왜구倭寇을 정벌하기 위해 합포를 중심으로 10만 대군이 집결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당시 진례산성進禮山城과 연계하여 정병산 일원에서 원병을 훈련했던 곳이라 정병산(精兵山:566.7m) 이름을 얻게 된 계기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창원시 지귀동 근처에 지이포只耳浦의 앞 바다를 “대구바다”라 불렀고 대구바다에 대구大口가 올라오자 빨래 방망이로 빨래하던 아낙들이 잡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는데 이 바다의 이름은 “대국바다[大國海]”였는데 그 이유는 대국大國(원나라)의 배가 들어와 정박했기에 붙은 이름이라 한다.
그 외 전단산 기슭, 현 창원대학교 뒷산에 단산사檀山寺가 있었는데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단산사지檀山寺址 주변에는 빈대껍질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단산사는 “대국빈대”의 번창으로 폐사가 됐다고 전해 오고 있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산신각

내서읍 첨두서원에 모시고 있는 옛 지귀동 출신의 명암 노경종(明庵 盧景宗 1555∼1625) 선생은 11세 때 어른을 따라 마을 뒷산인 태백산太白山[태복산太福山]에 올랐다가 함께간 어른에게 멀리 동쪽에 우뚝 솟은 산 이름을 묻고, 어른이 정병산精兵山이라 알려 주자 “정병精兵이 있는 곳에 대장大將이 없을 수 있느냐”며, 즉석(卽席)에서 「망정병산(望精兵山)」이란 시를 지었다. 그 내용이 ‘교하노씨양현세거비交河盧氏兩賢世居碑’에 새겨 전하며, 1962년 유당 김종하가 집필한 『창원군지』에 허전(許傳, 1797~1886)의 ‘첨지중추부사노경종묘갈명僉知中樞府使盧景宗墓碣銘’에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원문]
年方十一 從長者上太白山 望見精兵山 問曰 大將山安在 卽賦詩曰 ‘海國精兵出 南蠻不敢侵 將軍應在比 特立幾千尋
[해문]
방년 11세에 어른을 따라 태백산에 올라 정병산을 바라보며 묻고 대장산이 안전히 있으니 즉석에서 시를 지어 가라사대 
바다 나라의 정병이 출병하니 
남쪽의 오랑케 감히 침략하지 못한다. 
장군의 응답應答이 여기 있으니 
우뚝 섬이 몇천을 묻는가.

 

2022.11.5. 전단산 우곡사 산신각 탱화


전단산우곡사栴檀山牛谷寺는 동읍 단계리 7에 위치하며 신라 832년(흥덕왕 7)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염국사無染國師는 흥덕왕 재위 때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시기時期이다. 즉 821년부터 845년까지가 유학 시기이다. 따라서 흥덕왕 7년인 832년의 창건 설화는 믿기 힘들다.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전단산(栴檀山)에 있는 절이라고 나와 있어 그때까지는 우곡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말기의 부호인 구만호(具萬戶)에 의해 옛 절터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우곡사의 폐사는 『범우고(梵宇攷 1799)』의 기록 보다 훨씬 이후까지도 존재 했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 있어 그 내용을 첨가한다. 창원 사파동에 살았던 유학자 소산小山 김기호金琦浩 선생은 1822~1902년까지 계셨던 분으로 『소산집小山集』을 남겼는데 그 책 속에는 『우곡사에서 묵다 宿牛谷寺』라는 시 한편을 남겨 두었다. 소산小山 선생이 우곡사를 찾아 묵었을 때 나이를 추정해 보면 아마도 30대 이후 일 것으로 보여져, 1850년 이후에 까지도 우곡사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소산 선생의 시를 아래에 소개 한다.

宿牛谷寺      우곡사에서 묵다
大覺人間夢 인간 세상 헛된 꿈을 깨어보니
寒山一磬聲 한산의 풍경소리¹⁾ 장엄하구나
問爾庵中釋 묻노라 저 암자의 중아
能知夜氣淸 야기²⁾의 맑은 이치를 아시는가.

【주석】
한산의 풍경소리¹⁾ :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에 ‘달은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 하늘에 가득하고 강의 단풍과 고깃배 불이 마주하여 조는데 고소성 밖의 한산사에서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이르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라 하였다.
야기²⁾ : 밤중에 자라 나는 청명하고 순수한 생기生氣. 사람의 생기는 낮 동안에 소모되고 밤중에 조용히 쉬면서 저절로 자라는데 아친에 일어나 활동하면서 이 기운을 거듭하여 해치면 생기가 소모되어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아침의 기운을 반복해서 옥죄이면 야기가 존재할 수 없다. 야기가 존재하지 않으면 금수禽獸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했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공덕비

산신각의 좌측 공간에는 전면 가운데 전단산우곡사공덕비栴檀山牛谷寺功德碑라 새긴 비석이 서있다. 전면에

大韓佛敎曹溪宗
栴檀山牛谷寺功德碑
祈禱成就懺悔道場
대한불교조계종
전단산우곡사공덕비
기도성취참회도장

새겼고 우측면과 뒷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두었으며, 좌측에 주지 김대현의 이름과 구자호 배명국 배명인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화주 배동수, 회주 최향운 대화상, 증명 이성철 종정 등을 적었으며 불기 2532년 정월 단기 4321년 무진戊辰이라 기록했다. 서기 1988년에 세운 비석이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공덕비와 산신각


우곡사牛谷寺 입구에는 창원에서 가장 굵은 500년 이상 된 벼락 맞은 은행나무가 있어 옛 우곡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창원 분지로 오가는 옛 길의 입구에 위치했던 우곡사 은행나무는 벼락을 맞기 전에 아마도 사찰의 입구를 표식하는 표식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은행나무에 관한 기록은 ’동읍 단계리 보호수-은행나무‘를 참고하면 된다. 

 

2022.11.5. 우곡사 입구의 은행나무

우곡사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의 대웅전이 우측에 선원과 좌측에 종무소를 거느린 모습을 하고 좌우 날개에 진성각과 종각을 거느린 모습이다. 우곡사도 크게 변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영역을 넓히며 성장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계기가 오면 어떤 모습을 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대운전 영역


우곡사는 작은 공간에 건물을 배치하다 보니 아기자기한 맛이 남아 있는데 특히 대를 높여 계단을 설치한 듯한 산신각의 배치가 아름답다. 산신각 안 정면에 걸린 탱화는 신선이 호랑이와 함께하며 비천의 동자승과 선녀에게 보고를 받는 듯한 모습을 하고 소나무인듯한 쌍수의 배치가 균제미를 보여 준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단풍과 사찰

우곡사는 옛 사찰의 재건이란 측면도 있지만 자여역에서 창원 분지로 넘어오는 옛길의 이정표로서의 의미도 담고 있어 현재 창원에서 김해 봉하마을로 답사하는 “걸어서 봉하로!”의 중간 점검지가 되고 있다.

 

2022.11.5. 전단산 우곡사

출처 및 참조
내 고장 뿌리-창원시 문화공보실/금창인쇄사(1982.1)
창원군지-김종하/국제신보출판사(196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우곡사(牛谷寺)/집필(1996년) 김위석
국역 소산집-소산서당/삶과꿈(200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