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거제향교 명륜당·대성전 기문과 현판

천부인권 2022. 12. 16. 07:43

2020.2.14. 거제향교 외삼문

거제향교巨濟鄕校는 거제면 서정리 626(기성로7길 10)에 위치하며 1982년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창건 년대는 미상이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고현성古縣城이 함락되었을 때 향교도 소실되었으며, 1664년에 현령縣令 이동구가 고현에서 계룡산 기슭의 서정리로 옮겨 지었다. 1715년 다시 거제현 동쪽의 도촌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85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며 평지에 위치하는 구조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거제향교의 출입문인 풍화루風化樓 구실을 하는 외삼문外三門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 학생이 기거하는 동·서재東·西齋, 제례를 준비하는 고직사가 전면의 영역에 있고 명륜당 뒤쪽에 담장을 두르고 중앙에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좌우에 동·서무東·西廡가 있으며 일주문一柱門 형태의 내삼문內三門과 좌측에 협문夾門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송조2현宋朝二賢, 그리고 신라 2현[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고려 2현[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 등의 우리 나라 14현十四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기성향교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

거제향교의 대부분 현판은 명륜당에 걸려 있지만 옛 기록인 기성향교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¹⁾는 서재에 보관 중인데 지금의 출입문이 루樓가 아니라 삼문三門이기 때문에 걸어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성향교풍화루중수기는 이유원 선생이 1881년 8월에 거제시 거제면에 도착 할 즈음에 거제향교가 대대적인 중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귀양살이할 배소에서 1리쯤을 남기고 향교 풍화루 중수공사를 목격하고 지은 글이다. 거제가 문향임을 강조하고 또한 칭송하며, 백년을 넘어 계속해서 유교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고장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자신에게 중수문을 부탁하기에 겸손하게 거절 하신 것 같다. 이 후 귀양살이에서 복권된 후에 서울로 올라가 못내 아쉬워 풍화루 중수기를 남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
嶠南之岐城府。距京千里。僻在一隅島邑也。山川秀麗。風俗淳厚。民業耕鑿。士志崇道。家家絃誦。不絶于世。素以文鄕稱。歲辛巳。余得罪於朝。初謫中和府。再遷玆土。蕭蕭匹驢。渡水踰嶺。未及邑治一里。見土木之後旁午。問而知爲校宮重修事也。余肅而前日。昔稱文鄕者是矣。停驢而望。乃好基址也。以鷄山爲主峯。落脉蜿蜒。拓鹿洞而面鷰浦。毓文明之氣。余欽歎而歸。後五載。邑之多士某等。專來請重修文。余雖老矣。實不敢辭也。夫吾道與天地同大。與日月同明。與四時不違。何處非覆載。何處非照臨。何處非運行。而是邑之偏受之者。卽先賢之遺躅。尙不泯乎百年之下。士亦藹藹然被之無窮。况先賢之來也。擧皆穩居而還。世之又稱福地者乎。今諸君子襲先賢之風。囿福地之化。永享泰平之樂。服彬彬之習。俾絃誦不絶。終始崇吾道而不墜文鄕之稱。余在千里之遠。曷可無與榮之喜也哉。
聖上乙酉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原任奎章閣直提學致仕奉。
朝賀月城李裕元

기성향교풍화루중수기
영남에 기성부(거제부)가 있어 서울서 거리가 천리이고 외딴 한 모퉁이 섬에 고을이 있는데 산천이 수려하고 풍속이 순박하고 후하며 백성의 일은 밭을 갈고 우물을 판다. 선비의 기치는 도리를 받드니 집집마다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는다. 끊임없이 세상에다 (알리면서) 본래부터 문향의 고장이라 칭하네. 신사년 1881년에 나는 조정에서 죄를 얻어 처음 귀양 가 있는 동안은 마을에서 화목하게 응해주었다. 이 땅에 재차 옮겨 가니 쓸쓸한 당나귀 한 마리와 (함께) 물을 건너 재를 넘어 읍치 일 리에 아직 미치지 못할 때, 사람이 많아 복잡하더니 이어 토목공사를 보게 되었다. 고을 문묘를 중수하고 있는 일이라 하는데 나는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전날에 예로부터 칭하길, 문향(文鄕)이 이런 것이다. 당나귀를 멈추고는 바라보니 이에 좋은 터전이다. 계룡산이 주봉으로써 꾸불꾸불하게 산줄기를 이루며 사슴골(녹반골)을 넓히니 포구가 즐거운 표정이다. 그런 기운에 문명을 기른다네.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돌아왔다. 다섯 번을 갈아 탄 후에 아무개 등등의 읍의 여러 선비들이 오로지 중수문을 청하기에 돌아 와서, 내가 아무리 늙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내용을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였다. 대저 유교의 도(이치)와 더불어 천지와 크기가 같은데 해와 달이, 더불어 한가지로 밝구나(현명함이 같구나) 사시四時²⁾ 때를 어기지 않고 (맞추어야 하며) 하늘과 땅이 만물을 살피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천체가 운동하지 않는 궤도가 어디인가? 무릇 섬김을 받는 자가 이에 편향되는 고을이 된다. 즉 선현이 남긴 자취이다 오히려 사라지지 않았겠지? 백년 아래에 선비는 또한 점잖은 분들이 많이 모여 끝없이 두루 갖추어 갈 것이다. 게다가 선현들이 돌아오고 거의 모두가 편안히 살고 있으니 돌아온다. 세상이 또한 칭송한다. "복 받은 곳이라고" 이제 모두 군자의 선현의 가르침을 따르고 감화된 복 받은 땅에 모여들어 태평성대의 즐거움을 같이 누린다. 익혀 배우니 의복이 빛나고 더하여 현악기를 끊임없이 읊으며 유교의 도를 존중하여 비로소 (이글을) 마치니, 문향의 고장이라는 칭송을 잃지 말라. 나는 이제 천리 먼 곳에 있지만 어찌 가히 기쁜 영광을 또한 함께하지 않으랴. 
성상 고종 을유년(1885)년,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령,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원임 규장각 직제학 치사봉, 
임금께 하례하며, 월성 이유원李裕元³⁾. 

【주석】
기성향교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¹⁾ : 기성岐城은 거제의 별칭으로 약 100년 전까지 900년간 사용한 이름이며 고려초(983~1018) 거제도의 이름으로 35년간 사용했다. 지금은 루樓의 형태가 아니라 일주문 형태의 외삼문이다.
사시四時²⁾ : ① 사철 ②한 달 중中의 네 때. 곧 회晦, 삭朔, 현弦, 망望 ③하루의 네 때. 곧 단旦, 주晝, 모募, 야夜 
이유원李裕元³⁾ : 1814년(순조 14)∼1888년(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 林下筆記》·《가오고략 嘉梧藁略》·《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이유원李裕元선생 거제유배기간은 1881년 8월1일 ~ 동년 12월까지(거제면 동상리)

 

2020.2.14. 거제향교 외삼문 앞 공자상
2020.2.14. 거제향교중수기

巨濟鄕校重修記
夫崇 聖養士 國之元氣 國學郡校 土之所養也 惟玆岐城 近畿千里 化一域 城之西 濱海版圭上 聖殿屹立 此正吾夫子 乘桴之敎 便理後生 千載之感 昔太史公 過齊魯之古 觀夫子之遺風 嶺南 爲東方鄒魯之鄕也 所以先正群賢 繼繼而誦 使斯道 在於人而 不墜于地 此豈非我 聖朝培養 斯文之力 是歲之春 奉叨承恩 命知是府 翌三日 謁聖之行 遍足一牆面 廟儀雖新 修葺失時 瓦甂椽穰間 多溋損 西齋倫堂 軒臺朽敗 噫 知是府者曾不處一人而 輒無營葺之意哉 倘荐敬之餘 財力不給 敬風而備 射御致尤甚 予槪然盥吁矣 時任士人 辛英位 甫謀而葺之 亦不遐告訖者 苐待農功之暇隙矣 今玆社事 此棯民情 (其)洆緮 董之勉之 不日成之 騟煥之慶 更可時矣 後來君子 如我同志 且使之儀 而烋已 儒風而蔚盈則 庶乎 敬慕之誠 雲無愧也 夫
歲己丑中和上澣
太守 韓億吉記
校長 辛英位
掌議 尹宅根 玉致韶
鄉長 尹廷佩 辛錫枰 玉相執 
看役色吏 李基榮 


거제향교중수기
공자를 숭배하고 선비를 기르는 것은 국가의 원기元氣이다. 국학인 향교는 선비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곳으로 이곳 거제도는 경기도와 천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이다. 그러므로 경기도와 거제도를 일역화一域化하기 위해 거제도의 서쪽 바닷가 위 성스러운 성전에 위패位牌를 모셨으니 이는 올바른 우리 공부자孔夫子가 뗏목 타고 내려와 교화한 것으로 후생後生을 편하게 가르치는 것일뿐만 아니라 천년동안 인륜이 감동할 일인 것이다. 이를테면 옛날 태사공이 제나라와 노나라의 옛 폐허를 지나다가 공부자가 끼친 유풍遺風을 관찰한 것¹⁾과 같은 이야기이다. 때문에 영남은 동방의 추로자향鄒魯之鄕²⁾이었다. 이른바 우리나라 군현群賢들의 법을 바르게 세우고 대대로 암송하여 사도斯道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우리가 공자의 사상을 받들고 선비들을 교양敎養하는데 힘쓴 보람이 아니겠는가?
금년 봄 나는 임금님의 승은承恩를 받들고 부사(정3품 당하관)로 이 고을에 부임했다. 그리고 이튿날 발걸음을 내디뎌 향교의 습기 찬 면면을 돌아보니 향교의 겉모습은 비록 새로워 보이기는 하나 중수하고 기와를 보수하는 시기時期를 잃어 기와는 틈새가 벌어졌고 기둥과 서까래 사이가 습기가 차서 훼손된 곳이 많을 뿐 아니라, 두 곳의 명륜당明倫堂 동재·서재와 헌청軒廳³⁾ 또한 부패해 있으니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그 이유는 이 고을의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책임을 맡겨주지 않아 제때 향교를 당연히 해야 하는 기와를 보수하지 않아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아마 생각해보건대, 계속 향교의 현실을 아끼고 존경했지만 재력이 부족하고,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 두 가지가 모두 갖추었지만, 사대射臺(선비들이 활을 쏘는 곳)가 모두 망가져 나는 짐짓 눈물을 닦으며 손을 대야에 씻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선비인 신영위辛英位가 겨우 선비들의 뜻을 모아 중수를 했는데 이 또한 재빨리 중건하였고, 마침 농사철의 한가한 틈을 이용한 것이니만큼 이번 향교사鄕校社의 일은 온 백성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힘써 며칠 안 되어 그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향교를 중건하기 위해 말과 소를 몰아 자재를 실어 나르고 불을 피워 추위를 녹인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다시 무슨 말로 토론할 수 있으랴. 단지 후래군자後來君子나 지금 군자나 말할 것 없이 나와 똑같은 동지일뿐더러 또한 향리의 모든 이가 뜻을 모은 만큼 유풍儒風이 더욱 성대해질 것이고, 이처럼 경모敬慕하는 마음인지라,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1889년 기축년 중화 하순 거제부사 한억길韓億吉⁴⁾ 기록하다.
교장 : 신영위
장의 : 윤택근, 옥치소
향장 : 윤정간 신석평 옥상집
간역색리⁵⁾ : 이기영
삼가 정성을 다했다[愿]

【주석】
공부자가 끼친 유풍遺風을 관찰한 것¹⁾ : 그 당시 공자는 자로子路 안연顔子(回) 증자曾子 거백옥巨百玉 같은 제자를 대동하고 제나라를 지나며 한탄하는 말로 “슬픈지고, 지상의 으뜸은 윤리 이거늘 제나라는 아직 저토록 만맥蠻貊(오랑캐)의 인간만 가득하니 어느 때 저 나라는 인간이 사는 나라가 되겠느냐?"고 한탄했는데 그 뒤 제나라는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추로자향鄒魯之鄕²⁾ :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 즉 예절과 학문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곳
헌청軒廳³⁾ : 유생들이 여름이면 나와서 글을 읽던 마루청
한억길韓億吉⁴⁾ :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기축년(1889) 3월 9일 거제부사로 왔다가 임진년(1892)년 1월 10일 고종29년 정라도 낙안군수로 갔다.
간역색리⁵⁾ : 향교의 잡무를 맡은 사람.

 

2020.2.14. 거제향교 명륜당
2020.2.14. 거제향교 명륜당 편액
2020.2.14. 거제향교 서재와 고직사
2020.2.14. 거제향교 동제와 화장실
2020.2.14. 거제향교이건기

鄕校移建記
謹按鄉校 奧甲辰移邑 創建于西亭上 五十二年乙未 移建于道論之左 七十五年庚戌 移建于鷄龍山下 七十二年壬戌 移建于此 此即西亭舊基也 由來百九十九年 掃地空間如待復始是 豈偶然也哉 前任尹暻演 特爲經營 巨創躬兼料理 力檢成造 首尾三載抑 赤有未者存餘 以不才際需 是任苦心籌略繼而緒 且以移建月日橙 與同苦別錄蹟 雖太簡秩之頗詳 噫 先賢所述在在剝落 以令視昔無階 可達事之寒心極矣 後來君子 踵此遺之使 不必間斷爲幸焉
歲在九乙丑秋七月 上澣 靈山 辛在鳳記 

향교이건기
삼가 생각하면 우리 향교는 갑진년에 읍으로 옮겨 서정리西亭里에 창건하였고, 52년 후 을미(1715)에 다시 도론동道論洞으로 옮겨 갔다가 75년 후 경술(1790)에 계룡산 밑에 옮겨 세우고, 72년후 임술(1862)에 다시 여기에 옮겨 세우니 이는 곧 서정리의 옛 터이다. 그동안 199년을 땅을 쓰고 공간을 비워 두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니 이 어찌 우연함이랴. 전임 윤경연尹暻演이 특히 경영함에 뜻을 두어 몸소 돈을 모으고, 겸하여 재료의 좋고 나쁨을 검사하고 건물을 이루는 것의 처음부터 끝까지 3년 동안 아꼈으나 아직 마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내 재주가 부족하나마 쓰일 즈음 마침 이 짐을 맡아 마음이 괴로워 이제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또 이건移建한 연월일과 함께 괴로워할 이의 사적을 적고자 한다.
선현들의 지으신 바가 곳곳마다 박락剝落 되었으니 지금으로써 옛날을 바라볼 때 어디 하나 걷잡을 것이 없으니 이 지극히 한심한 일인가? 뒤에 오는 군자로서 이 뜻을 더듬어 살피어 시름 끊이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 심하다 하겠다.
을축 가을 7월 상한上澣에 영산 신재봉辛在鳳 적다

 

거제향교 교재수건기

校齋修建記 
是歲夏 不侫恩叨茲州上官¹⁾ 越二旦而謁 聖禮也祇拜訖 仍遍觀殿廡堂舍多 有雨漬緣敗 而嵐浸廦落者 且西齋室泊典祀廳²⁾ 年久壞廢因撤而無有焉 且[此]*皆修建之不容 少緩然顧物力不逮不可輕議矣 至夫孟冬 校任玉泰焕 尹處安二君 以一助單來示曰 鄉之章³⁾有愍校廨之多圮恐 歲月之滋退各鴻門財⁴⁾ 願助以重着 其志可謂勤矣 且今穡事旣休民力稍正合 興功之以時也 吾[鄉]*侯盍於是圖之余乃歛衽 而起日盛哉 章甫之萃也 夫此之爲鄉近濱海荒服之處 而能知捐財 而取義者 有此多乎 欽推我聖朝培養之功 導率之化 於此可徵 而亦非我章甫勉慕之至 觀感之深焉 能乃余盖聞地理 有區域之辨 而人性無豊嗇之殊誠不詎也 乃申令募匠抯材木輪土石 以是月起功至十一月某日 告竣用三凡四十⁵⁾有日於是焉 廳齋改新敗落隨完左校制備矣⁶⁾ 然此乃因時而制宜者可日 其成毀有待而然也 既而二君子[者]*復致章甫之意 而請日凡樓觀亭樹式因地形之勝 而不過為一時之登 賢古人隨淑菁 而必有記姑校宮基重自逈⁷⁾尤不可無修建之文面吾候實捐 是役則必不得辭也 余[吾]*日其則⁸⁾吾何敢詚[說]*余有一說 而勗⁹⁾之太史公過齊魯之古墟 而曰¹⁰⁾觀夫子遺風想其時夫古來遠 其過厚之澤備有以見得於禮俗善壬之間矣¹¹⁾ 令則世愈下 而教洗髮駁然 其遺風亦無處復睹矣 此可以惄[恐]*然興歎 於千載之下 而得不爲(賢君子)太史公所隱乎 顧惟夫子道其大與天地同 其明與日月 其理則質鬼神而無惑矣 其法則傳萬世 而不換似若高遠難行之事 然要之皆本乎 吾[爲]*人日用彝倫之章 故夫子若日道也 者不可預更難者也 是知道未嘗遠人而只在乎 力行之如何耳 願我章甫繼自令就斯廳 而謹俎豆之禮會斯齋 而講絃誦之學 則文明之盛 遐俗之變 可以追三代 而轉鄒魯矣¹²⁾ 苛如是則今朝校舍之盈新 豈陰然而己哉 盖先生設校施教之意 其在斯歎二君請次 是語遂書而寓之時¹³⁾
丁酉陽至日(十月) 完山后人 李祖鉉¹⁴⁾
告成造¹⁵⁾
堂長¹⁶⁾ 玉泰煥 都有司 尹處安 
看役¹⁷⁾ 都有司 林基永 掌議 尹成學 元基常  
監官 河錫璇 色吏¹⁸⁾ 河志浹 

【주석】
校齋修建記의 []* : 且[此]* 吾[鄉]* 子[者]* 余[吾]* 詚[說]* 惄[恐]* 吾[爲]*의 글자는 저자 이조현 군수가 잘못 표기한 글자로 []안의 글자로 바꾸면 된다.
不侫恩叨茲州上官¹⁾ : “불녕은도자주상관不侫恩叨茲州上官” 그 당시 경상도 감목관監牧官과 거제도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무관이 되었다는 표현, 이후 경산군수 거제군수로 부임. 
泊典祀廳²⁾ : 박전사청泊典祀廳은 전사典祀에 물이 샌다는 표현으로 남도지방에서 쓴 표현.
鄉之章³⁾ : 향지장鄕之章은 향린장보鄕隣章甫 즉 '시골에 사는 선비'가 옳음.
各鴻門財⁴⁾ : 각홍문재各鴻門財, 향교에 비가 새니 잘사는 선비들이 재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뜻, ‘각홍도문제연各鴻島門財捐'으로 바꿔야 함.
三凡四十⁵⁾ : 삼범사십三凡四十, 향교 개축 3년 40일이 걸렸다. 중국 중서성의 左向를 개축하는데 凡過三凡'이라는 문장에서 인용함.
廳齋改新敗落隨完左校制備矣⁶⁾ : 청재계개신패락수완좌교제비의廳齋改新敗隨完校制備矣, '패락청재개신수좌교역신장敗落廳齋改新隨左校亦新裝'으로 바꿔야 옳은 문장임.
記姑校宮基重自逈⁷⁾ : ;기고교궁기중자형記姑校宮基重自逈;은 향교의 기본좌향基本坐向이 '남쪽으로 기울어진만큼’ 인데 교궁자자계향경校宮自越系向傾'으로 고쳐야 함. 
其則⁸⁾ : 기즉其則은 ‘오기 하이사야(記何以謝也)'로 바꿔야 문장 구성이 맞음.
勗⁹⁾ : 욱勗, 자신을 높이는 말, 격려한다는 뜻의 ‘려勵’字를 쓰는 것이 올바른 표현, 
而曰¹⁰⁾ : 옛날[昔] 태사공太史公은 본래 천문天文의 벼슬을 맡은 직책, 여기서는 2세기까지 중국에서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
禮俗善壬之間矣¹¹⁾ : '예속선풍지간禮俗善風之間'으로 고쳐야 옳음.
轉鄒魯矣¹²⁾ : 전추노의轉鄒魯矣, 공자의 고향이므로 선비의 고장이 되겠다는 뜻.
二君請次是語遂書而寓之時¹³⁾ : '옥태환玉泰煥 윤처안尹處安 손재인損財人 청수건기請修建記'로 표현했어야 했음.
李祖鉉¹⁴⁾ : 이조현李祖鉉(1853~1923)은 통정대부 거제군수로 1897년 5월 3일~1898년 7월 18일까지 역임했다. 무과에 합격해 육군부위, 훈련원 제1대대 중대장을 지낸 인물로 공주사령관에서 경산군수로 있다가 거제군수로 부임했다. 위 향교수선기를 쓴 이조현은 무인 출신이라 문장이 매끄럽지 못해 다소 아쉽다.
告成造¹⁵⁾ : ‘고성조告成造’보다는 '조성고논인造成告論人'으로 적어야 함. 
堂長¹⁶⁾ : ‘당장堂長’은 조선 시대, 서원에 딸린 하인, 여기서는 임시로 정한 책임자.
看役¹⁷⁾ : ‘간역看役’은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를 돌봄. 여기서는 향교 수건修建 때 총책임자.
色吏¹⁸⁾ : ‘색리色吏’란 조선시대 향리鄕吏의 하나. 담당 아전이라는 뜻으로, 감영監營 또는 군아郡衙 등에 있던 아전이다. 여기서는 단청丹靑을 맡았던 사람

교재수건기[향교를 수리하며 건축한 기록]
그해 여름에 나는 이 고장 상관의 은혜로 고을수령으로 있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나서 향교를 찾아서 예배를 하고 두루두루 전당殿堂을 돌아보노라니 많은 부분의 서까래와 기둥이 비에 젖어 썩어 있을 뿐 아니라 또 서재西齋의 건물과 전사청典祀廳은 물이 새며 오래된 관계로 무너져 못 쓰게 되어 철거해야할 형편이 됐다. 이것을 다시 개수改修하는데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물리적인 힘이 미치지 못해 그 역시 가볍게 논의할 일도 아니었다. 겨울이 됐다. 그런데 향교 책임자인 옥태환玉泰煥과 윤처안尹處安 두 사람이 하나의 단자單子(문서 혹은 기부 금전서류)를 가져와 보이며 말하기를, "모든 향리鄕里의 선비들이 생각하는 것은 향교의 모든 건물이 와해 되고 망가져 해가 갈수록 점점 퇴락할 것을 두려워하다가 이 단자單子로 향교를 중수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말하기를 "그 뜻이 참으로 근실勤實하고 아름답다. 또한 지금은 농사철이 아닐뿐더러 모든 민력民力이 한가로운 만큼 마땅히 공사를 기공起工할 시기일뿐더러 우리 고을의 군수郡守인들 어찌 시도試圖하지 않겠는가? "하곤 나는 다시 옷깃을 여민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풍성豊盛한 얘기다! 우리 고을의 선비들이여~ 이는 오직 우리 고장의 향교를 위하는 일로, 우리 연근해沿近海 황량한 민초民草에 이르기까지 재산을 버려 의연금 낼 줄 알아 정의正義로움을 취하는 이가 이토록 많다 말인가!" 이는 오직 우리의 선대제왕先代帝王들이 향교를 배양培養한 공력功力인 동시에 선도하여 교화敎化한 보람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일이 있음이며 또한 우리 고장 선비들의 지극한 면력勉力으로 이루어진 만큼 참으로 감동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각 지역의 지리地理와 인성人性이 원만하고 인색함을 판단하여 누구든 이 뜻에 반대하지 않는 그 성의誠意를 알고 난 다음, 드디어 영令을 내려 장인匠人을 모집한 후 목재木材를 자르고 토석土石을 실어 운반한 결과 비로소 이 달에 기공起功하여 11월 모일에 준공을 했으니 무려 3년하고도 40여일이 걸렸다. 그 결과 향교 청재(廳齋,공자의 位牌를 모신 곳)의 개축改築은 물론勿論 퇴락退落한 부분까지 모두 완비完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제의制冝를 모르는 사람들은 기다린 듯 모든 일을 성훼(成毀, 옳다 그르다는 여러 말)하기도 했다. 그 후 옥태환玉泰煥과 윤처안尹處安 두 사람이 다시 선비들의 뜻을 모아가지고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누대와 관광할 수 있는 정자亭子의 형식은 지형地形의 좋은 곳을 고르기는 하나 그 또한 한때 등현登賢에 불과한 것이며 옛사람들은 기와를 얹어도 반드시 기문記文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교궁校宮을 중건했는데 어찌 수건문修建文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후관候官도 이 공사에 보조금을 낸 만큼 반드시 사양해서는 안됩니다."하여 나는 "기문記文을 쓰겠다. 내 어이 망설이겠는가? 내 하나의 기문을 써 그 취지를 돕겠다. 옛날 태사공太史公이 제나라와 노나라의 옛 폐허廢墟를 지나며 말씀하시기를 공부자孔夫子의 유풍遺風을 보는 것 같다고 했는데 마침 그 일이 생각난다. 옛것이 점차 멀어지는 만큼 그의 지나치고 후厚한 혜택을 대대로 지켜온 예속禮俗의 선善하고 그렇지 못한 사이에 있는 법인데 지금은 세상이 점점 교화敎化가 내려앉아 거침없이 앞으로만 내 달리고 있으니 그 유풍遺風 역시 차마 볼 수가 없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문풍文風을 천년동안 이어왔음에도 지금 그 시대다운 현군자賢君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恨嘆할 수밖에 없다. 태사공太史公의 은밀隱密한 뜻은 오로지 공부자의 그 위대한 업적이 크나큰 천지天地와 더불어 동화同化하고 일월日月과 같이 그 이치理致를 함께 하는 것은 신神과 같았다해도 그에 대한 유감은 없었다. 공자님의 그 위인법爲人法이란 모두가 인간을 위한 법을 근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나의 윤리도덕법倫理道德法이란 모든 백성이 날마다 일용日用해야할 윤리倫理이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인간의 윤리도덕이란 날마다 한순간도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이런 도리道理를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멀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역행力行에 근본하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우리 고장의 장보章甫(선비)들이 계속 도움을 아끼지 않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향교를 개수改修하고 전사청典祀廳까지 마련한 후 삼가 조두지례俎豆之禮(모든 제물을 차린 후에 제향을 올린다)를 이처럼 훌륭한 재실齋室에서 현송絃誦(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한다는 것은 문명의 성대盛大함이 멀어진 민속民俗이 변하는 것일뿐 아니라 점점 삼대시대三代時代(신라 고려 조선)처럼 추노시대鄒魯時代(공자 맹자)에 근접해 가기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구태어 한마디 더한다면 지금 조정 정치하에서 향교를 새롭게 개축改築한다는 것은 그 또한 조상의 은덕이라 생각하지만 대체로 이같은 현상은 선왕先王들께서 각 지방의 학교를 시설施設했다는 그 높은 뜻을 반영했다 하겠다. 옥태환玉泰煥과 윤처안尹處安 두 사람이 이글을 청했기에 비로소 이글을 때맞춰 써 보낸다." 
정유년丁酉年 1897년 10월, 완산후인完山后人 거제군수 이조현李祖鉉.
고성조告成造 [조성고논인造成告論人, 고성고인告成告人] : 
당장堂長 옥태환玉泰煥, 도유사都有司 윤처안尹處安. 
간역看役 도유사都有司 임기영林基永, 장의掌議 윤성학尹成學 원기상元基常, 감관監官 하석선河錫璇, 색리色吏 하지협河志浹.   

 

거제향교중수기

鄕校重修記
盖論 國有學鄕有校三代之所 由設萬世之所共有也 玆鄉於地爲僻於海爲濱然菁義之聖化洋溢乎 一天之下平林之禮 羅恢容於四奧之內使 其一鄉之士恕之 於仁壽之域導之 於忠孝之門者 莫非師聖景賢之所關也 本邑聖殿會在於城之內道論洞之中矣 奧在庚戌士論齊一移建于府之西鷄龍山之下者思不過三十餘歲 而地形最陷基兆不 靈氣薰蒸於壁之間 產霧沾濕於棟宇之上 莫重油宇處有顚匐之惠 故一邑章甫不諜 同情復有移建之議 於諫議臺舊基而木石成具財用己 辯故呈邑呈營幾至 循同之境矣 噫士林無祚公議不齊末乃便宜之道付之 於重修之計 與其  坐視顏覆不若因舊貫善之 故三年經始之謀意歸 於一夕不獲已之策 因朽而添材隨毁 而輔輯因爲奉安 於崇亭之地 斯豈非我賢侯佑文之治 而亦豈非吾黨慕聖之誠哉 匠石告功其舊如新 鳴乎 殿宇肅清丹娃煥然文物從 此復照耀睹 然而已具之木石無用 既聚之財力空費 斯是爲有志未就之歎矣 後之君子 與我同志能建能修 則仁山不頹學海不渴於千萬年 庶斯校之不矣
崇禎紀元後癸未孟冬下澣 宜寧 玉汝學 謹識 

향교중수기
대개 나라에 배움이 있고, 고을에 학교가 있음은 삼대의 베푸는 바요, 만세에 함께 하는 것이다. 이 고을은 땅으로 치우치고 바다로 끝이다. 그러나 휘늘어진 성화聖化는 천하에 넘치고 우거진 예라禮羅는 오내奧內에 퍼졌으니 이 고을 선비로 하여금 인수仁壽의 구역으로 따르게 하고, 충효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이 성聖을 섬기고 현賢을 우러르는 바 아닐 수 없다. 이 고을의 성전이 본래 성내의 도논동에 있었으나 지난 경술년에 사론士論이 일치되어 부의 서쪽 계룡산 밑에 옮겨 세운지 이제 겨우 30년을 지나지 못했건만 지형이 흠인가? 터가 불길한가?
후덥지근한 령기靈氣가 창벽窓壁사이에서 뿜어 나오고, 자욱한 안개가 생겨서 동우棟宇 위에 배어들어 소중한 이 글방이 곧 무너질 사정에 이르렀다. 한 고을 선비들이 꾀하지 않고, 뜻이 같아서 간의대諫議臺 옛터에 옮겨 세율 의논이 다시 일어나 목석이 모두 갖추어지고 재물이 또한 변통이 되어 읍에 정하고, 영에 정하고, 의논이 거의 다 돌게 되었더니 슬프도다 사림이 복이 없었던가?
공의公議 또한 한결같지 않아 마침내 편리한 길을 취한다는 것이 증수한다는 계획에 붙여 넘어지는 것을 앉아서 보기 보다는 차라리 옛것을 수리하자 하였다. 이리하여 3년 동안의 세운 계획이 하루 아침의 미봉책에 돌아가고 말았다. 썩은 곳에는 새 재목을 갈아넣고 무너진 곳은 가시 손을 보아 이내 숭형崇亨의 땅에 봉안토록 하였다. 이 어찌 우리 현인들의 우문佑文의 다스림이 아니며 또한 우리 무리들의 모성慕聖의 정성이 아니겠는가.
돌이 이미 역사를 마치니 옛것이 어이 저렇듯 새로운가? 전우殿宇 한번 씻은 듯 말쑥해지고 단청이 또한 햇빛에 아롱지니 빛나는 문물을 예서 다시 보겠구려! 그러나 이미 준비한 목석이 쓸데없고 이미 거둔 재력이 없으니 이 또한 뜻을 두고 이루지 못한 탄식됨에 족하였다. 이 뒤에 오는 군자 나와 함께 뜻이 같아서 다시 세우고 다시 손보면 인산仁山이 멸하지 않고 학해學海가 말랴지랴. 천만년 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에서 학교의 불휴를 바라는 것이다. 
한겨울 그믐께 의령 옥여학 삼가 기록하다.

 

2020.2.14.거제향교중건기

鄉校重修記
盖惟學校之設 有自來矣 風化之源 教育之方 必由乎 是則校可 以與邑終始 道可以與天地俱弊 而爲民根本也 明矣 噫 壬辰兵雍之前 既無文字之可 徵基祥不可得而聞矣 奧在甲辰移校于鷄龍山之麓 西亭上詩于時 辛公汝楫餘高祖也 實主其事 而董其役後 五十二年乙未更移于 府治東負坎之地 即今道論洞之右 當時主事 玉公武獻 尹公萬翰 辛公萬亨 克亮橙 服其勞經營之其 成就之功 制作之規 亦云艱哉 鳴呼風之所 觸棟梁傾蠣雨之所 侵亦白漫還 其中大成殿 及東西兩廉尤 有肱肱 爲朝夕難保之患 故齊論一張詢謀僉同 鳩財募力 各隨其宜乃 於庚寅十月經 起重建之役 以厥明年 辛卯二月 告成階級之等 雖不是以盡 其禮門墙之容亦 可謂之苟完矣 然而事巨力微念不 及暇大役已了 溫未有記沒埋 視膽識者 興歎於於是任 都有司尹龜瑞 掌議潘觀洙等 蔬板而語餘日校也 非一人之私關係甚重 且既有先人之美 蹟盖記其年月日 以盖後敬中 雖不寇亦嘗 不能無意 於斯追前烈 惑今請遂忘 其疎陋而略怜顯末云
歲己亥至月上澣 驚城後學 辛敬中識
                                         尹炳五 謹書

향교중수기
오직 학교의 시설은 옛날부터 있어 오는 것이다. 풍화의 근본과 교육의 방책이 모두 이것에 말미암아 학교는 읍과 더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도道는 천지로 더불어 편하게 하는 것으로 만백성의 근본 됨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진壬辰 병선兵燹의 이전은 이미 밝힐 만한 문자가 없는지라 그 자세한 것은 들을 길이 아득하다. 그러나 지난 갑진년(1663)에 향교를 계룡산기슭 서정 상시上詩에 옮겼으니 그때의 신여즙辛汝楫은 곧 나의 신경중辛敬中 고조였다.
그 일을 맡아 몸소 감독하였고, 그 뒤 52년 을미에 다시 거제부의 동쪽에 학교를 옮겼으니 지금의 도론동道論洞의 오른쪽이었다. 그때의 주사로서 옥무헌玉武獻과 윤만한尹萬翰과 신만형辛萬亭, 극량克亮이 함께 그 수고를 맡아 경영하였으니 그 성취의 공과 제작의 규모에 또한 어려움이 있었다 하겠다.
바람이 부닥치니 기둥과 들보가 넘어지고, 빗발이 침로하여 단청丹靑이 흐렸다. 그 가운데 대성전大成殿과 동서양무東西兩廡는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여론이 한번 일 때 계획이 같아서 재산을 거두고 힘을 모으니 각각 자기의 분수를 따라 하였다. 이에 경인 10월 중건의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신묘 2월에 준공을 보았다.
비록 계급의 차례에는 그 예를 다하지 못했으나 문과 담장의 모습은 완전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은 거창하고, 힘은 모자라 생각을 미쳐 못한 것이 있었으나 이처럼 큰 역사를 이미 마치고도 아직 아무런 기록이 없어 뭇사람의 눈길을 묻어 버렸으니 식자들의 섭섭해 함이 여기에 있었다.
이때 책임을 가진 도유사都有司 윤구서尹龜瑞와 장의掌議 반관수潘觀洙 등이 판자를 가지고 와서 내게 이르기를 ‘향교는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관계가 깊은 것이고, 선인들의 아름다운 자취가 있으니 어찌 그 연월일을 적어 뒷사람에게 밝히지 않으랴’ 하였다. 신경중辛敬中이 비록 외람된 줄 아나 일찍부터 여기에 뜻이 없을 수 없었고, 선인들의 생각이 자못 하더니 이에 청하는 바를 따라 나의 소루疎陋를 잊고, 대강 그 전말을 적은 것이다.
기해己亥 동짓달[至月] 상한上澣 취성후학驚城後學 신경중辛敬中이 짓고,
                                                                                 윤병오尹炳五 삼가 쓰다.

 

2020.2.14. 거제향교 내삼문과 협문
2020.2.14.거제향교 대성전
대성전 편액
2020.2.14. 거제향교 대성전 내부
2020.2.14.거제향교 동무
2020.2.14.거제향교 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