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고성향교 명륜당 영역 상량문과 기문

천부인권 2020. 8. 9. 07:07

2019.12.9. 고성향교 명륜당 明倫堂

 

固城鄕校重修記
國有學鄕有校 卽斯道尙賴聖哲之敎 未嘗息也 本鄕校一邑之敎宮也 修之學明之學 雉六藝盖自宗周之敎典也 而以學者講修化成備才德 修身齊家治平之資 以開萬世太平之本野 其爲經學之可不盛大乎 故先斯訓世道 蔑貞斯學不振 殿宇傾頹漏庭荒蕪 吾道之慨 斯文痛何可堪勝哉 往年崔典校漢斗時任 校宮憂動惕屬於斯 而分修葺 則未免姑息之計 鄕中衆論必當 全面改修施工 樹百年大策可也 從其議具 其工事計劃書類 請願於政府當局者 凡數十次終及獲得 文化財管理費數億金 以圖域門要衆修者 殿廡堂樓等 凡十一棟八十八餘架也 數年施工制度 切緻工役精密 碧瓦參着 宮殿一新 吾鄕校宮之修至 此完美斯道復明 儒道中興之基 實由崔典校尊衛之至誠也 鄕人士因以請記 其事於余 惟馨洛亦以鄕人所 當稱美者 樂爲書之 此以歸之其功
孔子誕二五四三年 壬申晩秋節
    全州 崔馨洛 記
時任郡守 河一淸
    掌議 朴敬五

고성향교중수기
국가에 대학이 있음은 곧 도덕이 성철聖哲의 교훈에 의존하여 쉬지 않음이며 향교鄕校는 일읍의 교궁敎宮으로 학문을 강수講修하며 육예六藝를 행함이니 종주宗周의 교전敎典을 의함이요. 학자로써 화성化成과 재덕才德과 수신제가치평修身齊家治平의 도를 강수講修하여 만세태평萬世太平의 근본을 시작함이니 그 경학經學의 성대함이 아니리요. 그러므로 선왕이 예악禮樂으로 생폐牲幣로써 춘추에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에 석전釋典하여 후생後生의 정성을 다함이니 비록 오경五經이 구원久遠하고 성의聖意를 난명難明하나 명륜당에서 성훈을 강론함이니 세도世道가 멸정蔑貞하여 사학斯學이 부진不振하고 전당이 기울어 무너지고 비가 새며 정원은 황무지가 되었다. 우리의 도道는 개탄스러워지고 유학자가 몹시 애석해짐을 어찌 능히 견디며 이길 수 있겠는가. 예전에 최한두崔漢斗 전교의 임기 때에 학교 건물이 흔들리는 이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해 모두가 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하기로 했다. 당장은 하지 못해도 계획을 세워려고 향원鄕員들의 중론을 모으니 마땅히 전면적으로 고쳐서 시공해야 한다고 하며 백년대책을 수립함이 맞다고 했다. 
하여 그 의론議論을 순종하며 그 공사 계획 서류를 구비具備하여 정부 당국에 청원함이 수십 차례이다. 최종으로 문화재 관리비 수 억원을 획득하여 성문과 중수를 요하는 전무당루殿廡堂樓의 11동과 80여가 이다. 수년의 시공에 제도가 체치切緻하고 공역이 정밀하며 벽과 기와 등이 나란히 붙어 학교 건물이 새롭게 되니 우리 향교의 관청 수리가 이에 완전히 아름답고 유교의 도덕이 다시 회복되어 밝아졌으니 유도중흥儒道中興의 기초되는 근본이 실로 최전교崔典校의 높은 위상이 정성스러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향중鄕中의 선비들이 그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하였고 또 형락馨洛이 고을의 사람으로 그 아름다운 행적을 칭하여 그 공功을 쓰노라.
공자 탄신 2543년 임산壬申(1992)년 늦은 가을날
    전주 최형락崔馨洛 짓다.
시임군수 하일청河一淸
    장의 박경오朴敬五

 

 

鐵城鄕校移建重修錄
萬曆三十五年丁未 鐵城鄕校 爲壬變耶燼 而臥龍李顯 重建數十年來重修 凡八次歷列管掌詣 賢名位揭版於校堂 而歲久殘缺難 爲參攷故今因敎堂修理 議結鄕中多士 改新舊版而揭之以示吾鄕 故事於來後云 臥龍李顯后孫相國謹誌
行 縣令    鄭如麟
  都監臥龍 李顯
  雍正四年丙午移建
行 縣令   李尙純
  都監前僉使 李彭年
  乾隆二年丁巳重修 -이하 생략-

철성향교이건중수록
만력 35년 정미丁未(1607)년에 철성향교鐵城鄕校는 임난을 당하여 향교가 불타버렸는데 그 후 와룡臥龍 이현李顯이 다시 중건하고 수십년 지나는 동안 무려 8차에 걸쳐 수리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교당에 각종 기문을 게시하였으나 오랜 세월동안 각종 게시판 현판이 마모되어 알아 볼 수 없게 되어 이제 교궁을 새로 수리키로 고을 사람의 결정으로 완료하고 옛 기문을 새로 제작 게시하여 우리 고을 교궁의 역사를 후생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와룡공 이현의 후손 상국相國이 삼가이 원문 그대로 새로 게판揭版 한다.
행 현령 정여린
   도감와룡 이현
   병오(1726)년 이건
행 현령   이상순
   도감전첨사 이팽연
   정사(1737)년 중수 –이하 생략-

 

 

明倫堂上樑文
玉斗運於北辰方 仰聖轍之復返 營室垂於南土聿覩 校堂之重新 仍舊何如經始勿亟窃 惟伽倻古城素稱 鄒魯遺風 山鍾神水 釀精並起 忠義之將士 嚮遺民知法 間出文學之賢 盖諸縣改校之方乃先王 明倫之本 稽虞治於米廩司徒 掌五敎之敷 按周制於庠門 鄕人齒六豆之供 入則孝出則悌必 先修人道之常綱幼而學長 而行莫不由天叙之古典 頃綠邑府遷於柳栶 遂致黌舍 移於竹林三年 未嘗淹必 有吾夫子之浩 歎百里不遠 復實賴賢 太守之嘉 謀伊敎學 爲國家所 先肆祝冊 自京師而至襟紳 燕會之席 揆三人而幹功 俎豆陳列之庭 推一士而相禮 堪興倫 山水之法 鶴舞東亭 尺杲呈陰陽之圖龜 伏南澗奠 舊址而從衆議卜吉辰 而告神明任舟楫 而篙工輪材勤鼓咎 而村丁趨從聖廟 淸肅之像魏乎 若鳳峙龍路 兩廡輪煥之容 冀然如翬 飛鳥暈 凡五常之道 非朮於外必 講學以明 故一堂之制 復遠千里 亦觀聽所 聳架上棟下宇 而壯是謂 遷善之階 挮挾東庠 兩序而宏 可見入德之門 戶置而房 而齋宿奚 但祭禮宜修開奧室 而招廷特 爲彛倫攸叙椽栶追 三代之制 戶牖闢六禮之科子弟 敎訓之方無 無愧于屋漏 賓主敬獻酬之禮 豈有歡於庭隅 設席待儒 尙兼環堵 一畝庇雨養士 亦分廣廈千間 靑邱入城 古文之華 堂顔增采 紫陽千載 揭名之筆 楣額重光 絶響久空 龍門之琴 頹址己 古鹿洞之院 嗟余生於後代 若自違於師門 誦詩書而費工徒踐 翰墨之境仰 宮墻而發 嘆未窺禮樂之原 玆以矩章之歌 敢助修樑之擧
抛樑東 萬古斯文 日欲中磅磚 巨流靑未丁 瞻如魯縣鎭龜象 
抛樑南 岩間古佛 隱蒼嵐異端 開處明吾道 儒化彬彬海徼冀
抛樑西 智水仁山 境不迷欲泛 小舟歌九曲 眞源更在武夷溪
抛樑北 鳳林何日 鳳鳴德願同 弟子詠風歸 千仞翩翩點意得
抛樑上 錯落星辰 著萬象地理 亦曆奎彩灑 重回文運此鄕黨
抛樑下 大杗小稧 交成厦師文 從古群材盡 在杏檀時時雨化 
伏願上樑之後 人興善俗士生異材 考通藝書賢能周鄕尙 文敎之政 擧孝廉求 忠信漢郡無 武斷之風 時習學問之工 磨玷刮垢月更 人物之論 激濁揚淸 登明堂兮勉爾來者
崇禎紀元後五 丙子正月下澣 後學 李秉曦 撰
                               李秉歡 書

고성향교상량문
옥배玉盃가 북두칠성의 방향으로 운運을 회복하여 성인의 행적으로 되돌아와 우러러보니 영실營室¹⁾을 남쪽 땅에서 드디어 보게 되었도다. 오직 명륜당이 거듭 새로이 됨을 목격하니 옛 모습으로 인하여 경영經營함을 급하게 하지 말 것이다. 생각하니 가야의 고토는 본래 추로鄒魯²⁾로 예부터 이어져 온 풍습이라 칭한다. 산이 신령을 모으고 물이 정기를 빚었으니, 나란히 충의忠義의 장사將士가 일어나리라. 예전에는 백성의 법도를 남겼고 근간에는 문학의 현인賢人이 나왔으니, 여러 고을이 향교를 수리하는 방법은 바로 선왕先王들이 윤리를 밝히는 근본이다.
우虞나라가 미름米廩³⁾에 치정治政함을 세밀히 살펴보니 이 무리가 오륜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함을 관장하고 주周나라 제도를 조사하여 보니 고을 사람이 6개의 제기에 음식을 바치고 줄을 지어 출입함에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 있어 반드시 사람의 도리를 항상 다하고 먼저 수행을 한다. 남자아이가 공부하여 성장하면 –이하 번역 옮김-
수행함이 天述의 古典에 由因되지 않음이 없다. 잠시에 邑府가 柳梱에 移徒하여 書齋를 竹林에 移建한지 삼년이니 夫子의 浩歎이 있음을 泯沒치 못함이라 백리가 不遠하여 다시 賢明한 태수의 嘉謨를 依賴하고 敎學은 국가의 先陳이요 祝冊은 京師로부터 下賜하였으니 紳士가 燕會의 좌석에 三獻官의 幹功을 法度로 하며 俎豆를 陳列하는 廟庭에 一士를 推尊하여 예를 보존한다. 天地가 山水의 법을 序列하니 鶴이 東亭에 喜悅하고 尺臬이 음양의 圖를 揭示하며 龜가 南澗에 隱伏하니 舊址를 정하여 衆議를 順從하고 吉辰을 擇하여 神明에 고하며 舟揖을 따라 船竿을 連轉하고 輪材를 製作하며 鼓聲이 振動하니 壯丁이 趨從하며 聖廟의 淸肅한 形像은 巍然하게 鳳峙와 龍路같고 兩廡가 輪煥한 客貌는 翼然이 飛鳥의 眩暈함과 같다. 대략 五倫의 道는 外皮에 求함이 아니라 반드시 講學하여 明通함으로 一堂의 制度를 또한 다시 觀聽함은 高大하다. 架上과 棟下가 대단하고 장하니 이것을 遷善하는 階級이라 칭한다. 挮挾한 東庠에 兩序가 광대하니 가히 입덕하는 문호에 齋宿함을 볼것이니 어찌 다만 祭禮만 修行하리요. 奧室을 통하여 招延함이 특별이 彛倫의 敍述이다. 梱椽은 삼대의 제도를 追想하며 戶牖은 六藝의 科程을 설립하니 子弟들은 교훈의 방법을 習得하여 屋漏함에 慚愧함이 없지 않다. 賓主가 獻酬의 예를 공경하니 어찌 庭隅에서 喜歡하리요 設席하여 儒生을 待遇함에 겸하여 一畝를 環堵하고 풍우를 遮庇하여 사림을 양성함에 또한 廣廈의 千間을 分裂한다. 조선의 팔도에 古文의 華麗함이니 堂面의 增采는 주자의 千載의 名筆이니 楣額이 거듭 빛난다. 聲響이 絶無하며 龍門의 琴聲이 頹址되고 백록동의 書院이 이미 古靑이다. 슬프다 나 후대에 出生하여 師門에 違背하고 詩書를 誦讀함에 工만 虛費하고 다만 翰墨의 地境에 임하여 宮墻을 仰視하고 發嘆하며 禮樂의 原因을 窺察치 못하고 이에 矩章의 歌聲으로 감히 修樑의 擧上을 救助하노니 
들보를 동으로 하니 萬古에 學文이 充滿코자 하는데 磅磚한 巨流山이 査蒼하여 瞻卬함에 魯縣의 鎭龜와 같다. 
들보를 남으로 하니 岩間의 古佛이 蒼嵐에 隱居하니 異端이 盛한 곳에 吾道가 明發하며 儒化가 彬彬하여 海徼가 크다.
들보를 서로 하니 智理의 水山와 仁皇山이 멀지 않다. 小舟에 浮泛하여 九曲을 詠歌하니 그 眞源이 다시 武夷溪에 있다.
들보를 북으로 하니 鳳林에 어느날 鳳이 德을 울리고 원하건대 弟子와 詠風하고 돌아오니 千仞이 翩翩한데 曾點의 뜻 얻었다.
들보를 위로 하니 錯落한 星辰은 萬象을 著明하고 地理는 또한 가까우며 奎星의 彩色이이 灑落하니 文運이 이 鄕黨에 重回하리라.
들보를 아래로 하니 大杗과 小稧가 交錯하여 大夏를 이루니 師門은 자고로 群材를 다함이며 杏壇에 있을 때 時雨가 化하리라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후에 人間은 善俗을 興起하고 士林은 異材를 육성하여 藝書를 考通하며 賢人이 周鄕하고 文敎의 정치를 崇尙하여 孝廉을 對擧하고 忠信을 求하라. 漢郡은 武斷의 風俗이 없으니 學問의 공부를 時習하며 磨玷하고 刮垢하여 每月에 人物의 論評을 다시 하고 激濁과 揚淸이 明倫堂에 올랐네 來裔를 勖勉케 하노라
병자丙子(1876)음력 1월 하한 후학 이병희李秉曦 짓고
                                            이병환李秉歡 쓰다.

【주석】
영실營室¹⁾ : 궁전宮殿을 이르는 말
추로鄒魯²⁾ : 공자와 맹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미름米廩³⁾ : 중국 하夏나라 때의 학교學校 이름

 

 

明倫堂建修記實
上之三年秋 太守柳公諱光命 與余及同任盧公思國 許君佾因 聖廟之役重修明倫堂 堂之貌煥然復明矣 凡吾鄕之章甫 孰不升此堂 而顧名思義知 趨向之方 而爲永世矜式耶 噫今當鷰賀之日 俯仰今古 則有若吾祖先臥龍公 卽於萬歷丁未重刱聖廟 及此堂於兵火之後 可想其板蕩之時 黽勉衛翼之力多矣 及去雍正丙午之移建 則再從祖護軍公也 乾隆丁巳 辛酉甲子乙丑之改修 則季從祖與崔公珪 崔公晟 從事於斯建修之工 各得時宜至 若戊寅建于舊地也 余之家君 宗祖翰興甫 及上齋崔公 際會幷心同事焉耳 第恨此堂之存也 過去刱修之蹟終至 於落莫而無傳者不但 前後之失 亦非來世之觀 感勸勵之道也 故余忘其拙陋 略叙首末爰揭于壁
乾隆四十四年 黃猪陽月 日
堂末 李光昊 識
儒生 姜大觀 書
都有司兼重修都監 盧思國
  掌議兼重修都監 李光昊
前掌議兼燔瓦都監 許  佾
齋有司兼重修有司 金致玉
齋有司兼重修有司 朴鳳文
        重修色吏 金斗甲
          都片手 金正三

명륜당건수기실
금상 3년 가을에 태수 유광명柳光命공이 나와 같은 교임校任 노사국盧思國공, 허일許佾군과 함께 성묘聖廟 공사로 명륜당을 중수하여 명륜당의 모습이 환하게 다시 밝게 되었다. 무릇 우리 고을의 장보章甫로서 누구든지 이 명륜당에 올라와 그 이름을 둘러보고 뜻을 생각하여 나아갈 방향을 알고 영원히 모범으로 삼지 않으랴.
아아! 이제 잔치하는 날을 맞아 고금의 일을 회고하건대 나의 선조 와룡臥龍공 같은 분이 정미(1607)년에 성묘와 이 명륜당을 병화가 끝난 뒤에 중건하셨으니 상상컨대 혼란했던 시기에 부지런히 수호한 공적이 많았다. 지난 병오(1726)년의 이건 할 때는 재종조再從祖와 호군護軍공이 하셨고 건륭乾隆 정사, 신유, 갑자, 을축년의 개수는 계종조季從祖와 최규崔珪공 최성崔晟공이 종사하였으니 중건 중수의 공사가 각기 시의時宜에 맞았다.
무인戊寅년에 옛 터전에 중건할 때 이르러서는 나의 가군家君과 종조 한흥翰興씨 및 상재上齋의 최제회崔際會공 등이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일하였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이 명륜당을 남게한 과거의 창건 중수의 사적이 없어지게 되어 전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앞뒤 사람들의 실책일뿐 아니라 또한 뒷날 보고 감동하여 권장하는 도리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에 졸열함을 무릅쓰고 그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여 벽에 걸어 놓는다.
건륭44 기해(1779)년 음력 10월 일 
당말 이광호李光昊 짓고
유생 강대관姜大觀 쓰다.
도유사 겸 중수도감 노사국盧思國
  장의 겸 중수도감 이광호李光昊
전장의 겸 번와도감 허일許佾
재유사 겸 중수유사 김치옥金致玉
재유사 겸 중수유사 박봉문朴鳳文
        중수색리 김두갑金斗甲
          도편수 김정삼金正三

 


嘉慶二十二年丁丑云云
嘉慶二十二年丁丑 余以明倫堂修理之任 仰見上樑 則甲子八月 甲子家君重修 此堂而歸感 吟一律以紙面付于上樑 有曰連世吾家事業 存萬人知有一辭論 朝庭十代 聞名祖鄕黨 千年著姓孫 向國增扶宗社重升堂 今慕聖賢專 後之君千宜 如此白首靑衿更入門 不勝追感之意 刻板而揭于 樑以壽其傳爾
丁丑三月 不肖子 李基弈 書

가경이십이년정축운운
가경嘉慶22년 정축丁丑(1817)년에 내가 명륜당 수리 책임을 맡고 들보 위를 올려보니 갑자년 8월 갑자에 가군家君께서 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돌아가시며 율시 한 수를 읊어 종이를 들보 위에 써 붙였는데 거기에 대를 이은 우리 집안 사업이 있나니 만인이 같은 말로 논하는지 알지로다. 
조정에 10대 동안 이름난 조상이요. 향당에 천년토록 저명한 자손들, 나라 위해 일찍이 종사 붙들어 중용되었고 당에 오른 오늘이야 성현 존귀함을 추모한다.
뒷날 군자들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하리니 흰머리 푸른 옷깃으로 다시 문을 들어선다고 하였다.
추모하는 마음 이길 수 없어서 판에 새겨 들보에 걸고 오래 전하고자 한다.
정축(1817)년 3월 불초자 이기혁李基弈 씀

 


重修錄
太歲戊申 卽上之十五年也 以明倫堂改覆 風化樓重修 事烙材辨瓦 自春二月施役至 夏五月告功 而公需廳亦同時改建焉
行縣令   趙文顯
重修都監 許東櫓
         李基複 識
有司     金東洵
都有司   李秉孝
掌議     許致植
         崔必忠
有司     田震寬
         金琦淳
色吏     金國根
木手     金聖玉
紀元後四 戊申五月 日

중수록
그해 무신戊申(1848)년은 곧 금상 5년이다. 명륜당을 고쳐이고 풍화루를 중수하기 위해 재목을 말리고 기와를 구하여 봄 2월에 공역을 시작하여 여름 5월에 일을 마쳤는데 공수청公需廳도 동시에 고쳐 지었다.
행 현령   조문현趙文顯
중수도감 허동로
         이기복 지
유사     김동순
도유사   이병효
장의     허치식
         최필충
유사     전진관
         김기순
색리     김국근
목수     김성옥
기원후사 무신(1848) 5월 일

출처 및 참조

고성향교지-고성향교지편찬위원회/대보사(200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