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향교南海鄕校는 남해읍 북변리 586에 위치하며 해발 42m이고, 좌표는 34°50'35"N 127°53'34"E를 가리킨다. 망운로10번길에 위치하는 남해향교 앞에는 차량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외삼문 앞에 홍살문이 서있다.
남해향교는 경남유형문화재 제222호로 등록되어 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는 국가교육 기관으로 유생들의 학문과 함께 공자와 4성 및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배향하는 제례공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세종 32년(1450)에 세워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홍살문 외삼문 동재 서재 명륜당 관리사와 동무 서무 대성전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있다. 남해향교는 처음에 봉강산 아래에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 소실 된 것을 현종 10년(1669)에 대성전을 건축하고, 숙종 4년(1678)에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고종 29년(1892)에 대성전을 현령縣令 박래경朴來柳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약간 동東으로 백보百步쯤 되는 지금의 곳에 옮겼고 이후 불편함이 있어 1917년 명륜당과 나머지 건물도 옮겼다. 서재西齋가 있는 쪽 담장에 돌단을 쌓고 성생단省牲壇을 마련했는데 단을 쌓은 점이 다른 향교에 비해 특이하다.
외삼문의 우측 아래 계단 옆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긴 비가 있다.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라!’고하는 뜻이다. 비의 뒷면에는 『향교鄕校를 유구悠久한 세월 지극정성으로 관리보호하였으나 누차累次 이건移建과 재난으로 불경不敬 대성전의 필수必須인 하마비下馬碑의 분실로 만시晩時하나 금今 수석장의首席掌議와 원노회元老會의 의결의 내력을 전교는 약기約記 추진위원推進委員의 성금誠金으로 복원復元하다』 적었다. 그리고 추진위원장 전교 이동선으로부터 전전교 5인과 부위원장 유도회장 하재경을 비롯해 위원으로 6부장의六部掌議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처럼 금석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삼가야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南海鄕校 重修沿革記
吾郡之有 夫子廟自康熙 以來凡四遷而重修 其事蹟之概 據先進諸公之櫔 文得知其時知縣 爲某公任事爲某公而已至 於措畫之出某樣 則俱未得其詳者 實由古之君子尚簡 而略史只可功成 於當日而於記事傳後 則不必爲急故也 然在後生取徵之地 獨非有感乎 禧不佞今 以最近之沿革記 廟學旧在今 大成殿西百步許 韓高宗壬辰縣令朴來卿氏謀移建 於今現在地時鄉儒金公基瑛氏 鄭公贊奎氏 總其事 大成殿僅得告功 而適値歲歉遂中止 明倫堂及齋庖之屬 留在舊址 以故每當春秋將事之時 進退趨蹌常患窘跲 後二十六年丁巳成侯斗植氏來莅是郡時 鄉儒柳公正熺 爲築瓦棟四間于 大成殿之下 以爲臨時祭官會集之所 自是十數年來因 循墜 大成殿未免滲漏 東西餘舍將見滿庭草色 今郡守朴侯海柱氏莅 政三年壬申之秋 不佞直黌舍謀與之賛畫經紀始事于癸酉三月至七月二十九日丁亥 凡五閱月而告功鄉人亡金泳斗 鄭在敏 鄭在周 李台柱董其役 大成殿存柱桁 而易瓦桷神門 及東西庫改作之明倫堂 則擧旧址留在者 而移建之東齋 則以柳公所築瓦棟四間 者來築之凡基地緣垣 内外全部恢拓 而得爽豁 其用費略四千有餘圓 概擧其自出郡之各面設 期成會得金貳千圓 原有慕聖契 儒林會 得金二百二十圓 又於八面矯風會得金一千貳百五十圓 以至學農船組得奉獻金九十圓 儒林篤志諸家 及校任金敏珠 河成羲 李彙洙 河龍宅 鄭丙柱 韓相殷 柳鳳淑 裴昌澤諸君 特捐金六百餘園也 及校任諸君之滿期辞退 則後任者鄭職祚 李馨模 鄭儀祚 李時鳳 河熺燮 高銃錫繼捐金三百餘圓 井泉之窄 近堂階者 移穿門南百步 外校隸未 有舍得民家買入之正三門 則以鄉校費五百圓作之郡屬 金相汶調畫焉 其審面勢者柳在倫 鄭采安 始終之於是廟學之制庶幾煥然一新矣 噫當吾道晦塞之時 而能竣此大事 以繼成先進數君子未畢之志 於四十年之後 夫事之有待功之難 成不其然乎 是皆右記諸公 及郡民大小 終始賢勞一心慕聖之效也 圖所以傳示來後 以爲嗣修之勸 宜有此揭刻矣 不佞雖欲無一言庸可已乎
聖誕 二千四百 八十七年 丙子仲冬下澣
晋場 鄭奉禧 謹記
남해향교 중수연혁기
우리 고을에 있는 공부자孔夫子의 사당祠堂은 강희시대康熙時代부터 무릇 네번씩이나 옮기고 중건重修하니 그 개략槪略은 선배先輩 여러 어른께서 대들보 글에 남겨두신 것에 근거하여 그때를 알게 되고 그때의 고을 원님이신 아무개와 향교鄕校 임원任員이신 아무개에 의依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을 뿐이요 계획計劃과 조치措置와 진행進行의 어떠한 방식方式도 모두 그 소상함을 알지 못함에 이르게 된 것은 실로 옛 군자君子들은 오히려 사실事實의 들어내기를 간략簡略하게 하여 단지 겨우 공功을 이룬 그날뿐이고 그리하여 또 그 사실을 기록記錄으로 후일後日에 전傳함은 그리 급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음에 연유함이로다. 그러나 후배後輩들이 그 징험과 증거를 얻고자 함에 있어서는 어찌 유감이 있지 않으랴 재주 없는 봉희奉禧가 이제 최근最近의 연혁沿革을 기록記錄하건대 문묘文廟와 향교鄕校가 옛적에는 지금의 대성전大成殿 서西쪽 백보百步쯤에 있었더러니 대한국大韓國 고종高宗 임진壬辰(1892)년에 현령縣令 박래경씨朴來卿氏가 현재現在의 위치位置에 이건移建할 것을 계획計劃할 때의 우리 고을 선비 김공기영씨金公基英氏와 정공찬규씨鄭公賛奎氏가 그 일을 도맡아서 대성전大成殿은 근근僅僅히 준공竣工하였으나 때마침 흉년凶年이 들어 드디어 그 공사工事를 중지中止하니 명륜당明倫堂과 여러 재서齋庶와 포방등庖房等 부속건물附屬建物은 옛 터에 그대로 남겨두게 되었기 때문에 매년每年 춘추향사春秋享祀 시時에는 그 거동舉動함과 완급緩急에 상응相應하여 조신操身함에 있어 그 궁색함이 우환憂患이러니 26년후 정사丁巳(1917)년에 성군수成郡守 두식씨斗植氏가 본군本郡에 도임到任할새 그 때 우리 고을 선비류정희씨柳正熺氏가 대성전大成殿 아래에 4간의 기와집을 지어 임시臨時 제관집회소祭官集會所로 하였고 이로부터 십수년十數年 옛 그대로 우물쭈물 지나는 동안 황폐荒廢하고 무너져서 대성전大成殿도 물이 새게 되고 동서東西의 여러 사옥舍屋도 장차 잡초雜草가 가득할 지경이러니 지금의 군수郡守 박해주씨朴海柱氏가 군정郡政에 오른지 3년이 되는 임신壬申(1932)년 가을에 미련한 내가 직원直員이 되어 여러 사람들과 이 더불어 도우고 꾀하여 향교鄕校를 잘 다스리도록 계획計劃하였고 계유癸酉(1933)년 3월에 일을 시작하여 7월 29일 정해丁亥에 무릇 오개월五個月이 지난 후後 쥰공竣工하였는데 이 고을 인사人士 김영두공金泳斗公 정재민공鄭在敏公 정재주공鄭在周公 이태주공李台柱公이 그 역사役事를 감독監督하였고 대성전成殿은 기둥을 그대로 두고 서까래와 기와는 바꾸고 신문神門과 동서고東西庫는 개축改築하였다. 구지舊址에 있던 것을 이건移建하고 동재東齋는 유공柳公이 축조築造한 바 있는 와가瓦家 사간四間으로 하여 옮겨지었고 기지基地를 둘러싼 원장垣墻 안팎을 전부全部 넓혀 열어 정리整理하니 넓고 시원스러움을 얻었도다. 그 공사비용工事費用은 약사천여원約四千餘圓으로 거개擧概가 스스로 낸 것인데 남해군의 각면설립기성회各面設立期成會에서 이천원貳千圓을 얻고 원래原來 있어온 모성계慕聖契와 유림회儒林會에서 이백이십원二百二十圓 또 팔면교풍회八面矯風會에서 일천이백오십원一千貳百五十圓을 얻었으며 학교學校와 글방 농선조합등農船組合等에서 봉헌금奉獻金 구십원九十圓을 얻고 유림독지가儒林篤志家 여러분과 향교鄉校 임원任員 김민수金敏洙 하성희河成羲 이휘수李彙洙 하용택河龍宅 정병주鄭丙柱 한상은韓相殷 류봉숙柳鳳淑 배창택등裵昌澤等 여러분이 내신 특별출연금特別出捐金이 육백여원야六百餘圓也이며 또 향교鄕校 임원任員 여러분의 만기滿期로 인한 사퇴辭退로 후임자後任者 정직조鄭職祚 이형모李馨模 정의조鄭儀祚 이시봉李時鳳 하희섭河熺燮 고총석씨등高銃錫氏等이 이어 출연出捐한 금삼백원金三百圓이었다. 우물이 명륜당明倫堂 계단階段에 촉박히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바깥 남南쪽으로 약約 백보百步 거리距離에 옮겨 파고 향교鄕校 고자雇者 집이 없더니 민가民家의 매입買入으로 고자雇者집이 마련되고 부지가 정리되어 삼문三門이 바르게 되었음인즉 이로써 이를 위한 향교비鄕校費 오백원五百圓을 마련코자 군속郡屬 김상문씨金相汶氏가 면세面勢를 살펴 조사調査 계획計劃하였고 류재윤柳在倫 정채안鄭采安 양씨兩氏가 공사工事 마무리를 잘하였다. 이리하여 향교鄕校의 모양이 바라는 바대로 환히 빛나고 새로졌음이니라 우리 유도儒道가 깜깜하게 아주 꽉 막힌 때이나 능히 이 큰 일을 마치게 되어 이로써 선배先輩 여러 군자君子님들의 이루지 못한 뜻 사십년후四十年後에 있어서 이를이어받아 이루게 되었음이니 무릇 일의 맞남과 끝맺음의 어려움이 그렇지 않을 손가, 이는 모두 앞에 기명記名한 여러분과 군민郡民 모두가 크고 작은 일들을 끝까지 해 낸 어진생각과 노력과 한 마음으로 공자孔子님을 숭모崇慕한 힘이니라 도모圖謀하는 바를 오는 훗날에 전傳하여 가르쳐서 이로써 계속해서 중수重修토록 함을 도모圖謀코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새겨 걸어야 할 것이며 내가 비록 한 말도 하지 않고자 하나 어찌 가可히 아니할 수가 있으랴,
성탄 2487년 병자丙子(1936) 11월 하순
진양 정봉희鄭奉禧 삼가 짓다.
南海鄕校 重修史蹟記
夫子廟舊在郡治北數弓之地鳳岡山下하니 爾來幾轉幾修는 前人之述에 備矣라 而韓高宗壬辰에 縣令朴來卿氏以爲不叶堪輿라하야 移建于稍東百步許할새 大聖殿及神門東西兩庫는 僅得告工하고 適値歲歉民病하야 遂中止하니 明倫及齋庖之屬이 仍在舊址하야 不得與 聖廟近이라 去丁巳에 郡守成斗植氏爲築瓦棟四間于新門下하야 畧倣明倫堂之制하나 而規模下窄하고 間架迫隘하야 每當春秋將事之時하야 進退趍蹌이 常患窘跲이라 自是十七年間을 荏苒因循하야 廟宇는 未免滲漏하고 餘舍도 漸至傾圮하야 將見滿庭春草러니 庚午秋에 不肖功守是郡할새 首先參謁하고 與鄉人士로 謀所以重修者盖亦有年이라 壬申秋에 薦鄉儒鄭奉禧君하야 任直員하고 使之協贊規畫하야 置重修期成會於各面하여 集合奉獻金一千八百八十圓하고 又招請各面元有矯風會分會長하야 得留在金壹千貳百圓하고 復自新任掌議諸君과 郡廳職員으로 以至各公立學校職員及儒林篤志家와 與夫學農船組諸團體히 勸誘之하며 慫慂之하여 莫不應分奉獻케하야 前後集金이 計約四千貳拾貳圓也라 乃以癸酉三月癸已吉日로 廟貌를 權安于舊東齋하고 繼即起工할새 選鄉人士金泳斗 鄭在敏 鄭在周 李台柱 等君董其事하고 大聖殿則柱楹은 仍其舊하고 瓦桷은 易以新호대 夾正壁爲堂하야 奉聖位하고 神門及東西庫는 毁坼而改作之호매 西庫는 增一間하고 明倫堂則擧舊址之仍在者而移建之호매 瓦材之朽敗者는 悉易而補葺之하고 東齋則以成郡守所築四間之舊로 增損其制而成築之하고 內而椅卓床席을 逐一新備하고 外而階砌療垣을 隨方拓恢하야 務從宏敬堅縝케하고 請役于民하니 民不憚暑雨하고 樂爲之赴하야 凡五閱月而工告訖하니 何其就之順而成之速也오 抑由鄉之人의 慕聖之誠이 能格神明也夫乚저 爰擇七月二十九日丁亥之吉辰하야 還安 廟貌할새 冠裳이 濟濟하고 降登이 秧秧하야 庶復覩崇嚴肅敬之盛儀하니 斯豈非士林諸賢과 曁大小郡民의 同心同德之效也歟아 其獻金額多少와 賢勞人氏名은 當錄示來後하야 以爲衛道之勸이어니와 不肖因此深有所望於諸君子하오니 今夫子之廟旣修에 凡升斯堂者는 皆夫子徒也라 必講夫子之道하야 俾百里四境에 人倫明而禮讓興하야 蔚然爲一方之齊魯하면 不肖亦與有禁焉이니 是在諸君子之終始오 至若西齋與風化樓는 因昨秋懷襄之慘하야 未果而止하니 抑亦有待而然歟인저
歲甲戌 八月 十四日
南海郡守從七位 昇平 朴海柱記
舊矯風會分會長 文鳳烈 河斗淳 崔翊洙 崔達湖 金亨璣 鄭致麟 鄭鉉碩 尹鳳儀 朴長璘
期成會長 金泳斗 鄭鍾黙 崔鉉碩 金寅契 朴晟奎 河漢緯 鄭甲龍 鄭泰鉉
掌議 李彙洙 河龍宅 河成羲 柳鳳淑 金敏洙 韓相殷 鄭丙柱
以上은 面의 順位에 依하여 記載함
事務擔任者 郡属 有田淸信 金相汶
雇員 高貴洪 直員 鄭奉禧
金錢與物品奉獻者氏名은 全部記載하기 難함으로 別冊芳名錄에 讓하고 此를 略함
남해향교 중수사적기
대성전大成殿은 옛날부터 군청郡廳의 북쪽으로 화살 몇 번 날린 정도의 거리 봉강산鳳岡山 아래에 있었으니 지금까지 몇 번 옮기고 몇 차례 중수重修한 사실事實은 선배先輩님들의 기술記述에 맞추어져있슴이나 대한大韓 고종高宗 임진壬辰(1892)년에 현령縣令 박래경씨朴來柳氏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약간 동東으로 백보百步쯤 되는 곳에 옮겨 세웠는데 대성전大聖殿 및 신문神門과 동서東西 양고兩庫는 겨우 준공竣工하였으나 그 때 마침 흉년凶年으로 백성百姓들이 병病든 때 만나 드디어 공사工事를 중지中止하니 명륜당明倫堂과 여러 재실齋室 포방庖房 등속等屬은 그대로 옛 터에 남아 있어 대성전大聖殿에 가깝지아니하였기로 지난 정사丁巳(1917)년에 군수 성두식씨成斗植氏가 신문神門 아래에 기와집 사간四間을 지어 간략하게 명륜당明倫堂 모양새를 본 받아 내었으나 그러나 규모規模가 낮고 비좁고 집간 구조構造가 좁고 궁색하여 해마다 춘추春秋 향사享祀 때를 강當하여 진퇴進退 거동舉動함에 있어 엎드리기조차 군색한 것이 항상 병폐이러라 이로부터 17년간을 옛 그대로 두고 시일時日을 우물쭈물 미루어 지냈으니 사당집은 비가 샘을 면치 못하고 다른 건물建物도 점점 허물어져 기울어짐에 이르러 장차 춘초春草가 한 마당 가득함을 보게 되었더러니 경오庚午(1930)년 가을에 내가 외람되게 이 고을 군수郡守가 되매 먼저 대성전大成殿에 참배參拜하고 고을 여러 인사人士들과 더불어 중수重修를 도모謀議한 것이 대개 또 몇 년이라 임신壬申(1932)년 가을에 이 고을 선비 정봉희鄭奉禧를 천거薦擧하여 직원直員으로 임명任命하고 그로 하여금 협찬금協贊金 모으기를 계획케 하여 각면各面에 중수기성회重修期成會를 두어 봉헌금奉獻金 일천팔백팔십원壹仟八百八拾圓을 모으고 또 각면各面에 원래元來 조직組織되어 있는 교풍회矯風會의 분회장分會長을 초청招請하여 저축貯蓄해 둔 일천이백오십원壹仟貳百五拾圓을 얻고 다시 신임장의新任掌議 여러분으로부터 군청직원郡廳職員들까지에 이르렀고 각공립학교各公立學校 직원職員 및 유림儒林 독지가篤志家와 저 글방과 농선조합등農船組合等 여러 단체團體까지 미치게 하여 권유勸誘하며 종용慫慂하여 응분應分의 봉헌奉獻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니 전후前後하여 모은 돈이 약 사천이백이십원四千二百二拾圓이라 계유癸酉(1933)년 3월 좋은 날 계사일癸巳日에 대성전大聖殿 신위神位를 옛 동재東齋에 봉안奉安하고 이어서 즉시 기공起工하니 고을 인사人士 김영두金泳斗 정재민鄭在敏 정재주鄭在周 이태주씨등李台柱氏等 여러분을 선임選任하여 그 공사工事를 감독監督케 하고 대성전大成殿의 기둥은 옛 것 그대로 두고 서까래와 기와만 새 것으로 바꿨으되 벽壁을 고쳐 바른 벽壁을 가진 당堂으로 만들어 성위聖位를 봉안奉安하고 신문神門 공서고東西庫는 허물어 고쳐 지었으되 서고西庫는 일간一間 더 늘이고 명륜당明倫堂은 옛 터에 그대로 있는 것을 이건移建하여 부서진 기와는 모두 보충補充하여 갈아 이엉하고 동재東齋는 성군수成郡守께서 신축新築한 사간四間의 옛 것을 증감增減 없이 그 모양대로 축조築造하고 내부內部는 의자椅子 탁자卓子 멍석 등等을 모두 새로 마련하여 갖추고 외부外部의 섬돌과 원장垣墻은 다시 마련하여 넓고 시원하며 견고堅固하기에 힘썼으며 역사役事를 민民에게 맡기니 민民이 더위와 풍우風雨를 꺼리지 않고 기꺼이 바삐 일하여 무릇 오개월五個月에 걸쳐 준공竣工하니 어찌 그 시작始作도 순조順調로왔고 완공完工도 빨랐음인가 이는 이 고을 사람들의 성현聖賢을 사모思慕하는 정성精誠에 신명神明이 능能히 감동感動함에서 이니라. 대저 7월 29일 정해丁亥의 길일吉日을 택擇하여 신위神位를 다시 되돌려 모시니 의관衣冠이 엄숙하고 장壯하며 오르내림이 질서정연秩序整然하고 겸손하여 서민庶民이 성덕聖德을 숭봉崇奉하고 경모敬慕하는 법도法度가 엄숙하며 성대盛大함을 다시 보니 이는 어찌 사림士林 여러분과 더불어 대소군민大小郡民의 동심동덕同心同德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아름답구나 그 헌성금액獻誠金額의 적고 많음과 노력努力하신 분들의 방명芳名을 마땅히 기록記錄하여 후세後世에 보여서 이로써 도道를 지키도록 권勸하기 위함이거니와 내 이로 인해 여러분에게 심심深甚히 바라는 바 있으니 이제 성묘聖廟는 이미 중수하였으니 무릇 이 당堂에 오르는 자者는 모두 공부자孔夫子의 성도聖徒이니라 반드시 공부자의 도를 강구講究하고 익혀서 오로지 백리사방百里四方의 남해 땅에 인륜人倫을 밝혀서 예도禮度와 겸양謙讓의 도道가 일어나 가장 울흥蔚興하여 재齋나라 노魯나라와 견주어지면 이 사람 또한 더불어 영광榮光이니 이는 여러분의 행동行動에 있슴이요 중건重建하고자 하던 서재西齋와 더불어 풍화루風化樓는 작년昨年 가을 대홍수大洪水의 참화慘禍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고 중지中止하니 또한 계획計劃대로 그렇게 되기를 기다릴 분인져
歲甲戌(1934)년 8월 14일 남해군수 승평 박해주朴海柱 짓다.
구교풍회분회장 문봉렬 하두순 최익수 최달호 김형기 정치인 정현석 윤봉의 박장인
기성회장 김영두 정종묵 최현석 김인결 박성규 하한위 정갑용 정태현
장의 이휘수 하용택 하성희 류봉숙 김민수 한상은 정병주
이상은 면의 순위에 의하여 기재함
사무담임자 군속 유전청신 김상문
고원 고귀홍 직원 정봉희
금전여물품봉헌자씨명은 전부 기재하기 어려움으로 별책 방명록에 양보하고 이에 생략함
南海鄕校 明倫堂記
南海郡於海嶺之遐澨也 然其俗崇禮尚儉朴好文學務稼穡猶 有先王之遺風往在壬辰移建大成殿 于舊址左一弓之地 惟明倫堂未焉 以其不遠而近也 比年 以來事有甚不便者 直員柳正熺白事于郡守成侯斗植侯聞而樂之 與郡士林載謀新創士 皆釋敦始於 今年二月訖于八月 旣成遣張鎭默囑余 以記其事 余方病臥窮廬起 而爲之言曰 有是哉諸公之爲此也 盖周室東遷大道 既隱吾 夫子生於其時雖不得君師之位 集群聖之大成 而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爲萬世開太平 其功反有賢於堯舜自天子至 於庶人莫不北面事者 二千餘年挽近 以來百家異說 日新月盛充塞宇宙三網淪九法斁人 皆貿貿然莫知所向斬堂也 於是而起焉千均一髮之際天豈無意哉 居是堂者 讀扶陽抑陰之書惇 孝悌忠信之行入 而事其父兄出 而事其長上 則人倫明 而教化成則 夫子之道 當復煥然允若茲之堂也 奚翅南海焉 而已亦將有辭 於天下後世矣 茲敢不辭 而樂爲之書 以賀南海之諸君子且 以自勵云
孔紀 二四六八年 一二月
金羅 趙鎬來 記
남해향교 명륜당기
남해군南海郡은 바닷가 멀리에 있느니라 그러나 풍속風俗은 예양禮讓을 숭상崇尙하고 검소儉素하며 순박淳朴함을 숭상하고 학문學問과 배움을 즐기며 농사農事에 힘쓰니 오히려 선생先生의 유풍遺風이 있슴이니라, 지난 임진壬辰(1892)년에 대성전大成殿을 왼쪽으로 한 화살의 거리에 이건移建하였으나 오직 명륜당明倫堂은 옮기지 못했으니 그 거리距離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그대로 있었다. 그 해부터 일이 있을 때마다 심히 불편한 때가 많았기로 그 때 직원直員 류정희柳正熺씨가 성군수成郡守에게 알리니 성두식군수成斗植郡守께서 들으시고 기꺼이 군내 사림士林들과 더불어 새로 중건重建키로 모의謀議하니 사림들이 모두 돈독敦篤한 마음으로 참여參與하여 금년 2월에 시작하였고 8월에 가서 이미 마무리되었다. 이미 이루어지니 장진묵張鎭默을 보내와 나에게 그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을 위촉委囑하나 나는 바야흐로 와병중臥病中이라 겨우 병석病席에서 일어나 말하였는데 이같은 일이 있슴인져 여러분이 이를 힘써 했음이니라 대개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동東쪽으로 옮기매 대도大道는 이미 어두워졌더러니 공부자孔夫子께서 그 때에 탄생誕生하셨으니 군사君師의 위호位號는 얻지 아니하였으나 여러 성현聖賢들의 하신 일들을 모아 대성大成하셨으며 천하天下를 위하여 입심立心하시고 생민生民을 위해 입명立命하사 만사萬事를 위하여 태평太平의 실마리를 마련하시니 그 공功은 오히려 그 어짐이 堯舜요순보다 더하다.
천자天子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제자弟子가 되어 스승으로 섬겨 모시기를 이천二千년이라 근년近年에 이르러 백가百家의 이설異說이 날로 새로 나고 달로 성盛하여져 이 세상에 가득하니 삼강三綱이 사그러지고 주周나라 인법仁法이 허물어지니 남을 싫어하고 모두가 무식無識하여 예절禮節에 어둡고 언행言行이 서툴며 그리하여 어디로 갈줄 모르는 형편이러라. 이 집이 이때에 지어지니 한 머리카락이 천조千釣을 당기는 위기일발危機一發의 때에 하늘이 어찌 무심無心하리오! 이 당堂에 생활生活하는 자者는 밝음을 도우고 어두움을 억누르는 정의正義로운 글을 읽고 배우며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하며 나라에 충성忠誠하고 서로 믿음을 갖는 행실行實을 돈독히 하여 집에서는 부모형제를 섬기고 밖에서는 어른을 공경恭敬하면 인륜人倫이 밝아지고 교화敎化가 이루어지면 공자孔子의 도道를 마땅히 순종 順從함이 밝아질 것이니라, 이러한 집이 어찌 남해南海 뿐이리오, 또한 천하후세天下後世에 장차將次 할 말이 있슴이라 이에 사양치 않고 기꺼이 글을 만듬으로써 남해南海 여러 선비의 공功을 치하致賀하며 또 이로써 나도 스스로 다 잡도록 함을 말함이로다.
공기 二四六八(1917)년 금라金羅 조호래趙鎬來 짓다.
南海鄕校 明倫堂上樑文
述夫 州有序黨有庠興學先彝倫之重 跂斯翼矢斯棘肯構盡規模之精 教之所由 完而苟美 惟茲海陽 忠信十室之邑 文學多士之鄉 暮讀朝耕居民之淳風太古 春絃夏誦君子之遺澤至今 窃念大成殿之屢遷固謂經營伊始 迨茲小學校之新設亦由教化方隆 肆士林倡重建之論 幸儒宮見告成之美 占地勢之明媚節彼山南 察天機之奧微臨于川上 下宇上棟各得方圓平直之宜 東宮西齋復都藏修遊息之所 載謄燕賀 助擧虹樑
拋樑東 金鷄唱盡日輪紅 誰家尚做昏衢夢 昕鼓洋洋故未終
抛樑西 歲寒松翠望中低 共瞻聖廟門墻屹 正路如今自不迷
抛樑南 猿山秀色半天參 春來時有偷閒客 花柳前川過兩三
拋樑北 郡城大道如繩直 杏壇高處雅歌高 濟濟紳衿共攀陟
拋樑上 海天萬里消烟瘴 胸衿灑落暫排徊 霽月無邊光彩放
抛樑下 混混源泉流不捨 須戒諸生躁進心 盈科後得如斯者
伏願上樑之後 儒道益隆 人彛咸叙 肄業絳帳誰非敦詩說禮之人 將事奠楹盡是入孝出悌之士
一九一七年 十月 望日
從七位南海郡守 成斗植
남해향교 명륜당상량문
대저 말씀 드리자면 고을에는 향교鄕校가 있고 향리鄕里에는 학당學堂이 있어 선인先人의 윤리도덕倫理道德의 중요성重要性을 배워 일으키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음은 선성先聖을 받드는 정신精神이 돈독敦篤하였음이요、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잘 이어받아 규모規模의 정교精巧에 최선最善을 다하였음이로다. 이는 교화教化에 연유緣由한바요 이에 완성完成하니 참으로 아름답도다.
오직 이 해양海陽은 조그마한 고을이나 충효忠孝와 신의信義가 가득한 고을이며 학문學問하는 선비 많은 고장이라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순박淳朴한 풍속風俗은 태고太古 때와 같고 봄에는 가악歌樂하고 여름엔 송시誦詩하던 군자君子들이 남기신 덕행德行이 지금에 이르르네 가만히 생각하니 대성전大成殿을 여러번 옮긴 것은 진실로 경영의 제일 큰 일이요, 지금에 이르러 소학교小學校의 신설新設도 바야흐로 교화敎化의 융성隆盛에 연유緣由되도다. 이러므로 사림士林들이 중건重建의 여론輿論을 주도主導하고 벌리니 다행多幸히 향교鄕校가 훌륭하고 아름답게 중수重修되었네. 지세地勢를 점치니 아름답고 고움이 저 산 남南쪽에 우뚝하고 오묘奧妙한 천기天機를 살피니 미묘微妙하고 심오深奧함이 천상川上에 다달았네. 선물建物 구조構造의 아래 위가 모나고 둥글고 바르고 곧음의 알맞음을 얻었도다. 동東쪽 집과 서재西齋는 수도修道하고 여가선용餘暇善用하는 곳으로서 그 기능機能을 다시 갖고 총괄하게 되었도다。 제비의 하례賀禮가 비로소 시작되었으니 아름다운 대들보 올림을 도우라.
대들보를 들어라 동東쪽을 바라보니 새벽 닭이 울고나니 붉고 둥근 해가 솟았네. 누구의 집에서 아직도 어두운 거리의 꿈을 꾸고 있는고? 아침 일찍 북소리 양양洋洋하며 짐짓 그치지 않네.
대들보를 들어라 서西쪽을 바라보니 겨울의 푸른 솔이 한눈 안에 들어오네. 모두 같이 대성전大成殿을 바라보라 삼문三門과 원장垣墻이 우뚝 솟아 있고 인간人間의 정도正道는 지금껏 혼미混迷하지않게 이어져오고 있네.
대들보를 들어라 남南쪽을 바라보니 원산猿山¹⁾의 수려秀麗한 경관景觀 하늘 가운데 끼어 있고 봄이 오니 그 속에 상춘객賞春客이 찾아들고 화유花柳의 냇가에 둘씩 세씩 짝을 지어 지나가네.
대들보를 들어 북北쪽을 바라보니 우리 성내城內 큰 길이 먹줄같이 곧고 바르고 공자孔子님의 도道를 강의講義하는 향교鄕校엔 우아優雅한 노래 소리 가득하며 훌륭한 선비님들 서로 도와 사회적社會的 위상位相이 높아지네.
대들보를 들어라 위를 바라보니 남해南海 하늘 만리萬里에는 어둡던 병폐연기煙氣 사라지도다. 가슴 속 시원하니 잠시 동안 소풍하네. 개인 하늘에 뜬 달은 끝없이 멀리 광채光彩를 보내주네.
대들보를 들어라 아래를 바라보니 원수源泉에서 솟는 물은 쉬지 않고 흐르나니 학생學生들은 모름지기 빠른 진전進展 조급躁急한 마음 가짐 삼갈 것이며 넉넉하게 성숙成熟되면 물이 구덕에 가득하여 넘쳐흐르듯 그대들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니라.
삼가 엎드려 원願하옵건대 상량후上樑後에는 유도儒道가 더욱 융창隆昌하여져서 사람들이 다 함께 인륜人倫을 지켜 유지토록 하옵소서 배우고 익혀 학문學問이 크고 가득한 큰 그릇이 되면 누구나 시詩를 돈독히 하고 예악禮樂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리오
석전제를 정성껏 받들고 집안에서는 효도孝道하고 밖에서는 대인관계對人關係가 부드럽고 친구간에 화목함을 다하는 선비가 되게 하소서。
정사丁巳(1917)년 10월 보름날
종칠위從七位²⁾ 남해군수 성두식成斗植³⁾
【주석】
원산猿山¹⁾ : 남해군 이동면 호구산(626m)의 한자식 이름이 원산猿山으로 정상에 호구산봉수가 있다.
종칠위從七位²⁾ :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의 관리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 명칭으로 여기서는 남해군수를 이른다.
성두식成斗植³⁾ :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매국노이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 모였던 향교에 이런 매국노가 지은 현판이 버젓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다.
南海鄕校 明倫堂重建實記
宣聖証降二千四百八年秋花田郡 大成殷前明倫堂復成竊 惟人之大倫有五皆天之所 叙 而人之所遜也 在昔聖賢所 以綱紀人道建立 人極風化天下不可一日偏廢有虞氏敬敷以來吾 夫子垂繼開之功 而自國都至于宇縣廟焉 而瞻仰堂焉 而講明歲在壬辰 聖廟移建于舊址 東一弓之而近而連値鬧 荒堂齊門樓因循未果仍 爲蒙養教育之室則春秋 享祀致齋庖湢之所慊焉 朔望焚香止宿登降之節苟焉 爾來二十有六稔矣 何幸我成侯斗植莅 爲茲邦勤事愛民獎學劭農力所可 爲無有不盡其心慨 聖廟之滲漏而無明倫堂也 與直員柳正熺詢及郡民八方齊心一力鳩材督役始春終秋構若干楹減 其舊而新其觀東 爲庫庖西無齋焉 前立小門亦無風化樓節 而省費儉而不侈 自此而家忠信人孝悌待吾道復明 則堂之復古其庶幾乎 是秋重九柳君 累責于不佞曰 丹雘已畢盍記焉 辭以荒蕪不獲略叙 其概云
丁巳(一九一七)年 陽月 望日
平康 蔡東薰 記
都監 柳正熺
監督 鄭在敏
남해향교 명륜당중건실기
공부자孔夫子께서 탄강하신지 서기 1917년 가을에 화전군花田郡¹⁾ 대성전大成殿 앞에 명륜당明倫堂을 다시 세웠다. 곰곰히 생각하니 사람의 대윤리大倫理로서 오륜五倫이 있음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질서秩序인 바 사람들이 모두 겸손히 받아 드리는 바이니라, 옛날 성현聖賢이 강기綱紀²⁾와 인륜人倫의 도道를 세워 사람답게 되었으니 천하天下의 풍습風習을 교화教化하는 일이 하루라도 허물어져서는 아니될 것이다. 순舜 임금께서 오교五教를 펴내신 이래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 이어 대륜大倫을 밝혀 개화開化시킨 공功을 드리우셔서 나라의 도성都城에서부터 고을에 이르기까지 사당祠堂을 세워서 숭앙崇仰하였고 명륜당明倫堂을 세워 인륜人倫을 익히고 밝혔음이로다. 지난 임진년壬辰年(1892)에 대성전大成殿을 이건移建하였는데 구지舊址에서 화살 한 시위의 가까운 거리이나 연이어 흉년을 만나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西齋와 문루門樓는 우물쭈물하며 이건移建을 못하였다. 따라서 젊은이들을 깨우쳐 교육教育하는 집이 앞의 그대로였음인즉 춘추향사春秋享祀 때 주방廚房과 목욕간沐浴間등 재계齋戒하는 곳으로서도 불만족不滿足하였고 초하루 보름의 분향焚香 때 유숙留宿하고 등강登降하는 절차상구차節次上苟且하였는데 그로부터 26년간이나 지났음이라 어찌 다행치 않으리오, 우리 성두식成斗植 군수가 이 고을에 임任하여 정사政事에 부지런하매 군민郡民을 사랑하고 교육教育을 장려獎勵하였으며 농사農事에 부지런하도록 한 바 여러 방면에 자기 힘으로 가히 할만 한 바는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대성전大成殿이 비가 새고 명륜당明倫堂이 없음을 개탄慨嘆하였고 직원直員 류정희씨柳正喜氏와 더불어 계획計劃하고 군민에게까지 의논議論하게 되니 입방八方에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자제資材를 모았고 역사役事를 독려督勵하니 봄에 시작始作하여 가을에 마쳤는데 조그마한 집을 하나 지었다. 옛것 보다는 줄였으나 그 모양이 새롭더라. 동재東齋는 주방廚房과 고방庫房으로 하였으나 서재西齋가 없고 앞에다 소문小門을 세웠으나 또한 풍화루風化樓를 없앴는데 이는 절제節制하여 비용費用을 줄이고 검소儉素하며 사치奢侈하지 아니함이라 이로부터 집집마다 충성심과 믿음이 가득하고 사람마다 효도孝道하고 공경하야 우리 유도儒道가 다시 밝아지기를 기대함인즉 명륜당明倫堂이 다시 일으나길 바랐음이다. 이 가을 9월 9일류정희씨柳正喜氏가 여러번 나에게 맡아 줄 것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단청丹靑도 이미 마쳤으니 어찌 기문記文을 지어주지 않으려나 함이나 내 글이 거칠어서 사양하였는데 사양을 들어주지 아니하니 부득이 간략하게 지어서 그 대강을 말한다.
정사년丁巳(1917)年 10월 15일
평강 채동훈蔡東薰 짓고
도감 류정희
감독 정재민
【주석】
화전군花田郡¹⁾ : 화전花田은 남해군의 옛 이름이다.
강기綱紀²⁾ :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法과 세칙細則
南海鄕校 明倫堂重修上樑文
兒郎偉 天叙有則自生民厥初 人道立焉賴惟聖作極 實百家之同歸其貫 宜斯堂之愈久彌新 燕賀將騰 鴻樑載擧 恭惟大成至聖吾 夫子道冠百王 師表萬世 其教則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之大倫 其文則詩書禮樂春秋皇王帝霸之大法 是所以賢於堯舜湯武者遠矣 斯道也得有顏曾思孟而傳之 千五百年洛閩群哲繼承微言闡 十八位麗韓諸子輩出大義明 是皆 羽翼斯文 輔相天地 至今頂踵膚髮賴誰而全生 有如食息呼吸必屬於元氣 故日月臨照無往而非笙簧金石之堂 霜露隨移有踐者是蓋籃邊豆之奠 顧茲海陽爲郡 河汾襟帶雖小華明浄之丸泥 雲錦屏環寔南紀爽豁之靈瑄 宜黃廟學爰自設縣之初 武城絃歌不改昭代之盛 逮夫 大成殿改壬向午而移東百步之強 明倫堂廢舊構新者就中升年之久 規模下窄飲射揖讓者每齊歎 棟宇滲頹聖座神明之所未妥 適來朴侯海柱 志功崇儒 政先當務 詢謀多士盖三載留心 作新南民實蕃夜匪懈 于時直員鄭奉禧 悉心綱紀 敦事始終 慕聖契儒林契推誠齊騰 期成會協議會措畫鄭重 辰良枝巧美輪奐而若神 子來民功成實兀於不日 詩禮冬夏將纓弁之會同 禋祀苾芬庶蠁之自至 一時改觀 萬姓歡呼 敢因欄樑之升 恭陳兒郎之祝
兒郎偉拋樑東 泗水春漪戴日紅 想應風俗歸來地 會看鳶魚一理同
抛樑南 錦洋無浪太虛涵 緬懷當日乘桴處 夫子憂心可默探
拋樑西 蓮臺萬丈入雲齊 海外欄遮蔥嶺色 莫教黎庶路冥迷
抛樑北 郡城大道如繩直 萬人由此無他求 優有餘師心上得
拋樑上 皓天不忘幾時仰 吾黨俊髦須勉旃 斯文終古未將喪
抛樑下 鳳川東去如斯者 龍圖並出呈休祥 變化乾坤不長夜
伏願上樑之後 人文宣朗 世道方亨 入則孝出則恭彝倫益惇 勤於禮興於讓風化是懿 濟濟範俗人材菁莪發育 彬彬觀國君子茅茹彙征 薰為四境之太和人躋人壽 蔚然一方之丕變鄉 比魯鄒 吾道重光窮天壤而勿替 殿基鞏固如 岡陵之不崩
孔記 二四八四年 癸酉 初夏
晋陽 鄭暘驥 撰
남해향교 명륜당중수상량문
어영차! 하늘이 차례지워 법칙이 있슴은 민생生民하던 최초最初부터이고 인륜도덕人倫道德이 확립確立됨 즉 성인聖人이 인도人道를 마련함에 힘입음이라 실實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귀歸하여 같이 관철貫綴되었고 이 당堂이 더욱 오래 될수록 더욱 새로와질 것임이 마땅하다 제비가 와서 축하하는 소리가 장차 들릴 것이고 큰 대들보 받들어 올림에 삼가 공손히 생각컨대 대성지성大成至聖하신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 도道는 백왕百王의 위에 있고 천만세千萬世에 스승의 표상表象이러. 그 가르침인즉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의 큰 인륜人倫이요、그 문적文籍인즉 시서례악詩書禮樂 춘추春秋 황왕제皇王帝 패자覇者의 치도治道 대법大法을 말씀하심이라 이런 바로써서 현명賢明하기가 요순堯舜 우탕禹湯 무왕武王보다 원대遠大하고 인륜도덕사상人倫道德思想은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같은 이가 있음을 얻어서 전승傳承되었으며 천오백년후千五百年後에 정주학파程朱學派의 여러 현철賢哲이 계승繼承하여 정미精微하게 천명闡明하였고 우리나라의 십팔현十八賢과 여러 훌륭한 학자學者가 배출輩出되어서 대의大義가 밝아졌으니 이는 모두 유교儒教의 윤리도덕倫理道德을 보우保佑함에서이고 천지天地가 도움에서 이니라. 지금까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온전하게 한 것은 누구에게서 힘입은 바인고 「밥먹고 숨 쉬고 휴식休息하는 것은 원기元氣에 속屬하는 것과 같음이니라」 그런 「고故로 일월日月이 조명照明하는 가는 곳마다 생황笙篁 종성鍾聲의 당堂이 아님이 없고 설로霜露의 계절季節따라 꼭 실천實踐하는 것은 簠簋籩豆로 제사祭祀함이니 회고回顧컨대 해양海陽의 고을은 바다에 둘려 싸인 비록 작은중화中華이나 밝고 깨끗한 작은 땅덩이리요、망운산望雲山과 금산錦山이 병풍屏風처럼 둘러 있어 진실로 남방南方의 상쾌爽快하고 활연豁然하며 신령神靈스럽고 시원한 땅이라 의황宜黃의 묘학廟學(향교鄕校)이 설현초設縣初부터였고 무성武城의 음악音樂도 다름없이 밝은 세상世上의 당대當代에 융성隆盛하였음이네. 대저 대성전大成殿은 임향壬向을 오향午向으로 고치면서 동東쪽 백보百步 남직한 거리距離에 이건移建하였고 명륜당明倫堂은 옛 것을 부수고 새로 세웠으나 특特히 이십년二十年이나 오래 되었고 규모規模도 작고 해서 향鄉과 향사鄕射로 예절禮節을 지키는 아름다운 풍속風俗을 고취鼓吹하는 행사行事에 불편不便함이 많아 한탄恨歎하였고 또한 비가 새고 무너진 곳도 있고해서 성현聖賢과 신명神明을 봉안奉安하는 곳으로 안당安當치 못하더니 마침이 때 도임到任한 박해주朴海柱 군수가 유교儒教를 숭상崇尙하는 일에 뜻이 간절하였고 정성精誠스러워 이 일을 군郡의 우선사업優先事業으로 하여 여러 사림士林들과 의논議論하여 대개 삼년三年 동안 마음에 두었고 남해군민南海郡民을 새롭게 하는데 실로 아침에서 저녁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때 직원 정태희直員 鄭泰禧는 전심전역全心全力 이 일의 진행관리進行管理에 규율規律을 바로잡고 시작에서부터 마칠 때까지 잘 다슬려 처리處理하고 모성계慕聖契와 유림계儒林契가 같이 일하도록 정성精誠스레 추진推進하고 기성회期成會와 협의회協議會를 정중鄭重히 계획計劃하고 조직組織하여 일하였다. 좋은 나날에 기교技巧를 다하니 그 건물建物이 아름답고 장대壯大하며 빛나서 아주 신통神通하매 군민들이 몰려와 참여參與하여 일하니 실實로 몇날 안 되어서 우뚝하게 솟은 건물建物이 이루어졌다. 동하冬夏의 시례詩禮 때는 장차 여러 공경公卿들이 나아가 회동會同할 것이고 정결淨潔히 제사祭祀올림에 향기로움이 퍼져나가 모든 것이 스스로 성하게 일어나에 이르게 될 것이며 일시一時에 면모面貌가 일신一新함을 보니 만백성萬百姓이 환호歡呼함이로다. 감敢히 대들보를 올림으로 인하여 공손恭遜히 어랑 축하행사祝賀行事를 베푸세
어영차 대들보를 들어라. 동東쪽을 바라보니 강진만江津灣 잔잔한 물결이 햇빛을 띄고 붉었도다 생각하니 무운舞雲에 풍욕風俗하고 돌아올 때 마침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理致 같음을 알 수 있네.
대들보를 들어라 남쪽을 바라보니 금산錦山 앞 큰 바다는 파랑波浪없이 잔잔하며 푸른 하늘이 잠겨있도다. 지난 일을 회상懷想하니 그 옛날 뗏목을 타시고자 하실 때의 공부자孔夫子님의 그 근심하심 가可히 말없이 살필 수 있네.
대들보를 들어라 서쪽을 바라보니 연대산蓮臺山 만장봉萬丈峯이 가지런히 구름 속에 들어 있고 해외海外의 총령怱嶺¹⁾의 빛을 가려막아 서민으로 하여금 어리석고 미혹迷惑하지 아니하게 할지어다.
대들보를 들어라 북쪽을 바라보니 우리 고을 성내城內 큰 길 먹줄같이 곧도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길로 말미암아 다른데서 구할 것(바른 법도法度)이 없음이여 훌륭한 스승님이 내 마음 위에 있으니 얻을 것이 많을 것이니라,
대들보를 들어라 위를 바라보니 밝은 하늘이 우리 백성 잊지 않는 것 얼마나 생각하며 우러러 보았는고 고을의 준걸俊傑스런 선비들은 모름지기 면학勉學할지어다. 유도儒道는 영원永遠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대들보를 들어라 아래를 바라보니 봉천鳳川이 동東으로 흐르는 것 이와 같은 것(여사자如斯者 공자孔子님 말씀)이다. 용마龍馬 하도河圖별이 같이 나와 경사慶事스러운 징조를 보내주니 천지天地의 변화變化로 밤만 길지는 않으니 모든 사안事案 오래 가지 않음이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上樑한 후後에는 인문人文이 선양宣揚되고 명랑明朗해서 세상世上 도리道理가 바야흐로 형통亨通하여 집에서는 효도孝道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恭敬하고 떳떳한 인륜人倫을 더욱 돈독하게 할 것이며 예의생활禮儀生活을 부지런히 하고 겸양謙讓의 도道가 흥성興盛하여 교화敎化가 이에 아름답고 풍속風俗에 모범模範이 되는 많고 많은 인재人材가 걸려지고 학식學識을 갖추어 나라를 살피는 군자君子가 속출續出하며 많이 찾아들고 조화調和로운 향기香氣로 천하天下에 크게 어울리는 어진 사람과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많고 그리하여 또한 번성繁盛하여 노魯나라 추鄒나라에 비견比肩할 만큼 크게 변變한 고을이 되게 하소서. 우리 유도儒道가 더욱 빛나서 천지天地가 다할지라도 바뀜이 없게 하고 이 전당殿堂의 기틀이 공고鞏固하여 메뿌리 처럼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공기 2484년 계유癸酉(1933) 초여름
진양 정양기鄭暘驥 짓다.
南海鄕校 補修翻瓦記
龍集癸酉之三月 大成殿明倫堂及齋庖門庫之屬 次第修改 惟此神門西庫舍盖瓦未得堅緻 未升稔罅漏隨出 歲己丑春 鄉人士密陽朴周植晋陽鄭成圭 以時朔望禮生上香 而退周旋殿庭祠 與慨然曰 是若不及時繕完將來巨創不無 其慮知此廟貌咫尺之地 齋宿守直乎 乃各出金圓三萬 足工費翻瓦 易桶不閱月而告竣 其始終措畫多出 於時掌議沈載榮 噫 即今四海多難聖道晦 而世亂極矣 邪說作而道學 爲芭籬貪利興 而錙銖爭低昂斯時也 知能用力乎 尊聖衛道之地 特志擔夯者 其爲人概可想 而其功亦不可以終泯也 是爲揭記于板上使 凡入此門者 觀感而興起焉
聖誕 二千五百年 九月 日
南海鄉校典校 李禮模
儒道會委員長 鄭千基
보수하고 기와를 갈아 이엉한 기록
세월의 순서 따라 계유년癸酉年(1933) 3월에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및 동재東齋와 주포厨庖와 3간 고사庫舍 등을 차례로 고쳐 정리整理하고 또 이 신문神門과 서고사西庫舍의 기와가 견고하지 못하여 20년이 못되어 금이가고 흠이 생기니 기축己丑(1949)년 봄 우리 고을 선비 밀양密陽 박주식朴周植과 진양晋陽 정성규씨鄭成圭氏가 이때 삭망례朔望禮에 참반參班하여 분향焚香하고 물러가면서 같이 대성전의 정원을 거닐다가 분개하여 한탄하며 말하기를 만약 때맞추어 고치지 아니하면 장차 그를 근심함이 없지 않을 것이며 바야흐로 이 묘당廟堂의 신위神位를 가까이 모셨는데 밤으로 수직守直함이 어떨까 하며 이내 각기各己 삼만원參萬圓을 갹출醵出하니 공사비가 넉넉하였다 이리하여 기와를 갈고, 서까래를 바꾸는 일을 시작하여 한 달이 넘지 않아 준공竣工을 보았으며 그 진행進行과 마무리를 계획計劃하고 조치하며 또 출렴금出斂金도 많이 내신 분이 있으니 이분이 때의 장의掌議 심재영沈載榮이니라 탄식하노라! 지금은 세상이 다난多難하여 공부자孔夫子의 도道가 어두어지고 사회社會의 어지러움이 극極에 달達하였고 요사스런 말들이 크게 일고 있으니 도학道學을 버리고 사리私利를 취取하는 일이 크게 일어 조그마한 이해관계利害關係로 다툼이 낮았다 높았다 하는 이때 이니라. 능能히 그 힘쓰심을 알리오 공부자孔夫子를 존경尊敬하고 그의 도道를 지키는 이 마당에 이를 다지고 짊어질 것을 다짐하는 특지가特志家 그 분을 대개 생각할 만하니 그 공功 또한 끝끝내 허물어뜨리지 못할지라 이로써 이를 판자板子에 기록하여 걸어두니 무릇 이 문을 출입出入하는 자者는 감격感激하여 떨치고 일어날 지언져.
성탄 2500(1949)년 9월 일
남해향교 전교 이예모
유도회위원장 정천기
南海郡 文廟重修記
人事莫善於修舊 而惟修文廟爲最善何也 士者國之所賴以寧也 而文廟士所鑽仰依歸之地也 士而知修 夫子之廟 則是必能修 夫子之道者也 修道之謂教 教而後民可化 而國可寧也 不亦善乎 近來列郡之修 文廟者比比焉 而惟南海郡之修 爲尤善何也 他郡皆有校儲 以支之支之不繼輒責醵 於民望報於官而南海 則邑蕞而儒寒所儲至儉乃創期成會 凡有慕聖好義之心者 競相効力而郡所在矯風會 又以會財補之校任 及篤志家幾人亦不惜傾帑 而助之不煩乎 齊民他郡 皆營之於昇平無虞之時人皆樂爲之役 而南海則頻年嘆澇之災 至今年偏被懷襄之禍 而猶岌岌然以 文廟之未修 爲深憂不遑自卹不亦善之尤善乎 修之既竣郡儒鄭暘驥 韓相殷二君 跋涉千里來 以余忝居賢關之長 要記其事其言曰 是役之告功寔 我重修事蹟記 示之而皆歸功於士林 而不自居余讀之歎 曰有是哉 此亦吾 夫子讓而得之之遺 意可想其政通人和 是足以行吾 夫子之道也 昔韓文公作南海神廟碑文有云 海常多盲風怪雨 而剌史孔公來享 風雨無害歲熟民滋今 文廟旣修 而侯與多士享之 夫子之靈靈 於祝融朴侯之誠 誠於孔戣從 此是郡之歲 歲豐登永無災沴民庶 而富可以卜矣 吾夫子嘗言庶矣 富之富矣 教之旣富 而後侯與多士 以夫子之教 教之教化之行 風動四方 聞其風者 皆有一變 至魯之效矣 是豈南海一郡之幸 即我東之幸也 朴侯名海柱主是役者 直員鄭君奉禧 皆可傳也 至如堂廡之制 楹架之數 或舊或新之因革費日費財之多少董事 賢勞人士之氏名 朴侯之記詳矣 此姑畧之
聖誕二千四百八十四年 癸酉初秋下澣
經學院大提學兼明倫學院總裁 東萊 鄭萬朝 謹記
남해군 문묘중수기
사람으로서 옛 것을 다듬고 닦는 일이 가장 착한 일이니라. 그 중 오직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할 것이 가장 착한 일이라 함이 어떠하랴. 선비가 있음으로써 나라가 힘 입은 바되어 강녕康寧함이요. 문묘文廟는 선비들이 연찬鍊鑽하는 곳이며 사도斯道를 우러러 이를 의귀依歸하는 곳이니라. 선비로서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을 중수重修해야 함을 깨달은 것인즉 이는 반드시 능히 공부자孔夫子의 도道를 닦는 것이니 수도修道를 말하여 교육教育이라 하고 교육한 후後라야 백성이 교화敎化되어 국가國家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또한 착하지 않으리오. 근래近來 여러 고을에서 흔히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는데 오직 남해군南海郡의 중수사업重修事業을 더욱 착하다 하였음은 무엇 때문인고 하면 다른 고을은 향교鄕校 재산財產이 있었기로 이를 지변支辨하였고 지변支辨할 수 없으면 번번히 민民에 책임責任지워 갹출醵出하였고 관청官廳의 도움을 받았는데 남해南海인즉 고을이 작으만하고 유궁儒宮이 가난하여 모아둔 재산도 지극至極히 적어서 이에 기성회期成會를 창설創設하여 공성孔聖을 사모思慕하여 본 받고 정의正義로움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힘쓴 보람이 있었으며 둔내郡內에 교풍회矯風會가 있는 바라 또 이 회會의 재산財産으로서 향교鄕校를 도왔으며 향교鄕校 임원任員 및 독지가篤志家 몇 사람도 또한 아낌없이 사재私財를 내어 도와서 여러 군민郡民에게 번거롭지 않게하였다. 다른 고을은 모두 사역事役의 경영經營함이 이 평은平䌥하고 근심 걱정이 없을 때였기에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역사役事를 치루었는데 남해南海는 연이어 여러 해 동안 가뭄과 큰 물의 재해災害를 입었고 금년今年에는 더욱 크게 홍수洪水의 화禍를 입어 더욱 세상世上이 불안정不安定하였다. 그러나 문묘를 중수치 못함을 크게 우려憂慮하였고 오히려 개인個人의 생활生活에 대한걱정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아니 또한 선善한 중에서 더욱 선善함이 아니라.
중수공사重修工事는 이미 준공竣工하매 고을 유생儒生 정양기鄭陽驥 한상은韓相殷 양씨兩氏가 산넘고 물건너 천리千里길을 찾아와서 외람되게도 나에게 은거隱居하는 현관賢關의 장長이라 하여 그 사실事實을 기술記述하기 청請하며 말하기를 이 역사를 준공한 것은 진실眞實로 우리 박군수朴郡守의 힘이었다고 하며 박군수朴郡守 소술所述의 중수사적기重修事蹟記를 보이는데 그 공로功勞를 모두 사림士林에게 돌렸으며 자기自己에게 있지 않다고 기술記述하였다. 내가 글을 읽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런 일이 있구나 이는 또한 우리 공부자孔夫子의 겸양謙讓의 도道이며 유덕遺德을 터득함이라 그의 정사政事가 통通하고 인민人民이 화합和合함을 가히 생각할 수 있으니 이는 족히 우리 공부자孔夫子의 도道를 실천實踐함으로써 이니라, 옛날 한문공퇴지선생韓文公退之先生이 남해신묘비문南海神廟碑文을 지어 말하되 바다는 항상恒常 질풍疾風과 괴우怪雨가 많았는데 자사공공刺史孔公이 와서 제사祭祀지내니 비 바람 피해被害가 없어지고 곡물穀物이 잘 영글어 백성들이 다 잘살고 번성하더라 하였다. 이제 문묘도 이미 중수하고 박군수朴郡守가 선비들과 더불어 공부자孔夫子 영전靈前에 제사祭祀지냄에 부자夫子의 신령神靈이 남해신南海神보다 더 신령神靈하고 바군수朴郡守의 정신精誠은 공자사전孔刺史錢의 정성精誠보다 더 정성精誠스러우니 이로부터 이 고을은 해마다 풍년豊年들어 영원永遠로록 공부백성孔夫百姓들께 재협災狹과 피해가 없어서 부유富裕하게 됨을 가可히 짐작할 수 있슴이니라. 공부자孔夫子께서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백성百姓들이 많이 살면 넉넉토록 하고 백성들이 넉넉하면 교육해라 하셨으니 이미 부富한 후後이라 박군수는 여러 선비와 더불어 공부자의 교敎를 가르치고 교화教化되면 교화의 행의行儀가 사방四方으로 울려펴지고 그 풍성風聲을 들은 자者 다 모두 일변一變하여 노魯나라로 이를 효력效力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어찌 남해 한 고을의 행幸이리오 즉 우리나라의 행幸이리라 박군수의 이름은 해주海柱요 이 공사工事를 주관主管한 자者는 직원直員 정봉희鄭奉禧이니 모두 후세後世에 전傳함이 옳을 것이니라。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西廡까지 모양과 기둥의 수數를 옛 그대로 둔 것도 있고 새롭게 바꾼 것도 있으니 고치는데 쓰인 비용 공사의 기간비용期間費用의 많고 적음과 후에 힘쓰신 분들의 방명芳名은 박군수朴郡守의 기문記文에 상세詳細하게 실렸으니 여기에는 임시 방편으로 생략함이라.
공부자 탄신 2484년 계유癸酉(1933) 7월 하순
경학원 대제학 겸 명륜학원 총재 동래 정만조 삼가짓다.
南海鄉校 丹雘記
殿堂齋舍가 悠久歲月에 丹雘塗墍가 漫漶剝落하여 無復舊觀하니 士林이 相與咨差不己라 今秋新任典校崔金文이 慨然于斯하여 以繼前任典校金鎬根念願之志而獨自力辨하여 以招畫手土木之匠而施工하니 於是에 國會議員郡守 및 全都儒林이 一齊響應而發帑捐金으로 以助工費하여 未幾月而工告訖하니 殿堂門廡師生之舍가 煥然更新이라 來觀者咸曰斯役也 苟非崔典校慕聖之無窮이면 烏能及此리오 是可尙也로다 茲以聯書捐義芳名而俾刻之揭하여 以圖後來之垂範인저 前後相是役者는 朴鍾洙金榮九也오 文而記之者는 韓相殷也라.
典校 崔金文 民議員 申東寬 前典校 金鎬根 前民議員 崔致煥 郡守 朱尤喆 前郡守 張致京 前典校 韓相殷 同 李相表 同 金銀泰 儒道會長 朴珍鎔 慕忠會長 崔敬根 吳正僖 崔祥旭 張辰瓘 朴載燮 裴性仁 金生範 鄭甲柱 柳在渭 河得祚 金鍾善 郭正寬 柳重實 河炫旭 朴鍾洙 余在淳 朴連道 金載修 金榮九 朴性熺 金熙周 金漢殷 高定勳 崔啓祐 崔泰龍
남해향교 단청한 기록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재東西齋 동서무등東西廡等 건물建物이 오랜 세월歲月에 단청丹靑과 벽의 흙이 어지럽게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 옛 모양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선비들이 서로 더불어 탄식함이 그치지 않더라 금년今年 가을 신임전교新任典校 최금문씨崔金文氏가 이를 분개하고 한탄하여 써 전임전교前任典校 김호근씨金鎬根氏의 원願하고 바라던 그 뜻을 이어 받아서 홀로 자비自費로 회공畫工과 목공등木工等 잔인匠人을 불러 공사工事를 시작始作하니 이 때에 국회의원國會議員 군수郡守 및 전부全郡 유림儒林이 다 같이 이에 찬동贊同하여 내신 의연금義捐金으로 공사비工事費를 도와서 몇 개월이 안되어 공사를 마무리하니 대성전大聖殿 명륜당明倫堂 내외삼문內外三門 동서재東西齋가 환하게 빛나 새로와짐이라 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큰 공사工事는 다만 최전교崔典校님의 공부자孔夫子를 사모思慕함이 지극하시지 아니하면 어찌 능히 이에 미치리오 가可히 숭상崇尙함이로다. 이로써 의연금을 내신 분들의 방명芳名을 연서聯書로서 새겨 걸어서 후세後世들에게 모범模範되기를 도모圖謀함인져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공사를 책임진 사람은 박종수朴鍾洙 김영구金榮九이고 글을 지어 기록한 사람은 한상은 韓相殷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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