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천자봉 天子峯 지명 바로 찾기

천부인권 2023. 4. 14. 04:39

웅천 천자봉의 웅암

천자봉天子峯의 이름은 세계에 단 하나 존재하는 특별한 지명으로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1368~1399)의 전설과 그의 아들을 낳은 여인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또한 조선朝鮮의 황후皇后라 일컫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100일간 조선 왕조의 안녕을 기도하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러한 지명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는 것은 역사를 모독하는 것이며 왜곡한 자들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록에 의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시급하고 사실을 기반으로 지명을 바로잡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소명疏明이기도 하다.
따라서 2022년 12월에 진해문화원에서 발행한 『역주 웅천현 읍지』의 내용을 먼저 살펴 사실관계를 확인해보고 이후 사람들의 지명 인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1959년 국토정보 지도를 제공하는 『전국 지명조사철』 중 『(B210)지명조사철_20_진해시』와 『(B210)지명조사철_22_창원군』에서 천자봉天子峯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하고 이름을 바로 잡고자 한다.

 

웅천현 읍지 - 영조 36년(1760)

 

1. 웅천현 읍지 – 영조 36년(1760)

영조 36년(1760)의 산천山川과 단묘壇廟의 기록을 살펴보면

 

1) 웅산熊山
熊山 在縣北五里 昌原佛母山來
웅산은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불모산에서 왔다.

2) 병산屛山
屛山 在縣北一里 熊山來
병산은 현 북쪽 1리에 있으며 웅산에서 왔다.(중략)

3) 웅산신당熊山神堂 
熊山神堂 在山頂 土人每四月十月 迎神下山 必陳鍾鼓雜戲 遠近爭來祭之
웅산신당은 산 정상에 있다. 지방 사람이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서 내려와 반드시 꽹과리와 북을 치며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는데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앞다투어 와서 제사한다. 

 

웅천현 읍지 - 순조 32년(1832)

2. 웅천현 읍지 - 순조 32년(1832)
 [原文]

山川

熊山 在縣北十里 爲本縣主山 上有奇巖 高十餘丈 周五十餘丈 上可坐三十餘人 屹然特立 名曰天子峯 一脉西走 爲安民嶺 又西走 爲長福山 逶迤西北 爲馬也嶺 又西入海 爲降仙臺 而山形陡起 作臺 與昌原月影臺 隔浦相望 俗稱孤雲先生崔致遠 乘舟弄月 邀遊於此 故名曰降仙臺 自馬也嶺 又一脉走西南 爲高山 上有烽燧 自高山 落 脉走西南 爲飛巖洞 而有盤石 上可坐五十人 清流作瀑 素沫飛空悦 若飛雪 故曰飛巖洞 天子峯一脉 橫落西南 爲望雲臺 自望雲臺 一支借落 又陡起 爲屏山 而形如屏 故名曰屏山 爲邑基主脉 自望雲臺 又一脉轉轉 起作沙火郎 烽燧回抱 薺浦鎮 餘脈東走 回作南山 而古 有三峯 岌然競秀 倭奴入寇 陵夷三峯 仍作墟址 登臨則馬島入眼底 其外則萬里滄溟而已 趙相公顯命 閔相公百祥 以方伯巡到 登臨歎 日 奇哉形勝 此乃南藩之腹部 古之薺浦水營 儘此設也 自天子峯 脉東走 爲八阪洞 自八阪洞 走東南 爲窟菴 又走下東南 爲栗峴山谷 而谷水合流 入巖石間 作瀑布 數十丈 分三派直下 爲龍湫 其深無底 人謂之湖南將旱則西派渴 嶺南將早則東派渴 湖西將旱則中派渴以 驗水旱 自栗現 一脉走下東南 爲主浦 自主浦 西去 爲夫人堂 駕洛 古史云 首露王 建國之初 阿嬌陀國王 遣公主許氏 乘石舟而來 王迎 於主浦 因以爲后 故曰主浦及夫人堂 夫人堂後麓西去 作灣回抱 晴 川安骨新門 列在其內

 

[국역]

웅산熊山은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본 현의 주산이다. 산꼭대기에는 기이한 바위가 있다. 높이는 10길 남짓이고 둘레는 50길 남짓 되며 바위 위에는 30인 넘게 앉을 수 있다. 우뚝하게 홀로 솟아 있어서 천자봉天子峯이라 부른다.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안민령安民嶺이 되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장복산長福山이 되었다. 굽이쳐서 서북쪽에 마야령馬也嶺이 되고, 또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며 강선대降仙臺가 된다. 산 형세가 우뚝 솟아서 강선대가 되었는데, 창원의 월영대(月影臺)와 바다 너머로 서로 바라본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배를 타고 달을 좋아하여 이곳에서 달맞이하고 노닐었기 때문에 강선대라 불렀다한다. 마야령에서 또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 고산高山이 되었다.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다. 고산에서 뻗어 내린 줄기가 서남쪽으로 달려서 비암동飛巖洞이 된다. 비암동에 너럭바위가 있어서 바위 위에 50인이 앉을 수 있고, 맑은 물줄기가 폭포가 되어 하얀 물방울이 하늘로 날면 마치 눈이 날리듯이 황홀하여 비암동이라 한다. 천자봉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비껴 떨어지며 망운대望雲臺가 된다. 망운대에서 한 줄기가 내려갔다가 다시 갑자기 솟아나며 병산屏山이 된다. 모양이 병풍 같아서 병산이라 하였고, 읍성의 주맥主脈이 된다. 망운대에서 다시 한 줄기가 돌고 돌아 솟아서 사화랑산沙火郞山이 되고 사화랑산 봉수대를 돌면 제포진薺浦鎭이다. 제포진의 남은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돌면 남산南山이 된다. 예로부터 세 봉우리가 있어서 높이 솟아 수려함을 다투었는데, 왜놈들이 쳐들어와 세 봉우리를 깎아서 언덕이 되어버렸다. 산 위에 올라 굽어보면 대마도對馬島가 눈 아래에들어오고, 그 밖으로는 만리나 되는 넓은 바다이다. 상공相公 조현명趙顯命과 상공 민백상閔百祥이 방백方伯으로 순행하면서 올라와 굽어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기이하구나 형승이여! 이곳이 바로 남쪽 변방의 복부라서 옛적 제포 수영水營을 다 이곳에 설치하였구나하였다. 천자봉에서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팔판동八阪洞이 되고, 팔판동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가 굴암산窟菴山이 되고, 또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가서 율현산栗峴山 골짜기가 된다. 골짜기 물이 합류하여 바위 사이로 들어가서 폭포가 된다. 폭포는 수십 길이고 세 갈래로 나뉘어 바로 떨어지는데 용추폭포龍湫瀑布이다. 폭포가 깊어서 바닥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남이 가물려고 하면 서쪽 물줄기가 마르고, 영남이 가물려고 하면 동쪽 물줄기가 마르며, 호서가 가물려고 하면 가운데 물줄기가 말라서, 물줄기로 홍수와 가뭄을 알 수 있다.”라고 한다. 율현에서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주포主浦가 되고, 주포에서 서쪽으로 가면부인당夫人이다. 가락駕洛 고사古史, 수로왕首露王이 나라를 세운 초기에 아유타阿喩陀 국왕이 허씨許氏 공주를 보냈다. 돌배[石舟]를 타고 오자 왕이 주포에서 맞이하여 왕후를 삼았기 때문에 주포 및 부인당이라고 한다. 부인당 뒷 기슭에서 서쪽으로 가서 물굽이를 돌면 청천·안골·신문진이 그 안에 나란히 있다.

 

1910년 이전 완성한 조선지지자료

3. 조선지지자료 1910년 마산군

『朝鮮地誌資料』는 1910년 이전 일제항쟁기(강점기)에 왜구들이 토지조사를 통하여 국토 찬탈을 목적으로 우리 산야와 마을 이름 등을 사전 조사한 자료이다. 이 자료에 처음으로 "甑峯증봉"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일명 "天子峯천자봉"이라는 글과 함께 우리말 "시리봉"이라는 명칭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항쟁기 이전의 조선의 기록에는 천자봉, 천자암, 웅암, 웅산 등의 기록 외는 다른 기록은 없다. 결론적으로 증봉, 시리봉 등은 일제가 기록한 문서라는 것이다.

 

4. 경상남도 지명조사철
1) (B210)지명조사철_20_진해시
단기 4292년 4월 28~단기 4292년 5월 30일(1959 승인)

지명 종류 지도상기재 유래 로마자
천자봉 증암산 ()천자가 이 산봉에서 나왔다는 전설을 따서 천자봉이라 칭한다. CHEONJABONG
天子峯 증산 chang am san

 

지명 종류 지도상기재 유래 로마자
시리바위 바위   바위 모양이 시리 모양이니 시리바위로 부른다. CILIBAWI
甑岩

 

2) (B210)지명조사철_22_창원군
단기 4292년 4월 28~단기 4292년 5월 19일(1959 승인)

지명 종류 지도상기재 유래 로마자
웅산 곰산 중음산 산세가 곰혈(熊穴)이라하여 곰산으로 불리며 웅산은 한자 표기명이다. UNJGSAN
熊山    
지명 종류 지도상기재 유래 로마자
천자봉 부자봉 전설에 의하면 주원장이 이곳에서 탄생하여 명나라 천자(明國天子)가 되었다고 하여 천자봉이라고 널리 불리고 있다. BUJABONG
天子峯 증산  
지명 종류 지도상기재 유래 로마자
증암 시리바위   곰산 꼭대기에 높이가 30척 넓이가 주위 40척 되는 거암으로서 그 모양이 시리와 같다하여 시리바위로 불리며 한자표기 명칭이다. CIRUBAWI
甑岩
 
 
<<참고>> 고지도의 기록
 

1872년지방지도 웅천
광여도 웅천
해동지도 웅천

 

[[현재 엉터리 표석의 모습]]

웅천 시루봉⇒웅암熊巖 천자봉으로 바꿔야 함 웅천 천자봉⇒망운대望雲臺로 바꿔야 함

 

5. 웅천현 읍지의 기록과 1959년 지명조사철의 내용
웅천현 읍지의 내용을 볼 때 웅산熊山의 정상에 웅암熊巖이 있고 이 웅암은 『높이는 10길 남짓이고 둘레는 50길 남짓 되며 바위 위에는 30인 넘게 앉을 수 있다. 우뚝하게 홀로 솟아 있어서 천자봉天子峯이라 부른다.』고 하여 웅산의 정상이 천자봉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일제를 겪은 후 해방은 되었지 만 일제의 영향이 남았음을 볼 수 있는 내용이 1959년 지명조사철에 나타나는데 웅암熊巖을 증암甑岩이라 인식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웅암熊巖, 웅산熊山 등의 기록은 나타나지만 증암甑岩이라는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증암甑岩이라는 산 이름의 기록은 일제점령기 이후에 우리나라 곳곳에 많이 나타난다. 당장 1959년 지명조사철의 창원 진북편에도 증산甑山, 시루봉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1959년 지명조사철 진해와 창원의 내용 보면 시리바위와 천자봉이 동일한 것을 말하는지 다른 곳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반면 웅천현 읍지의 기록은 명확하다.
현재의 정밀도로지도에도 시루바위와 웅암의 위치가 달라 믿을 수 없고 웅천현 읍지에서 말하는 망운산望雲山 또는 망운대望雲臺의 기록이 없다. 망운산은 산맥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위치인데 이러한 분기점을 지도에서 뺀다는 것은 뭔가 오류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해동지도, 광여도, 1872년 지방지도, 대동여지도 등에도 등장하는 망운산이 현재의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이 지금의 천자봉 표석을 세운 곳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일제점령기 이후에 나타나는 지명으로 인한 오류는 웅천현 읍지의 기록대로 되돌려야 한다.

지금의 오류도 공무원이 지명고시를 할 때 챙기지 못한 것이지 나라의 주인이 잘못한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