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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송담서원과 표충사

천부인권 2023. 9. 3. 10:32

2009.8.23.김해 사충단과 경앙문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 사충단(四忠壇)은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2-9(동상동 161)에 위치하며, 분산성(盆山城) 우측 계곡에 있다. 사충단은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김해부성(金海府城)을 지키다 전사한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류식(柳湜)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8년(1871) 왕명으로 건립한 묘단이다.
1995년 송담서원松潭書院과 표충사表忠祠를 국도시비(國·道·市費) 약20억원을 들여 복원했는데 비각 이외의 건물은 모두 신축하였다. 비각은 주심포식(柱心包式) 겹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네 명의 충신을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에 향례享禮를 지내고 있다.

 

2009.8.23.김해 사충단과 송담서원

주련 柱聯

崇德齋(東齋)柱聯 숭덕재(동재)주련
雅趣寓雲霞千峯 우아한 취미는 구름과 노을처럼 천개 봉우리에 머물렀고
素樂在詩書六德 평소 즐기는바 그 덕은 시서詩書와 육경에 두었노라.
臨大難而辦熊魚 큰 환난에 임하여는 삶보다 먼저 의를 취하나니
因一殉而報王國 한 번의 순절로서 나라와 임금님께 은혜 갚았네.
秉彝者崇慕罔諼 떳떳한 도리를 숭모하는 자들이여 잊지 말지어다

明義齋(西齋)柱聯 명의재(서재) 주련
樹危節於龍蛇百㤼 백겁의 위기 임진란에 높은 절의 세웠으니
闡芳蹟於竹帛千春 꽃같이 드러낸 그 행적 청사에 영원하리.
慕義焉復院宇崇祀 의기 흠모함에 서원 다시 세워 제사 받들고
遺什焉見日月貞忠 남긴 서서 뵈올 때면 곧은 충심 일월 같네.
景仰高風窮宙勿替 우러른 높은 뜻 우주 다하도록 끝남 없으리.

 

2009.8.23.김해 송담서원
2009.8.23.김해 송담서원 편액

松潭書院重建記
粵昔壬辰島夷之訌 金官之府首先受禍 大伽倻千年古都之巖臺文物 殆歸烏有 蓋其地接萊晋 爲賊路要衝勢固然矣 于是時也 府中之士 莫不慷慨瀝血掩卷張弓起 而抗之而有若 宋公賓李公大亨金公得器柳公湜 其尤也 亂作府使徐禮元大懼 授宋公以中軍都摠之任 李金柳公則俱任守門 宋公夜出城與敵交鋒斬首數百級 追至竹島所殺甚衆 無何賊船蔽洋 禮元鼠竄四公猶自閉守孤城招募殘兵諭 以大義衆皆泣從 始終抗戰一時併命 嗚呼烈哉 是則世所稱四忠者也 朝廷屢贈爵宋柳二公為吏曹參判 李金二公戶曹參判 肅宗戊子 府西歌谷始建曰 表忠祠宋公獨享 英祖辛酉戊子 混報戊戌之毁撤 正朝甲辰 龍蹄山之北瞻星臺之南 再建祠曰 松潭追祀李金三忠 純祖元年辛酉令院宇撤 純祖甲申 密陽安景齊等道內二十五邑數百儒林復元上疏之復 設院號松潭書院松潭祠也 純祖癸巳 遣朝臣賜額表忠于文物致祭 高宗戊辰院又撤越七年辛未 府使鄭顯奭設四忠壇 於東上洞 追祀柳公乙酉光復後庚午 市長宋銀復從儒林意創書院復設事業 于盆城山之南 龜旨峰之東 今市長安斗煥嗣厥後 而擔其役至今茲乙亥春 將落之有日矣 其更動至數十億 國與道市併力以擧焉 安君乃以四忠實記 及復設事業原委請余就据 而爲之記 噫壬辰之事尚忍言哉 顧當時參政者 蕒不自懲 有黨無國數百載之後 乃有庚戌之奇耻大辱 我國先輩聰明博識如丁俟菴若鏞猶謂 日本文明之國 不爲侵略之事 然淺意則大不然也 余嘗與人論 日本事輒云 日本自有二大患地震也 陸沈也 雖以尖端科學原子强梁莫之誰 何故其人侵略之心暫 不鞘熄其對象 則我邦爲最隔一衣帶也 人多以爲此山野間 一種迂怪之士之談付之一笑 然是非祀憂乃婆心也 余覼縷於斯文者 金海之士受難之若 抗敵之忱不遜 於萊晋如四忠者 自是我民族之英雄 想厥當日操吳戈 而唱楚歌怒髮指天瞋目如炬死爲國 殤永爲嶺海守護之神 則不第青矜之士 俎豆牲酒以享之禮成之後邀 南方大巫登貝塚之巔 唱龜何之歌臨洛江之流 和羌羌水越來之謠 以慰我四忠諸公之靈 未始無可也
是歲 正月望後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撰

송담서원 중건기
지난 옛날 선조 임진년(1592년) 섬 오랑캐의 난리에 김해 고을이 첫머리로 먼저 재앙을 받았으니 금관가야金官伽倻 천년고도의 유적과 문물이 거의 오유烏有¹⁾로 돌아갔으니 대개 그 땅이 동래東萊와 진주晋州에 가까워 적의 지나는 길 요충이 되어 형세가 본래 그러한 것이었다.
이때에 김해 고을의 선비로서 비분강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고 피를 뿜고 책을 덮고 활을 당기며 일어나 그들에게 항거했으니 송빈(宋公賓)、이대형(李公大亨)、김득기(金公得器)、유시(柳公湜)가 더욱 저명한 분이다.
왜란이 일어나자 부사 서례원徐禮元은 크게 두려워하여 송공宋公에게 중군도총中軍都摠의 임무를 주고 이、김、류공柳公에게는 함께 수문장의 임무를 주었다. 송공柳公이 밤에 성문을 나가 적들과 교전하여 적의 머리 수백 수급을 베고 추격하여 죽도竹島까지 가서 죽인 적이 매우 많았다.
얼마 후에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예원禮元은 쥐처럼 도망가고 네 분이 아직 스스로 외로운 성城을 닫아 지키며 나머지 군사를 불러 모아 대의大義로 깨우치니 모두가 울며 따라 시종일관始終一貫 항전하다가 동시에 목숨을 버렸으니 아아 매섭구나! 이들이 세상에서 일컫는 4충신이다.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려 송공宋公、류공柳公에게는 이조참판을、이공李公、김공金公에게는 호조참판을 내렸다.
숙종 무자(1708)년에 비로소 부 서쪽 가곡歌谷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송공을 향사享祀하였다. 영조 신유(1741)년 표충사가 무자(1708)년에 세워졌으나 무자戊子를 무술戊戌로 잘못 혼동하여 보고하는 바람에 훼철毁撤 대상이 되어 훼철되었다. 정조 갑진(1784)년 용제산龍蹄山 북쪽、첨성대瞻星臺 남쪽에 다시 지어 사당祠堂을 송담사松潭祠라 하고 이공李公、김공金公을 추향追享하여 삼충신三忠臣이 되었다.
순조純祖 원년 신유(1801)에 순조의 명령으로 훼철되었다. 순조 갑신년(1824)에 밀양 안경재安景齋 등 도내 25읍 수백 유림儒林들의 복원 상소上疏로 다시 복설復設되 고 사당의 이름을 올려 송담서원松潭書院 송담사松潭祠라 하였다. 순조 계사년(1833)에 왕이 조정의 신하를 보내어 송담사를 다시 표충사로 사액賜額하고 제문祭文과 제물祭物로 치제致祭했 는데 고종 무진년(1868)에 서원이 또다시 훼철되었다.
고종 신미辛未에 부사府使 정현석鄭顯奭이 김해부 현재의 동상동東上洞에 사충단四忠壇을 만들어 유공柳公을 추가하여 향사享祀하였다.
을유년 광복후 경자년(1990)에 시장 송은복宋銀復이 유림의 뜻을 따라 서원복설하는 사업을 분성산盆城山 남쪽 구지봉龜旨峰 동쪽에 처음 시작하니 지금 시장 안두환安斗煥이 일을 이어받아 그 공사를 담당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금년 봄에 낙성할 것이니 시일이 남았다. 그 경비가 수십억 원에 이르고 국비、도비、시비로 합력하여 거행擧行된 것이다.
안군安君이 곧 사충실기와 복설사업 개요를 제시하고 나에게 맡겨 기문記文을 청한다 아아! 임진壬辰의 사실을 더구나 차마 말하겠는가? 당시를 회고한 건데 대신大臣들이 어리석어 스스로 징계하지 못하여 당파黨派만 있고 국사가 없었으니 수백 년 후에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대욕大辱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배 석학碩學으로 총명박식한 사암俟庵 정약용丁若鏞 같은 이도 오히려 이르기를 「일본은 문명文明한 나라로 침략 같은 일은 않을 것이다」하였는데 그러나 나의 천견淺見은 크게 그렇지 않다. 내가 일찍이 일본의 일을 어떤 이와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문득 말하기를「일본은 스스로 두 가지의 환란을 가졌으니 지진과 육지 침몰이다. 비록 첨단과학과 원자력 강국이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침략할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을 것이요 그 대상은 우리나라이니 가장 가까운 일의대수一衣帶水²⁾인 관계이다」하였다.
남들이 많이 나를 산야간山野間 일종一種의 우활하고 괴이한 자의 말이라 여겨 일소一笑에 붙이고 있으나 이는 쓸데없는 걱정[杞人憂天]이 아니고 곧 노파심老婆心인 것이다.
이제 내가 이 글을 자세히 보는 것은 김해의 의사義士들이 난리에 받은 고통과 적에게 항거한 정성이 동래의 혈전血戰이나 진주의 함락보다 덜하지 않고 사충신四忠臣같은 이들은 스스로 우리 민족의 영웅이라 할만하다. 그때 당시를 상상컨대 오국吳國의 창을 잡고 초楚의 군가軍歌를 부르며 성난 머리털이 하늘에 치솟으며 성난 눈빛이 횃불 같았으리라.
주인이 함께 죽어 영원히 영남의 수호신이 되었으니 다만 청금靑衿의 선비가 제기[祭器:俎豆]와 제물祭物[희생과 술]로 향사하는 일뿐만 아니라 예가 이뤄진 후에 남방南方의 큰 무당을 불러 패총貝塚의 언덕에 올라 「구가龜歌 구가龜歌」의 노래를 부르고 낙동강 흐르는 물가에 임하여 손을 잡고 「강강强羌 수월래水越來 [강한 오랑캐 물 건너온다]」 노래를 불러 우리 사충신四忠臣 여러 공들의 영령英靈을 위안하며 옳지 못함이 없으리라.
을해(1995년) 정월 보름 뒤에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李家源 삼가 지음.

【주석】
오유烏有¹⁾ : 어찌 있겠는가 혹은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사물이 불에 타거나 하여 아무것도 없게 됨을 이르는 말.
일의대수一衣帶水²⁾ : 한줄기의 띠와 같은 작은 냇물이나 강물

 

松潭書院重建上樑文
效立瑾於亂時勳勣宜垂竹帛 樹風烈於窮宙崇慕彌虔樽蘋 院宇重新 江山增彩 恭惟死節臣宋公李公金公柳公四先生 簪纓世家 金州望族 瑚璉其器推重儒苑之前茅 松筠其姿雅抱蓬矢之初志 承襲父祖之典訓俱得文武全材 慷慨氷雪之清矜素養忠義壯節 奄値穆陵龍蛇之厄 忍看蠻醜魍魎之侵 朝野腥羶 民生魚肉 泣誓天而報國 羌挺身而殲夷 倡義旅而掌中軍 嚴號令而奮隻手 萬虜之猖獗射螫 勢若風雨孤城 一朝之凶鋒所過全無人烟白屋 此捐軀傚忠之日 豈顧家圖生之辰 冒九死而籌神謀 激殘卒而抗强寇 奈將星之遽隕 歎時運之不祥 稟乎毅魄雄風 參元氣而不滅 痛矣遺衣寒骨招靑山誰藏 可爲文弔戰場讀其遺什而人無不涕 肆贈爵獎義魄昭諸錄券而邦有常規 非二品之嘉秩爲榮 寔百世之公議有蔚 遂立祠而尊奉 永樹風而起興 聖朝之賜祭慰忠所以輿論不悅 熙寧之大同撤院堪歎畏壘旋墟 風馬雲旂不知彷徨於何處 石壇俎豆久齎慨鬱於群情 何幸政府之捐助鉅 貲重營院廟之肯構新址 如有神明默佑 遽見輪奐告功 燠室凉堂允宜濟蹌盛服 月楹風檻宛爾陟降精靈 世雖變於滄桑不忘忠義之烈 人皆同於彝性庶見懦立之風 乃先人之記狀已明 豈末學之贅述復演 勗哉溯前啟後 悠然感古傷今 茲唱六偉之謳 用助雙欐之擧 兒郎偉抛樑
東 神魚山屹瑞暾紅 貞忠百世咸加額 挺出南方幾個雄
西 望裏龜峰夕照低 往事蒼茫無問處 荒烟古木鳥空啼
南 伏劒誓天敵愾男 隱隱滄波江渚上 當時想像戰雲酣
北 大地妖氛城蝶黑 未滅讐夷身死國 天長地久何恨極 
上 掃盡殲雲玉守曠 莫恨當年攻未酬 丹心碧血義無爽
下 四忠偉蹟垂千禩 彝衷好德同官民 到此孰無激仰者
伏願上樑之後 神祗護而院宇固 松嶽拱而地勢安 壯芳魂於萬年人勵忠義之道 驅妖雲於四海世興綱常之銓 襟佩孔和 牲芬不替
歲在 乙亥 仲春 後學 李雨燮 謹撰

송담서원 중건 상량문
임란 때 순절로서 본보기를 세우니 그 공훈功勳이 청사靑史에 마땅히 빛날 것이며 우주가 무궁토록 기풍氣風·의열義烈 세우니 숭의崇義하는 정성 더욱 제기祭器¹⁾에 경건하여 서원書院 집을 새로 중건하니 강산江山에 정채精彩 더하네. 공손히 생각하니 사절신死節臣 송공, 이공, 김공, 류공 4선생은 누대로 벼슬한 집안이며 김해의 명망 잇는 세족이었다. 호연瑚璉 같은 제기祭器로 받들어 존중하는 유림의 앞길을 인도함이요 송죽松竹의 자세로 우아한 생래生來²⁾ 같이 처음부터 뜻을 두었다.
부모와 조상의 전범교훈典範敎訓³⁾으로 문무의 온전한 재주 함께 얻었고 비분강개悲憤慷慨⁴⁾하며 빙설氷雪처럼 많은 지조는 평소에 기른 충의의 장한 절개였다. 문득 선조宣祖 임진난의 액운을 당하여 오랑캐의 침범을 차마 보겠는가? 조정과 백성이 살육의 비린 냄새를 맡았으며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었도다. 하늘에 맹세하여 나라에 보답하고 몸을 던져 오랑캐를 섭렵하리라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을 맡아 호령을 엄히 하여 한 손을 번쩍 들었네. 수십만 오랑캐 창궐하여 독충毒蟲의 형세 외로운 성에 비바람 같고 한때의 흉측한 왜놈 지난 곳엔 사람 자취가 전혀 없구나! 이 한 몸 나라에 던져 충성을 본받는 날 어찌 집안 돌아보며 삶을 꾀할 때이랴. 구사九死⁵⁾를 무릅쓰고 신책神策을 꾀하여 잔약한 군졸 격려하여 강한 왜적에 항거했네. 어쩌리요? 장성將星이 문득 떨어지니 때의 운수가 불길함을 한탄할 뿐이로다.
늠름하도다. 굳센 넋 영웅다운 풍모여! 통분하도다. 남긴 옷과 차가운 골편骨片들! 원기元氣에 동참하여 장한 넋이 불멸不滅하리니、전장戰場을 조상하는 글 지을 만하고 그 죽음 뒤의 시詩를 읽어 눈물 흘리지 않을 이 없어, 이러므로 벼슬 더하여 외로운 넋을 장려하여 공신록권功臣錄券에 밝혀 드러냄은 국가의 일정한 규칙이다. 삼품二品의 좋은 벼슬 영예로움 아니요 실로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이 무성하도다. 드디어 사당祠堂 세워 향사를 받들고 길이 미풍美風 세워 죽은 후의 생을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게 한다.
어진 왕이 다스리는 조정에서 제사를 내림은 여론이 크게 기뻐함에 의한 것이요 대원군大院君이 대동大同으로 서원 철폐하니 높은 진을 친 보루는 도리어 폐허 될까 한탄스럽다. 바람처럼 빠른 말과 구름 같은 깃발들은 어디에 방황하는지 알 수 없고 돌단 모아 제사함은 분개 울분한 모든 이의 마음에 의함이었다. 무슨 다행으로 정부가 분한 거액으로 도와 사당집을 다시 경영하여 새 터에다 집을 지었으니 신명神明이 말없이 도운 것 같고 문득 공역工役 끝나 훤히 빛나네. 따뜻한 방 서늘한 마루며 달 뜨는 기둥, 바람 부는 난간에 진실로 제관祭官이 옷을 갖춰 걸어 나오듯 완연히 정령精靈 내리신 듯하네.
세상이 비록 상전벽해桑田碧海⁶⁾로 변해도 충의忠義의 열烈은 잊을 수 없고 사람은 모두 타고난 성품이 같기에 나약한 선비 일어서는 기풍氣風도 볼 수 없네. 이에 선인先人들의 기록 행장行狀에 이미 밝혔으니 어찌 말학末學인 내가 군더더기로 다시 더 말하리요? 힘쓸지어다. 지나버린 앞 시대를 소급하여 다음 생을 열어주오. 내 마음 끝없구나 옛날에 감개하여 슬픈 지금의 일이여!
이에 6방향 들보 올리는 노래 불러 쌍들보 올리는 거동을 돕는다.
어영차! 들보를 동쪽에 얹으며, 곧은 충성 백년 토록 다 편액扁額 붙였으니 신어산神魚山 우뚝 높아 서일상운瑞日祥雲⁷⁾ 붉어 있고 남방南方에 몇 분 영웅 뽑혀나게 하였던고?
어영차! 들보를 서쪽에 얹으며, 바라보는 구지봉龜旨峯에 저녁 햇살 낮아지니 지난 일 아득하여 물을 곳이 가이없네. 저녁연기 고목古木 위에 묏새들만 지저귀네.
어영차!  들보를 남쪽에 얹으며, 칼을 집고 하늘에 맹서한 적개심 불탄 용사勇士 은은한 바다 물결 낙동강 모래펄에 당시를 상상하니 전운戰雲이 짙었으리.
어영차! 들보를 북쪽에 얹으며, 벌판에 요기妖氣 어려 성첩城堞에 검은 왜병 원수 왜병 멸하지 못하고 국난國亂에 몸죽으니 천장지구天長地久⁸⁾ 긴긴 세월 한恨이 어찌 다 하리오?
어영차! 들보를 위에 얹으며, 솜털구름 다 쓸어내니 하늘이 비었구나! 이 해에 높은 공을 못 갚았다 한탄 마오. 붉은 심장 시뻘건 피 의리에 변함없네.
어영차! 들보를 아래에 없으며. 사충신四忠臣 높은 행적行蹟 천년에 남으리니 타고난 좋은 덕성德性 군관민 함께 하여 이에 순국하니 누가 격앙激昂하는 자 없으리!
엎드려 원컨대 들보 올린 뒤에는 신명神明이 보호하여 서원 집이 공고하고 송악松嶽이 떠받들어 지세地勢를 안정하소서.
장하구나 꽃다운 넋은 만년토록 지키시어 사해四海에 요기妖氣의 구름을 몰아내소서 사람마다 츙의忠義의 도덕道德 장려하고 세상의 도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참된 깨달음 일으키어 선비들은 크게 화목하고 재유祭需는 향기로워 쇠衰하여져서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마소서. 
1995년 3월 후학 이우섭李雨燮 삼가 지음

【주석】
제기祭器¹⁾ : 제사에 쓰는 그릇 조두俎豆를 말한다.
생래生來²⁾ : 상호봉시桑弧蓬矢을 뜻하며 “남자가 큰 뜻을 세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살로 천지 사방에 쏘아 큰 뜻을 이루기를 빌던 풍속에서 유래하였다.”
전범교훈典範敎訓³⁾ : 본보기가 되거나 행동이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경험적 사실
비분강개悲憤慷慨⁴⁾ : 슬프고 분憤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음.
구사九死⁵⁾ : 「아홉 번 죽음」의 뜻으로, 죽는 것을 강하게 표현한 말.
상전벽해桑田碧海⁶⁾ :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서일상운瑞日祥雲⁷⁾ : 상스러운 날 상스러운 구름이 보임
천장지구天長地久⁸⁾ : 하늘만큼 길고 땅만큼 오래되다. 하늘과 땅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다. (애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表忠祠重建記
半島란 地理的 條件으로 因하여 韓日 兩國 間에는 一衣帶水의 近隣關係가 形成되고 歷史的·文化的 關係交涉이 和戰兩面으로 頻數하였던 것이다.
壬辰倭亂은 日本이 武力으로 侵入하여 와서 七年間 江山을 유린하고 無辜한 生民을 殺戮한 戰亂을 말한다. 李太祖 建國 以來 二百年의 平和가 계속 되고 文運의 隆盛을 보게 되었으나 反面에 南船 北馬의 半島國家를 守護할 수 있는 國防施設과 養兵의 重要性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有國者는 文武 兩面道를 如車二輪으로 想起할 때 李栗谷 先生의 十萬 養兵說은 先見의 明이라 할 것이다.
平和가 계속되면 黨論이 있기 마련이니 國力의 튼튼한 背景 없는 黨論의 分裂은 一朝 有事時에 否塞한 國運을 打開하기 어려운 것이다. 壬辰倭亂은 이러한 敎訓을 提示하고 있다. 日本의 경우는 平安朝 末期부터 武臣이 專權하여 鎌倉幕府 室町幕府 戰國時代로 이어지다가 豊臣秀吉이 다시 武力에 의하여 統ㅡ을 이루었으나 馴致된 武人의 殺伐한 氣質은 十六世紀 西力東漸의 風潮를 타고 戰術上 鳥銃 使用의 新戰法이 導入되어 國力安定을 위한 海外進出을 試圖하게 된 것이니 平和的 交隣策을 講究하던 우리에게는 名分없는 黷武의 날벼락을 안겨 주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矢石間에 사생을 결정하던 日本은 九軍과 水軍을 合하여 二十萬의 大軍을 九州名護屋에 集結하고 敵將 小西行長의 第一軍이 釜山에 侵入하여 온 것은 壬辰 四月 十三日이었다. 十四日에 戰鬪開始로 釜山城이 陷落되고 十五日에는 東萊城과 多大鎭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緒戰의 싸움은 勇敢하였다. 釜山 僉使 鄭撥公은 武人답게 싸우다가 烈한 戰死를 하였고 東萊 府使 宋象賢 公은 문관답게 毅然히 殺身成仁의 大義에 殉하였으며 多大僉使 尹興信 公도 最後까지 孤城을 지키다가 殉節하였다. 그러나 金海城의 경우는 다르다. 賊將 黑田長政의 第三軍은 洛東江을 따라 金海城으로 侵攻하매 主倅의 決心이 動搖되어 城을 버리고 떠났으니 설사 徐府使가 晋州에서 捲土重來하였다 하더라도 棄城의 허물을 어찌 免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四忠의 忠節은 실로 훌륭하였다.
宋公 諱 賓、李公 諱 大亨、金公 諱 得器、柳公 諱 湜은 모두 이 고장 士人의 後裔로 城主 떠난 古都를 白衣의 身分으로 限死코 固守하여 李 郭의 忠을 다하다가 落城과 함께 巡遠의 節義를 함께 하였으니 아 아 日月은 四公의 殉節을 높이 揭揚하였으나 風雲은 길이 四公의 殺身한 슬픔을 띠고 있으니 四公의 盡忠報國이 없었다면 金寧의 하늘 아래 丈夫의 氣像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랴, 國殤은 祭하여야 하고 正氣는 昇華繼承되어야 한다. 朝家의 恤典은 忠魂을 위로하고 祠院의 香火는 四公의 誠忠을 哀慕함이니 壯한 일이다. 四公의 忠義를 기리는 鄕人의 뜻을 따라 宋銀復 전 市長이 發議하고 金榮馹 國會議員의 協助를 받아 盆山城下 白虎燈에 表忠祠를 重建하니 安斗煥 現 市長은 市政의 先務가 바로 이에 있음을 認識하고 盛意를 다하여 이 일을 推進시키니 院制를 添加한 祠宇가 輪奐도 새롭게 洛城될 것인바 不肖에게 그 記文을 要請하므로 三讓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이에 文化院刊의 四忠實記와 他 關係 記錄을 參考하여 前後大綱을 略述하는 바이다.
西紀 一九九五年 三月 日
文學博士 丁仲煥 謹記

 

表忠祠上梁頌
宣朝龍蛇之亂禍 尚忍言哉 强寇猖獗 若風霆 國之存亡 在於呼吸 當此之時 能以一死報國 而爲八路忠臣義士倡者 曰金海 有清州宋公賓 月城李公大亨 義城金公得器 文化柳公湜四先生 以眞純儒學之資 用忠貫白日之誠 凡所 出戰 有偉略奇勳 及其勢窮力盡 無可奈何之日 向闕龥衷 從容就義 君子偉之 事載金海邑誌 及四忠實記 有安順菴許性齋 證實之記 士林陳情于國道市 建四忠祠宇于金海盆城山下 今年乙亥新正 金海市長安斗煥 來余請 上梁頌 余以耄荒 辭拙 始辭而卒不獲 略圖上下四方 助舉修梁 
梁之東 江淮河漢會祖宗 正如名祖高居上 萬子千孫景仰同 
梁之南 明月山前大野涵 依劍西風天下少 彈丸馬島不須談 
梁之西 駕洛大王始降墟 往事昭然如日月 至今奇迹煥藏書 
梁之北 烈士高名齊北極 歷數古今臨大難 從容就義誰其敵 
梁之上 先天日月明頭上 也知當日裸將筵 多士如雲同景仰 
梁之下 祠前日日盈車馬 濟濟蹌蹌會承堂 綱常大義相磋磨 
伏願上梁之後 雨順風調棟宇無百代之患 春絃夏誦 士紀無萬世之弛 豈但爲一方之士虔齊 抑亦使天下之人警顧

乙亥 新春 盆城 許泂 謹撰

표충사중건상량송
선조宣祖 임진壬辰의 화난禍亂을 더구나 차마 말하겠는가! 강한 왜적이 창궐하니 형세가 폭풍과 우레 같아 국가의 존망存亡이 호흡呼吸(순식瞬息)하는 사이에 있었는데, 이 때를 당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으로 팔도의 충신忠臣 의사義士 주창자主唱者가 된 이로, 김해에 청주송공淸州宋公 빈賓、재령이공載寧李公 대형大亨、의성김공義城金公 득기得器、문화류공文化柳公 시湜와 같은 네 선생이 있었으니, 참되고 순수한 유학의 자질로서 밝은 해를 꿰뚫는 충성忠誠으로 무릇 나가 싸울 때에 위대하고 신기한 공훈을 이루신 분들이다.
그 형세가 꺾이고 힘이 다하여 어쩔 수 없는 날에 이르러는 대궐을 향하여 충심衷心을 호소한 시詩를 짓고 조용히 삶을 버리고 정의正義를 취해 나아갔으니, 군자君子들이 이를 옳게 여겼다.
사적이 김해읍지金海邑誌와 사충실기四忠實記에 적혔고、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사실을 증거하여 기록하였다.
선비들이 나라와 도道、시市、군郡에 진정하여 표충사表忠祠 사우祠宇를 김해 분선산盆城山 아래에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금년 을해乙亥 신정新正에 김해시장金海市長 안두환安斗煥이 나에게 와서 상량송上樑頌을 청하기에 내가 늙고 거칠며 말이 모자라 처음에는 이를 사양했으나 끝내 동의를 얻지 못하여 대략 지세地勢 상하上下 사방四方을 살펴 보 올리는 거사擧事를 돕는다.
들보의 동쪽에 강江、회淮、하河、한漢(사독四瀆) 강물들이 조종祖宗 바다 모여드니 이름난 조상이 높이 앉아 만자천손萬子千孫 존경함과 똑바로 같으시고!
들보의 남쪽에 명원明月山 앞 큰 들판 퍼진 칼 집고 서풍西風에 우뚝 서니、천하가 작게 보여 대마왜도對馬倭島 콩알만하여 말할 것 가이없네.
들보의 서쪽에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탄강하신 구지봉龜旨峯에 지난 역사는 해와 달처럼 환하게 밝아 지금까지 신기한 이적異蹟 역사책에 빛나구나!
들보의 북쪽에 열사烈士들 높은 이름、북극성北極星에 나란하니 역수歷數 따른 고금古今에 없었던 흥망의 전쟁을 만났는데, 조용히 목숨을 걸고 의리를 좇는 이 누가 그를 맞서리까?
들보의 위쪽에 태초太初의 해와 달도 분명히 머리 위에 밝아 있어 알리라、그날의 강신降神하던 그 자리에 많은 선비 운집하여 의기義氣를 격앙하네.
들보의 아래쪽에 사당 앞에 나날이 차마車馬가 가득하니 수많은 휼륭한 인재 추창趨蹌¹⁾하여 높은 당堂에 모여드니 대의大義와 삼강오상三綱五常 서로 강마講磨²⁾·토론하세
엎드려 원하오니 들보 얹은 뒤에 비바람 순조로워 백대百代의 환란이 없게 하옵시고 봄철은 거문고, 여름엔 시를 외워, 선비들의 기강紀綱이 만년萬年토록 풀어짐이 없게 하옵소서.
어찌 다만 한 지방 선비들의 경건한 재계齋戒일 뿐이리요? 아니 또한 천하의 사람들이 깨우치고 돌아보게 함이로다.
1995년 3월에 분성盆城 허형許洞 삼가 지음

【주석】
추창趨蹌¹⁾ : 예도禮度에 맞추어 제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감.
강마講磨²⁾ : 학문學問이나 기술技術을 갈고 닦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