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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팔봉서원 八峰書院

천부인권 2023. 9. 2. 07:08

2023.8.22.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達川은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에서 충주시 수안보에서 발원한 석문동천石門東川을 만나는데 수주팔봉이라 말하는 검암劍巖(칼바위)의 약한 암석을 뚫고 달천達川과 합류한다. 강을 사이에 두고 살미면 토계리의 검암劍巖(칼바위)이 대소원면 문주리를 휘돌아 가는 달천達川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문주리에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팔봉서원八峰書院을 남기고 탐금대彈琴臺에서 남한강을 만나 큰 강이 된다.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74-1에 위치한 팔봉서원八峰書院은 연산군 축출 이후 진보적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1819) 때 극형을 당하거나, 귀양 갈 때, 이곳으로 귀양 온 계옹溪翁 이자李耔(1480~1533)와 충주 용탄龍灘으로 낙향한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1484~1548)이 거룻배를 타고 서로 교유交遊하며 시문을 남기고 풍류를 즐긴 회심會心의 장소이다. 이 두 인물을 기리고자 1582년 봄 충청감사 김우굉金宇宏(1524~1590), 충주목사 이선李選(1522~1586), 지방 유림이 토계에 서원을 건립하고 그 이름을 계옹溪翁의 ‘계溪’와 탄수灘叟의 ‘탄灘’을 한자씩 따와 계탄溪灘이라 불렀다. 이로써 충주 최초의 서원인 계탄서원溪灘書院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023.8.22.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솟을삼문

계탄서원溪灘書院에는 네 분이 배향되어 있는데 계옹溪翁과 탄수灘叟 외, 광해 4(1612)년 십청허十淸軒 김세필金世弼(1473~1533)과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을 함께 배향하였는데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는 이연경李延慶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계탄서원溪灘書院 건설을 주도한 사람은 강복성康復誠(1550~1634)으로 노수신盧守愼의 처조카이고 초대 원장院長이 된다. 계탄서원溪灘書院은 현종顯宗 13(1672)년 때 팔봉서원八峰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리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러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팔봉서원八峰書院은 훼철되어 모든 교육과 제사 기능이 없어지고 울타리와 제단으로 명맥만 유지되었다. 
1990년 서원복원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1998년 대지 200평에 솟을삼문, 사당, 재실로 이루어진 팔봉서원이 복원되었다. 2003년 충청북도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 3월 20일 춘계 제향을 지내게 되었다. 

 

2023.8.22.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편액

이자李耔는 1530년 유배지인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몽암夢庵에 사는 즐거움을 남겼다. 

移卜兎溪 토계로 거처를 옮기며
庚寅五月晦 경인년(1530) 오월 그믐에 
野老來營此 시골 노인이 이곳에 와 집을 짓고서 
庵名號爲夢 집의 호를 몽암夢庵이라 부르고 
生死均一視 생과 사를 한가지로 여기며 사노라.
結屋山澗曲 산간 시내 돌아가는 굽이에 집을 지으니
風日喜舒暹 날씨는 기쁘게도 온화하구나.
春禽不擇樹 봄날의 새는 나무를 가리지 않고 
夏席隨陰移 여름날 방석은 그늘을 따라 옮겨간다.
楓江照曉天 단풍든 강은 새벽하늘을 비추고
雪爐熏羊皮 눈 내린 날 화로에 양가죽 옷 쬔다네.
逍遙且于于 이리저리 거닐면서 유유자적하니
百歲誰能期 백세를 사는 것을 누가 능히 기약하랴.

 

2023.8.22.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사당

아래에는 "계탄서원기 溪書院記"를 붙여 둔다.

 

溪灘書院記[원문]
院于溪而聯灘爲號。尊同也。嶽三山之東曰俗離。頂有水。分派西流而北。爲槐津。抵中原治南。南北山夾之者兎溪也。迤風流山下。峭壁巉峯。束聳環列二三里者劍巖也。霧豹雲虬。錦屏玉鏡。紆上下而映左右。綿亘不可斷。經細浦歷獐項。至丹月部曲而峽盡。爲峽窈而爽。闢而廓。真隱者所盤旋者。天作而地秘之者幾劫。己卯禍起。韓山李先生參贊退寓雪城。濯纓于溪而樂之。輒下其北岸。直壓劍面。搆屋以居。廣陵李先生校理公司時而擯。仍卜小築龍灘上。灘折西下而溪之獺川會其左。或欲乘興而往焉。則便從一力挐艇拆洄。可不暮而聞剝啄矣。嘗以溪翁灘叟相命。每月扉風欞。清坐晤語。熟玩圖書。參訂古今。若將終身。不知老至。斯豈非二先生會心之境也歟。不幸未幾。相繼易簣。苔蝕側礎。兔窟荒蹊。過者愴然。爲斯文羞久矣。歲壬午春。監司金侯宇宏。唶迹之亡。謀諸牧伯李侯選。推州士數輩。相故宅之北。因其向背而董之役。後倅劉侯漢忠吳侯澐。踵而用力。克底于成。其制則先建廟以奉二先生。曰崇德。次講堂。曰好懿。次齋。東曰明誠。西曰敬義。遂繚以坦而門之。合扁曰溪灘書院。顧而四望之。峽裏煙霞水石。盡爲一院之有矣。未敢知大老之靈以爲如何。今金侯偉聞而說之。將究厥績。夫五君子者。殆能有以風厲而作興之。亦休矣夫。王子師傳康復誠實主院事。屢屬余文以記之。余惟書院奚爲而創。乃就鄉賢藏脩地。爲學嗣者也。思昔子朱子欲以待夫不屑科試之士。而今世非之。豈不以不可與鄉校垃歟。殊不念古者閭黨皆有學。況此特家塾遺意。且其所以稱書。蓋曰是皮書之所云爾。書也何書。亦聖賢之籍也。聖人去矣。不籍之考。何所尋其緒而得其心。如使買其櫝而還其珠。又因以爲利。誠不若無籍之爲愈也。幸而有志。亦曰。考其籍而效其爲而已。爲之何以。其事曰。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其法曰親義別序信。其功曰。學問思辨行。然其大要。亦只是求其放心而已矣。竊願遊是院者。進而瞻乎廟。以致每尙之義。退而聚乎堂。以盡講究之實。齋乎坐尸如也。門乎出賓如也。造次必于是。顚沛必于是。異時處約處泰。遇險遇夷。無入而不自得焉。夫如是。始是讀書人。豈不懿乎哉。嗚呼。弟子今老矣。朝夕乞骸而歸。常欲泊灘往溪。復識江山之勝。新窺堂室之好。以償宿債。耿耿難了。顧鍾鳴漏盡。矯首南悲。猶以托名姓媚間爲自慶。於是乎書。赤狗夷則。歸德後學盧守愼謹記。
『蘇齋先生文集』卷之七 /記<溪灘書院記>

계탄서원기 溪書院記[해문]
서원은 '계溪'자에다 ‘탄灘'자를 연결시켜 이름을 삼았으니 두 글자의 존귀함이 동일하다. 삼산(三山)의 동쪽을 속리(俗離)라고 하는데, 정상에서 물이 나와 물줄기가 나뉘어 서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흘러가서 괴진槐津이 된다. 중원中原(충주)의 치소治所 남쪽에 다다라 남북으로 산이 끼고 있는 곳이 토계兎溪다. 풍류산風流山 아래로 이어져 가파른 절벽과 우뚝한 봉우리가 불쑥 솟아 2, 3 리에 걸쳐 빙 두르고 있는 곳이 검암劍巖이다. 무표霧豹 운규雲峴와 금병錦屛 옥경玉鏡이 위아래로 두르고 좌우로 어우러져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면서 세포細浦를 지나고 장항獐項을 거쳐 단월부곡丹月部曲¹⁾에 이르러 협곡이 끝난다. 협곡은 깊숙하면서도 시원하며 활짝 열려 툭 트여서 참으로 은자가 노니는 곳인데,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지가 여러 겁劫이 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 이선생李先生 참찬공參贊公²⁾께서 설성雪城(음성)으로 물러나 살면서 시내에 갓끈을 씻으면서 즐거움을 삼았다. 문득 그 북쪽 언덕에 집터를 잡고 곧바로 검면劍面 위에 우뚝하게 집을 짓고 살았다. 광릉廣陵 이선생李先生 교리공校理公³⁾께서도 같은 때에 배척되어 용탄龍灘가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용탄은 서쪽으로 꺾여 내려가 시내를 이루는데 달천獺川이 그 왼쪽에서 만난다. 간혹 흥을 타서 그곳에 가려고 하면 곧 노복 한 명을 따라 거룻배를 끌어다 타고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서 저녁이 되지 않아 방문할 수 있었다.
일찍이 ‘계옹溪翁’과 ‘탄수灘叟’로 서로를 부르면서 사립문에 달빛 비치고 창문에 바람 불 때마다 한가하게 앉아 이야기 나누었으며, 서책들을 깊이 음미하고 고금의 일을 고증하면서, 장차 그대로 생을 마치며 늙음에 이르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하셨으니⁴⁾, 이 어찌 두 분 선생의 회심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불행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서로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시자 이끼가 측면 주춧돌을 잠식하고 산토끼가 황량해진 길에 굴을 파게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글퍼하였으니 유림儒林의 부끄러움이 된 지가 오래되었다.
임오년(1582,선조15) 봄에 충청감사忠淸監司 김우굉金宇宏(1524~1590) 사또께서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탄식하여 충주목사忠州牧使 이선李選(1522~1586) 사또와 상의하여 고을의 선비 여러 명을 선발하여 옛집의 북쪽 터를 살펴 그 전후의 방향을 따라 집 짓는 일을 감독하였다. 후임 원님인 유한충劉漢忠 사또와 오운吳潤(1540~1617) 사또가 뒤를 이어 힘을 써서 능히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제도는 먼저 사당을 세워 두 분 선생을 모시고 ‘숭덕崇德'이라고 하였고, 다음으로 강당을 세워 '호의好懿'라고 하였고, 그 다음으로 재사齋舍를 세워 동재東齋를 ‘명성明誠'이라고 하고 서재西齋를 '경의敬義'라고 하였다. 마침내 담장을 두르고 문을 만들어 종합하여 편액扁額을 '계탄서원溪灘書院'이라고 하였다.
머리를 돌려 사방을 바라보면 협곡 안의 안개와 노을, 물과 바위 등이 모두 이 서원의 차지가 되니, 대노大老의 영령께서 어떻게 여기실지 감히 알지 못하겠다. 지금 김위金偉(1532~1595) 사또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장차 그 업적을 구명究明하려고 하였다. 무릇 이상의 다섯 군자는 자못 능히 면려勉勵하고 진작시킴이 있으니 정녕 아름답다.
왕자사부王子師傅 강복성康復誠(1550~1634)이 실질적으로 서원의 일을 주관하면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달라 부탁하였다. 나는 생각하기에 서원은 어찌하여 지었는가 하면 바로 향리의 현인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에 배움의 사당을 만든 것이다. 생각건대, 옛날 주자朱子께서는 과거科擧 시험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비를 대우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세상에는 옳지 않게 여긴다. 어찌 향교鄕校와 나란히 존립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마을과 향당에 모두 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물며 이는 특히 고대의 가숙家塾에서 유래한 의의意義임에랴⁵⁾.
또 그 ‘서書'라고 일컫는 것은 대체로 서적을 간직한 곳임을 말한 것이다. 서적은 어떤 서적인가. 역시 성현의 서적이다. 성인은 떠나갔으니 서적으로 고찰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그 마음을 얻을 것인가. 만약 그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주며 또 그것을 이익으로 삼는다면, 참으로 서적이 없는 것이 더 나음만 같지 못하다. 다행히 뜻이 있으니, 또한 그 서적을 고찰하고 그 행위를 본받을 따름이라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하는가? 그 일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이고, 그 법은 친親, 의義, 별別, 서序, 신信이고⁶⁾, 그 공효功效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明, 독행篤行이다⁷⁾. 그러나 그 큰 요점은 또한 다만 놓쳐버린 양심良心을 찾는 것일 따름이다⁸⁾.
가만히 바라건대 이 서원에 찾아오는 사람은 나아가서는 사당을 바라보며 존숭하는 뜻을 바치고 물러나서는 강당에 모여 학문을 강구하는 실상을 다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 재계하는 것을 시동尸童처럼 하고⁹⁾ 문을 나가서는 빈객賓客처럼 할 것이며¹⁰⁾, 다급한 순간에도 반드시 여기에 입각하고 위태로운 순간에도 반드시 여기에 입각하여, 훗날 곤궁에 처하거나 태평에 처하거나 험난함을 만나거나 순탄함을 만났을 때 어떤 상황에 들어간들 태연자약할 일이다. 무릇이와 같아야 비로소 공부한 사람인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아아, 이 제자는 이제 늙었으니 조만간에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가서 항상 용탄에 배를 대고 토계에 찾아가서 다시 강산의 명승을 알아보고 당堂室의 아름다움을 새로 들여다보아 오래 묵은 마음의 빚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에 맺혀 그만두기 어렵다. 다만 새벽종이 울리고 물시계는 다하니 머리를 들어 남쪽을 보고 슬퍼하는데, 그래도 문머리에 내 성명을 얹게 된 것을 스스로의 경사로 여기며 이에 글을 쓴다.
병술년(1586) 7월에 귀덕歸德 후학後學 노수신盧守慎은 삼가 적다.

【주석】
단월부곡丹月部曲¹⁾ : 충주(忠州) 단월역(驛)의 옛 터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第14卷 忠淸道 忠州牧》
한산韓山 이선생李先生 참찬공參贊公²⁾ : 이자李耔(1480~1533)
광릉廣陵 이선생李先生 교리공校理公³⁾ : 이연경李延慶(1484~1548)
늙음에 이르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하셨으니⁴⁾ : 《論語><述而>,“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雨.”
고대의~의의(意義)임에랴⁵⁾ : 《禮記》<學記>,“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
그 일은~신信이고⁶⁾ : 《孟子》<滕文公上>,“設爲庠序學校以敎之, 庠者養也, 校者敎也, 序者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日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朱子集註,“庠以養老爲義, 校以敎民爲義, 序以習射爲義, 皆鄕學也, 學國學也, 共之無異名也, 倫序也,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 別·長幼有序·朋友有信,此人之大倫也.庠序學校, 皆以明此而已.”
그 공효(功效)는~독행篤行이다⁷⁾ : 《中庸章句》<弟20章>,“博學之, 審問
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朱子集註,“程子曰, 五者廢其一, 非學也.” 
그 큰 요점은~따름이다⁸⁾ : 《孟子》<告子上>,“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 已矣.”
앉아 있을 때~시동尸童처럼 하고⁹⁾ : 《禮記·曲禮上》:“若夫坐如尸, 立如 齊, 禮從宜, 使從俗.”
문을 나가서는~할 것이며¹⁰⁾ : 《論語》<顔淵>,“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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