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야로면冶爐面 하림리 753(빈연길 7-9)에 위치한 가남정伽南亭은 사우정四友亭이란 현판도 함께 붙어있는데 야로면冶爐面에서 해인사 가는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 가야천 변에 마을과 떨어져 독채로 있다.
가남정伽南亭은 임진왜란 때 의병 대장 정인함鄭仁涵(1546~1613)을 도와 공을 세운 문암文庵 정인기鄭仁耆(1544~1617)·금월헌琴月軒 정인함鄭仁涵·우천愚川 정인휘鄭仁徽(1548~1606)·낙재樂齋 정인지鄭仁止(1550~?) 4형제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사우정四友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738년 서산정씨瑞山鄭氏의 시조와 4형제를 우계리에 세덕사를 세워 모시기 시작했고 1862년 운계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는데 1919년에 가남정伽南亭을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입문의 앞에는 웅장하고 건강한 느티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있는데 2000년 3월 16일에 지정된 합천군의 보호수로 높이 20m, 나이 450년, 가슴높이 둘레 631cm이다.
가남정伽南亭의 또 다른 이름인 사우정기四友亭記에 의하면 이 느티나무는 금월헌琴月軒 정공鄭公께서 손수 심은 나무로 그 아래서 강론하였는데, 뒤에 사림士林들이 나무 아래에 사우정四友亭을 지었으나 훼철되고 1919년 다시 복원해 그해 10월에 장석신張錫藎이 기문을 쓰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를 대신해 동구 밖에 느티나무를 주로 심었는데 그 의미는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마을과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우산처럼 수형을 갖기에 그늘을 주니 회합의 장소로 적당하고 마을 입구에 심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쉬워 화합의 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노거수가 되면 당산나무로 활용해 마을을 지키는 목신의 역할도 했다.
四友亭記
大良之北伽倻之南 湖山鄭氏世居也 昭王盛際 有若文庵琴月軒愚川樂齋 四君子幷出一家 人以質行之不可及擬之石氏建慶于 時門闌薰爀牙纛圭冕可摘領頭鬚 不幸世値卼臲彛倫斁盭禍亂之尋 將不及旋踵邃乃炳幾色翔 視蔭暑郡緩如泥塗 各自賦詩以見志 其曰 松柏本固直難 爲桃李顏伯旁詩也 其曰 用舍行藏君子義 林泉惠好更誰人仲旁詩也 其曰 病革癯如鶴 道心清似鷗 山南松水好 此外更安求叔旁詩也 其曰 桃李方全盛 林間見幾人縱 然呈百媚不是我家春季旁詩也 或鏟影於巖窐而不市 或貶斥於學而无悔及夫 聖作物覩廓掃 祲煇連累鴻罹者遍於國中 而獨山南一區材狵無緹騎之警 超然自脫於崑炎之焚玉於乎韙矣 儘往牒之所罕也 方其長枕湛翕塤唱箎和日征月邁所講者 義理之肯綮所戒者 勢利之畏避同氣同心 有若友朋之契合切磋棣萼之韡也 芝蘭之臭也 畢竟成就得明哲保身非平日征邁切磋之力 有所發出來者乎 古有琴翁手植木在愚溪之南 兄弟講道於樹下時人謂之四友亭 以樹爲亭也 後士林設文庵琴月俎豆祠於其傍爲邦合所毀 惟有三百年古樹 至今屹立於破垣堆礫之墟 行路指點愛惜如關里之竹 而後昆所以追慕傷感不啻桑梓敬 而已乃營建一亭扁之曰 四友屬余作文以記之余執觶 而謝曰 諸君之罄孱力刱巨匠多賀其衛祖之誠 而是亭之必於是樹下者 以先人之所種也 其直幹聳出雲霄旁枝插㙷 而鱗接卽人身之枝於親 而百世繁衍者也 四友出於一本 而爲四則吾未知出於四友者 今又幾個四友歟視此樹如周孔墓之模楷毋敢翦拜 而日登是亭修孝友睦婣之道 講朋友切偲之資 想慕四友盡四友之行心四友目四友則亭 是四友人亦四友也 不爾直巋然一虛亭 而蒼蒼老樹將不勝樵斧牛牧之日 梏吾友其諸至若山水雲林之勝 登覽諸友之題咏在不須記
己未 小春節 壬寅 通政大夫 原任 銀臺承宣 壽同 張錫藎記
사우정기
대량大良의 북쪽 가야산 남쪽은 서산정씨瑞山鄭氏가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라. 인조대왕 전성시에 문암文庵·금월헌琴月軒·우천愚川·낙재樂齋 등 사군자四君子가 한집에서 출생하니, 사람들이 인품과 덕행을 따르지 못하므로 석씨의 건경建慶에 비유하였다. 이 때에 가문이 성하고 빛나서 문무의 벼슬이 크게 유망하더니, 불행하게 혼란한 세대를 만나 인륜이 무너지고 환란이 일어나서 벼슬 보기를 진흙과 같이 여기고 각자 시를 지어서 뜻을 보이니, 그 가로되 송백은 본래 굳고 곧아서 복숭아와 오얏의 안색이 아니라 함은 백씨의 시요. 그 가로되 취하고 그만두고 행하고 감춤은 군자의 의리라, 임천林泉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누구인가 함은 중씨의 시요. 그 가로되 병이 심하여 학 같이 여위었으나, 도의 마음은 백구와 같이 맑다 함은 숙씨의 시요. 그 가로되 복숭아와 오얏이 바야흐로 전성하니, 숲 사이에 보이는가 몇 사람인고, 비록 백가지 고움을 준다 하나 우리 집 봄은 아니라 함은 계씨의 시라. 혹은 산중에 몸을 숨겨서 드러내지 아니하고, 혹은 군학으로 좌천되어도 후회함이 없었다. 성왕이 일어나 상벌을 정리하니, 연루되어 화를 당하는 자가 전국에 삐쳤으나 홀로 산남의 한 구역은 마을 개들도 협조 관리에게 놀램이 없었고, 초연이 곤륜산 불꽃 속에 구슬 타는 화를 면하였으니, 거룩하도다.
지나간 송사에 드문 바이라. 바야흐로 긴 베개를 함께 하여 화합하여 형은 부르고 아우는 화답하여 날마다 달마다 매진하고 강습하는 바는 의리의 기본이요, 경계하는 바는 세력과 이익을 두려워하고 기피함이라. 동기간에 같은 마음으로 친구같이 결합하고 선도함이 있어 체나무(형제를 비유함)의 빛남과 지란의 향취가 있다. 필경畢竟에 성취하여 몸을 보전하였으니, 평일 매진하고 선도하는 힘이 발출한 바가 아니리오. 금월헌께서 손수 심은 나무가 우계 남쪽에 있는데, 형제들이 나무 아래서 도의를 강론하니 당시 사람들이 사우정이라 하였으니, 나무를 정자로 삼음이라. 뒤에 사림이 문암 금월헌 사당을 그 곁에 설치하였더니, 국법으로 훼철되고 오직 삼백년 고목만이 지금까지 무너진 원장 쌓인 자갈 속 빈터에 우뚝 서 있으니, 길가는 사람들이 가리키며 애석해 함이 관리의 대숲처럼 여기고 후손이 추모하고 상심함은 고향을 공경할 뿐만 아니라. 한 정자를 경영해 세워서 사우정이라 현판하고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부탁하거늘 내가 벌주를 받는 듯이 사례하고 가로되 제군들이 약한 힘을 다하여 큰 집을 창건하니, 그 선조 위하는 성의를 하례한다.
이정자를 반드시 이 나무 아래 지음은 선조께서 심었기 때문이다. 그 곧은 줄기는 구름 속에 솟았고 겉 가지는 무성하여 비늘처럼 연접하였으니, 곧 사람의 몸이 어버이의 가지로서 백대에 번성함이라. 四友(四兄弟)는 한 근본에서 나와서 넷이 되었으니, 사우에서 출생한 자가 지금은 몇개 사우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 이 나무 보기를 주공과 공자의 무덤같이 여겨서 효도 우애 화목한 도리를 닦고 벗의 선도하는 자료를 강습하여 사우로서 사우의 행실 다한 것을 사모하여 마음도 사우, 눈도 사우면, 정자도 사우, 사람도 또한 사우가 되거니와 그러하지 아니하면 높다란 한 정자와 창창한 고목이 장차 초부의 도끼와 목동에게 날마다 시달림을 견디지 못하리니, 나의 벗들이여 힘쓸 것이로다. 산수와 운림의 좋음은 올라와서 관람하는 여러분의 쓰고 읊는데 있을 것이므로 기록하지 아니하노라.
1919년 10월 임인일에 통정대부원임 은대승선 수동 장석신 씀
출처 및 참조
합천루정록-합천군·합천문화원/합천누정록편집위원회-세기인쇄(200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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