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향교와 뿌리

합천 강양향교 江陽鄕校

천부인권 2024. 3. 30. 07:02

2024.3.15.합천 강양향교

 

합천 강양향교江陽鄕校는 1965년 합천읍 합천리 690-2(충효로1길 5-12)인 이 장소에 새로 지었는데 현재 문화재자료 제210호로 지금까지는 문화재로 등록된 향교 중에서 가장 늦게 지정된 향교이다.
합천의 중심지인 합천읍에 합천향교가 있었는데 1881년(고종 18년) 큰 수해가 나서 군청을 야로면으로 옮기자 향교도 야로면으로 옮기고 합천향교라 이름했다. 그 후 다시 군청을 옮겨오면서 향교를 그냥 두었다가 야로면의 “합천향교”를 옮기려 하자 야로면의 반대로 이전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합천·용주·율곡·대양면의 유림들을 위해 현재의 위치에 향교를 지었는데 야로면의 합천향교와 구별하기 위하여 “강양향교”라 했다. 
이곳은 언덕의 정상부에 평삭平削한 좁은 땅이라 일반적인 향교처럼 ‘전학휴묘前學後廟’의 형태가 아니라 명륜당이 작고 대성전과 나란히 배치한 ‘좌학우묘左學右廟’로 되어 있지만 별도의 담장을 둘러 제례 공간을 분리했다. 건물은 외삼문·명륜당·내삼문·대성전·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2024.3.15.합천 강양향교 외삼문
2024.3.15.합천 강양향교 명륜당과 대성전
2024.3.15.합천 강양향교 명륜당
2024.3.15.합천 강양향교 대성전

 

大成殿重修記

大抵人有二綡 其一血綡 自先祖至於後孫 而相繼者也 血綡若絶則子孫滅亡 其二道統道綡 自先聖至於後學 而相繼者也 道綡若絶則人類滅亡 道綡之不可絶猶血綡之不可絶也 雖然子孫滅亡 一家空虛人類滅亡 則天下空虛用 此觀之道統 重於血統可不 極力繼續哉 孔子以天縱之聖祖 述堯舜憲章文武 以傳道綡保 人類其敎足 爲師表萬世 故建文廟奉尸祝 以報其功我東之大成殿 卽其遺制也 而其設有大中小之異焉 我江陽文廟 則屬於小設 故奉安五聖 及宋朝四賢 我東十八賢奉行 春秋大祭 其設雖異而其誠則一也 但年代乆遠瓦老材朽壁破階頽幾難支保而力詘不能重修矣 相學旣登錄 於成均館旋復申請登錄 於道廳金赫圭知事 竟得指定地方文化財第二百十號 因得道郡費七千萬金 改瓦易材補壁築階煥然一新聊可舍 其心上之貢慮也 於是謹擇吉日還安 而告成相學諗于 衆曰惟此大成 爲天下最高之殿堂也 故自天子至于 國王莫不屈勝而拜手 爲其聖人道綡之所在也 夫所謂道綡者何也 仁義禮智之性 三綱五常之理 與夫孝弟忠信之德 冠婚喪祭之法是也 現下吾韓聖學衰亡 異敎極盛 物質膨脹 綱常斁敗 道統幾絶 人類將滅 而不滅者 以其有大成之聖人也 此正原道所謂如古之無 聖人人之類滅久矣者也 惟願我後任諸氏勿以奉行 祀事爲至上大業必也 講聖學排異敎斥物質 明倫理繼續 我幾絶之道綡極救 我將滅之人類方爲盡善也 如此大業非我儒林不能爲也 盍相與勉之哉 是用爲記以塞同任請文之貴

孔子紀元二五四六年乙亥五月初吉

後學成均館典學江陽鄕校典校

陜川李相學謹記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

대저 사람에게는 두 가지 맥()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혈맥(血脈)이니, 선조로부터 후손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혈맥이 만약 끊어지면 자손이 끊어져 망하게 됩니다. 그 둘은 도통(道統)의 맥이니, 옛 성인으로부터 후학(後學)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도통의 맥이 만약 끊어지면 인류가 멸망하게 됩니다. 도통의 맥을 끊어서는 안 됨은 혈맥을 끊어서는 안 됨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손이 끊어져 망하면 한 집안이 빌 뿐이지만, 인류가 멸망하면 천하가 비게 됩니다. 이로써 본다면 도통이 혈통보다 중요하니, 어찌 온 힘을 다해 이를 이어가지 않겠습니까? 공자(孔子)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스러운 시조로서, (() 임금의 도를 기술하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제도를 법으로 삼아 도통의 맥을 전하고 인류를 보전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만세의 사표(師表)가 되기에 족하므로, 문묘(文廟)를 세우고 제사를 받들어 그 공덕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방(東方, 대한민국)의 대성전(大成殿)은 바로 그 옛 제도에 따른 것입니다. 다만 그 규모에는 대··소의 다름이 있습니다. 우리 강양(江陽, 하동)의 문묘는 작은 규모에 속하므로, 오성(五聖)과 송조(宋朝)의 사현(四賢), 그리고 우리나라의 십팔현(十八賢)을 모시고 봄가을로 큰 제사를 받들어 행합니다. 그 규모는 비록 다르나 그 정성은 하나입니다.

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기와는 낡고 재목은 썩었으며, 벽은 부서지고 계단은 무너져 거의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힘이 모자라 중수(重修)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 상학(相學)은 성균관에 등록을 마친 후, 다시 도청(道廳)의 김혁규(金赫圭) 지사님께 등록을 신청하여 마침내 지방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도()와 군()의 지원금 칠천만 원을 얻어 기와를 바꾸고 재목을 교체하며, 벽을 보수하고 계단을 다시 쌓아 모든 것이 환하게 새로워졌으니, 그제야 마음에 품었던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삼가 좋은 날을 가려 위패를 다시 편안히 모시는 환안제(還安祭)를 지내고 공사가 끝났음을 고하며, 저 상학은 여러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직 이 대성전은 천하에서 가장 높은 전당(殿堂)입니다. 그러므로 천자로부터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을 굽혀 절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성인의 도통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이른바 도통의 맥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인(((()의 본성과 삼강오륜(三綱五常)의 원리, 그리고 효도·우애·충성·신의의 덕목과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법도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성현의 학문이 쇠퇴하여 망하고, 이단 종교가 극성을 부리며,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기강과 인륜이 무너졌습니다. 도통은 거의 끊어지고 인류는 장차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바로 대성전의 성인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유(韓愈)원도(原道)에서 이른바 만약 옛날에 성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저의 후임자들께서는 제사를 받들어 행하는 것만을 지극한 대업으로 삼지 마십시오. 반드시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이단 종교를 배척하며, 물질만능주의를 물리치고, 인륜을 밝혀 거의 끊어진 우리의 도통을 이어가며, 장차 멸망할 인류를 구제해야만 비로소 지극한 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과업은 우리 유림(儒林)이 아니면 해낼 수 없습니다. 어찌 서로 더불어 힘쓰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 글을 기록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글을 청한 귀한 뜻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공자 기원 2546년 을해년(1995) 5월 초길(初吉),

후학(後學) 성균관 전학(典學) 강양향교 전교(典校)

합천(陜川) 이상학(李相學)이 삼가 기록하다.

 

*전당(殿堂): 우리나라의 건물에는 위계가 있고 이름을 짓는 기준이 있다.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이 건물의 서열이다. (殿)과 당()은 섞어서 사용하는 명칭이 아니다. 전당(殿堂)은 우리말이 아니라 왜놈(倭者)이 만든 조어이다. 글을 지은 이상학이 몰라서 사용한 명칭이다.

 

 

江陽鄕校明倫堂重建記
盖聞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 而惟人也最貴 故賦以五倫也 夫所謂五倫者何也 曰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此人之所不可一日 而無之者也 故人倫明 則家國治 人民得所 而能相養 人倫不明 則家國亂 人民失所 而不能相養 將歸於滅亡 然則家國之所 以治亂興亡 皆係於人倫之明 不明如何矣 可不重歟是 故古昔聖王之治 其家國也 自王宮國都 以及閭巷 莫不建學立師 以敎人倫家國大治 今之鄉校 卽其遺制也 我東自麗末鮮初設立 一郡一校 各置一人招英才 教詩書使知 父慈子孝 君義臣忠 夫和婦順 長愛幼敬 兄友弟恭 朋信友諒 故人倫明而家國治矣 一自受倭軍 兩政 以來半百年之間校宮 雖存訓導廢而讀書撤 不復明倫 故物質重而人道輕政敎衰 而家國亂 父子相殺 人民相奪幾至於滅亡之境何 幸近年自國家援助各鄉校 設立教室講師 利用冬夏放學時期 招集中高敎男女學生 啟講忠孝禮節教育 忠孝乃明倫之本 禮節行忠孝之路也 是人道重 而物質輕政敎興 而家國治 古昔聖王明倫之學庶自 此而可復矣 豈非幸歟雖 然我江陽鄉校明倫堂制度狹隘不能容重衆有礙 於教育故常欲再建 而力綿不就 今番典校金英洙極費心力 遠得道聽金知事之援金 近得郡守之助力 撤去明倫學院重建四架五楹之堂 於其址東西二間作煖房 中二間作凉廳 以便起居 材木膚碩制度廣闊 可以容衆用作明倫奉祭之所 將選日 告成請記於不佞不妄 亦喜聖學之復興 而人倫之復明 亦貪掛名之榮遂不辭 而記之如右 後之居斯者 顧名思 義不廢先儒之德業 後學之養成吾入地 而祈祝焉
孔紀 二千五百五十年 龍集己卯 九月上浣
後學成均館典儀 陜川后人 李保鉉 謹記

강양향교명륜당중건기
대개 듣건대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만물을 생육生育하고 그 중 오직 사람이가장 귀貴하기 때문에 오륜五倫을 부여賦與하였다. 대저 이른바 오륜이란 어떤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고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義가 있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구별區別이 있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고,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 이는 사람에게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륜이 밝으면 가정家庭과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사람은 마땅한 곳에 있게 되고 능히 화합하고 인륜을 밝히지 않으면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사람은 마땅한 곳을 잃고 서로가 화합하지 못하고 장차 멸망滅亡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도 하고 어지러워지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고 밝히지 않는 것에 있으니 어찌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하기 때문에 옛 성왕聖王의 다스림은 가정과 나라에 있었다. 왕궁王宮과 한 나라의 도읍에서부터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세워 스승을 두고 인륜人倫을 가르치지 않음이 없어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지금의 향교鄕校는 그 남긴 제도로서 우리나라는 고려 말末에서 조선 초初에 한 고을에 한 학교를 설립하여 각각 한 사람을 두고 영재英才를 모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가르쳐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고 임금은 의義를 행하고 신하는 충성忠誠하고 남편은 화목和睦하고 아내는 순종順從하고, 어른은 사랑하고 아이는 공경恭敬하고 형은 우애友愛하고 아우는 공손恭遜하고 벗과 벗은 서로 믿음으로 할 것을 알게 하였기 때문에 인륜은 밝고 나라는 잘 다스려 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왜군의 侵掠을 받은 이후로 반백년 동안 향교鄕校의 건물建物은 있으나 가르침과 독서는 철폐撤廢되고 인륜을 밝히지 않아 물질物質은 중하고 인륜은 가벼워 정치政治와 교육敎育은 쇠퇴衰頹하여 가정과 나라는 어지러워져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죽이고, 백성은 서로가 빼앗고, 거의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근년近年에 국가國家에서 각 향교에 원조援助를 하여 교실을 설립하고 강사講師를 두어 겨울과 여름에 방학 시기를 이용하여 남녀 중고등생中高等生을 모아 충효예절교육忠孝禮節敎育을 강의講義하게 되었으니 충효忠孝는 곧 인륜을 밝히는 근본根本이며 예절禮節은 충효를 행하는 길인 것이다.
이로부터 인륜을 중히 여기고 물질은 가볍게 여기니 정치와 교육은 일어나고 가정과 나라는 다스려져 옛 성왕의 인륜을 밝히는 학문이 이로부터 회복回復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라 아니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 강양향교江陽鄕校 명륜당明倫堂은 규모規模가 협소狹小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가 없어 교육에 애로가 있어 늘 재건하고자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힘이 약해 이루지 못하던 중 이번에 김영수전교金英洙典校의 힘으로 멀리는 김지사金知事의 후원금과 가까이는 균슈郡守의 조력助力을 얻어 명륜학원을 헐고 4칸의 집을 그 자리에 중건하여 동쪽과 서쪽 2칸은 난방으로 하고 가운데 2칸은 시원한 마루로 하여 기거에 편하게 하였다.
재목은 크고 구조는 광활廣闊하여 가히 만은 사람을 수용收用하여 인륜을 밝히고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는 곳으로 할 만하여 장차 좋은 날을 가려 완공完工을 고告하고자 하면서 부족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고 나 또한 성인聖人의 학문學問이 회복되고 인륜人倫을 다시 밝히게 된 것을기뻐하고 또 내 이름을 걸게 되는 영예를 탐내어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기록記錄하니 훗날 여기에 거하게 되는 사람은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고 선유先儒의 덕업德業이 폐廢하지 않고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할 것을 땅 밑에 들어간 뒤에까지도 빌면서 경하慶賀한다.
공기 2550년(1999) 용집기묘 구월상완
후학 성균관 전의 합천후인 이보현 삼가씀

 

 

江陽鄕校重建記 丁亥

自古帝王之治天下鄕國也 必有政堂陪聖賢薦粢盛獎文學敎英才出治道明人倫以厚禮俗今之鄕校 卽其遺制也 陜川鄕校舊在北山下數被洪水之害 在昔任穉宰知郡時移建于 北面冶爐鍾山之下去 郡太遠徃來不便 故數年後還邑而文廟 則未還其後欲移文廟 則北部儒林不許 故南部儒林復設文廟 而不得成均館之認可累受毁撤之命 邑之有二校即此故也 徃年乙卯 余自北面伽倻移居陜川 陜之儒林任 余爲典校託余登錄于 成均館得認可至是 余欲尊崇儒敎擴張儒林 上成均館託館長得認可 又徃道廳見知事登錄地方文化財 得道費作補修丙戌 又與典校鄭尙甲儒林金英洙郡守沈義祚 得國道郡費五億萬元 撤去舊校擴張新築改稱江陽至 是校廟軆制始備擇吉 而告落典校請余作記文 余自少時尊崇儒敎 又築江陽不可辭也故猥把鈍筆 而記之如右

孔子紀元二千五百五十八年 丁亥七月下浣

後學成均館典儀陜川李相學謹記

江陽鄕校典校瑞山鄭尙甲謹書

 

강양향교 중건기 (정해년)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천하(天下)와 향국(鄕國, 지방)을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정당(政堂, 교화 기관)을 두어 성현(聖賢)을 모시고 제물(粢盛, 자성을 올리며, 문학(文學)을 장려하고 영재(英才)를 가르쳐, 치도(治道)를 세우고 인륜(人倫)을 밝혀 예속(禮俗)을 두텁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향교(鄕校)가 바로 그 남은 제도입니다.

합천향교(陜川鄕校)는 옛날에 북산(北山) 아래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홍수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난날 임치재(任穉宰) 군수 시절에 북면(北面) 야로종산(冶爐鍾山) 아래로 옮겨 지었으나, ()에서 너무 멀어 왕래가 불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년 뒤에 읍()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문묘(文廟)는 미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후 문묘를 옮기려 하였으나 북부(北部) 유림(儒林)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남부(南部) 유림이 다시 문묘를 설치하였으나, 성균관(成均館)의 인가를 받지 못하여 여러 차례 훼철(毁撤)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읍에 두 개의 향교가 있게 된 것이 바로 이 까닭입니다.

지난 을묘년(乙卯年에 내가 북면 가야(伽倻)에서 합천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합천의 유림이 나를 전교(典校로 임명하고, 성균관에 등록하는 일을 맡겨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르러 내가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유림을 확장하고자 하여, 성균관에 올라가 관장(館長)에게 부탁하여 인가를 얻었습니다. 또한 도청(道廳)에 가서 지사(知事)를 뵙고 지방 문화재로 등록하여, 도비(道費)를 지원받아 보수 작업을 하였습니다.

병술년(丙戌年)에 또 전교 정상갑(鄭尙甲), 유림 김영수(金英洙), 군수 심의조(沈義祚)와 더불어 국비, 도비, 군비 5억 원을 확보하였습니다. 옛 교궁(校宮)을 철거하고 확장 신축하여 '강양(江陽)'이라 개칭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교묘(校廟, 학교와 사당)의 체제(體制)가 갖추어졌습니다.

좋은 날을 택하여 고락(告落, 완공을 알림)하였는데, 전교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교를 숭상하였고, 또한 강양향교를 짓는 일에 참여하였기에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외람되이 둔필(鈍筆)을 들어 이와 같이 기록합니다.

공자기원 2558년 정해년(2007) 7월 하완(下浣)

후학(後學) 성균관 전의(典儀) 합천(陜川) 이상학(李相學)이 삼가 기록하다.

강양향교 전교(典校) 서산(瑞山) 정상갑(鄭尙甲)이 삼가 쓰다.

 

[주석]

粢盛(자성)¹: 제사에 쓰는 곡식(기장과 피)을 담은 그릇, 또는 그 제물을 통칭합니다.

을묘년(乙卯年)²: 문맥상 1999년으로 추정됩니다.

전교(典校)³: 향교의 최고 책임자 직책입니다.

병술년(丙戌年): 2006년입니다.

하완(下浣): 음력 월의 21일부터 말일까지의 기간을 뜻합니다.

 

 

江陽鄕校登錄事實記

人有忠孝之德體義之道 而非學文無 以知之故 古昔聖王之治 其國家也 皆建學立師 以敎萬民講其道 而養其德今之鄕校堲其遺制也 陜之鄕校 舊在郡之北山下地勢 汗下數被洪水之害矣 高宗辛卯 知郡任穉宰移邑于 郡北一隅冶爐縣鄕校亦隨 而移之其後六年丙申 以其行政之不便還邑于 舊治南山之下 而校宮及文廟客舍 則不之還焉 以其人役之太鉅也 其後數十年之間 郡治與校宮隔離太遠非但 爲行事之不便亦違 於通國在邑之定制 故欲復校宮 於舊址北方人士不應至 是南方人士合力複設校宮及文廟 於邑中登錄 於成均館未幾 而當取消惟奉春秋大祭 而己歲乙卯 余從居南方 南方人士責余 以登錄之事 余惟佛蘇之敎 一郡之中複設十餘個寺堂 而猶爲相助至 於我儒敎 一郡二校 有何不可也 時余任本校 儒道會長 即與族丈典校保鉉氏 上京得成均館認可無何 又當撤回 其後辛未再得認許 始得國費五千萬金 改築垣墻 及內三問復得道郡敎育費五百萬金 開夏期放學 忠孝禮節敎室召集 南部四個 中高校男女學生 五百餘名而授業 庶期回復 美風良俗之傳 綂幸何如之 於是同任諸人咸曰 是不可以無記請余 爲記故遂不辞 而述其顚末如右 惟我後任諸人必 以我今日保守之心 爲心敎育之業 爲業永世無廢可也 至囑至囑

孔夫子紀元二五四三年玄默涒灘姤月芒種節

成均館典學江陽鄕校儒道會 支部長陜川后人李相學謹記

 

강양향교(江陽鄕校) 등록 사실기(事實記)

사람에게는 충효(忠孝)의 덕()과 의()의 도()를 체득함이 있으나, 학문(學文)이 아니면 이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왕(聖王)께서 그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모두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만백성을 가르치고 그 도()를 강론하며 그 덕()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지금의 향교(鄕校)가 바로 그 남겨진 제도(遺制)입니다.

합천(陜川)의 향교는 예전에 군()의 북쪽 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세(地勢)가 낮고 습하여(汗下) 여러 번 홍수(洪水)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종(高宗) 신묘년(辛卯年, 1891)에 지군(知郡, 군수) 임치재(任穉宰)가 읍()을 군의 북쪽 한 모퉁이인 야로현(冶爐縣)으로 옮기자, 향교 또한 따라 옮겨졌습니다.

그 후 6년 뒤 병신년(丙申年, 1896)에 행정(行政)의 불편함 때문에 읍을 옛 치소(治所)가 있던 남산(南山) 아래로 다시 옮겼으나, 교궁(校宮, 향교) 및 문묘(文廟), 객사(客舍)는 인력과 비용(人役)이 너무 막대하여 (읍내로) 다시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군의 치소(郡治)와 교궁(校宮)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행사를 치르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읍()(향교가) 있어야 한다는 정해진 제도(定制)에도 어긋났습니다. 그러므로 교궁을 옛 터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북방(北方)의 인사(人士)들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남방(南方)의 인사들이 힘을 합쳐 읍() 안에 교궁과 문묘를 다시 설치(複設)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등록이) 마땅히 취소되어, 오직 봄가을의 대제(大祭)만을 받들 뿐이었습니다.

을묘년(乙卯年, 1975)에 내가 남방(南方)에 머무르게 되자, 남방 인사들이 나에게 (향교) 등록(登錄)의 일을 책임지라 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를, 불교(佛敎)나 예수교(蘇敎, 기독교)는 한 군() 안에 십여 개의 사찰과 교회(寺堂)를 거듭 세우고도 오히려 서로 돕는데, 우리 유교(儒敎)에 이르러 한 군에 두 개의 향교(一郡二校)가 있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이때 내가 본교(本校, 강양향교) 유도회장(儒道會長)을 맡고 있었는데, 즉시 족장(族丈)이신 전교(典校) 이보현(李保鉉) 씨와 더불어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의 인가(認可)를 얻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철회되었다가, 그 후 신미년(辛未年, 1991)에 다시 인허(認許)를 얻어 비로소 국비(國費) 오천만 금()을 받아 담장과 내삼문(內三問)을 개축(改築)하였습니다.

또 도(() 교육비 오백만 금을 얻어, 여름 방학에 충효예절교실(忠孝禮節敎室)을 열고, (합천) 남부(南部) 4개 중·고등학교 남녀 학생 500여 명을 모아 수업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미풍양속(美風良俗)의 전통(傳統)을 회복하게 되기를 기약하니, 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함께 일한 모든 분(同任諸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에 대해 기록이 없을 수 없다"라며 나에게 기록()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전말(顚末)을 위와 같이 서술합니다.

오직 바라건대, 나의 후임(後任)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오늘날 우리가 (향교를) 지켜낸 마음을 마음으로 삼고, 교육(敎育)의 업()을 업으로 삼아, 영원토록 폐()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부탁하고 또 부탁합니다.

공부자(孔夫子) 기원 2543(서기 1992)* 현묵혼탄(玄默涒灘, 계유년)* 5(姤月) 망종절(芒種節)

성균관 전학(成均館典學) 강양향교 유도회(江陽鄕校儒道會) 지부장(支部長)

합천 후인(陜川后人) 이상학(李相學)이 삼가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