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합천향교와 은행나무

천부인권 2024. 4. 3. 10:29

2024.3.31.합천향교 전경

 

『합천향교陜川鄕校』는 세종 때 세워졌으며, 1881(고종 18)년에 합천에 홍수가 들어 합천군청을 합천읍에서 야로면으로 옮기면서 향교도 함께 옮겨 왔는데 이후 합천군청은 합천읍으로 다시 돌아 갔지만 향교는 야로면에 그대로 남게 되어 지금까지 합천향교로 이어지고 있다. 
『합천향교陜川鄕校』는 평지에 위치하여 명륜당明倫堂의 좌측에 대성전大成殿이 나란히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외삼문인 영귀루詠歸樓 안에는 동·서재는 없고 명륜당만 있으며,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향교를 지킨 정씨부인의 사당이 있다. 대성전 영역은 담장을 둘렀으며, 내삼문을 들어서면 동·서무가 있고 대성전이 위치하는데 이는 교육기능이 쇠퇴하고 제례 기능만 남았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명륜당明倫堂의 마당에는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높게 솟아 있는데 나이는 150여년 정도이고, 높이는 24m이며, 가슴높이 둘레는 337cm이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것은 공자님의 말씀을 따르는 무리가 은행 열매처럼 수없이 많이 생겨나라는 의미도 있고 향교의 위치를 알리는 표식수表式樹의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층빌딩이 없던 시절에 20m가 넘는 은행나무는 멀리서도 위치를 가늠하게 하고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은행을 보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한 은행나무 특유의 냄새로 인해 벌레를 쫓는 기능도 있어 향교 안에 심었을 가능성도 있다. 

 

2024.3.31.합천향교 영귀루
2024.3.31.합천향교 명륜당
2024.3.31.합천향교 대성전 영역
2024.3.31.합천향교 대성전과 동서무
2024.3.31.합천향교 대성전
2024.3.31.합천향교 은행나무
2024.3.31.합천향교 은행나무

 

陜川鄕校 明倫堂 重修記
國於海之左 而以夷之陋 而有華之敎者 卽我東 是已 惟我父民 抱罔僕之義 遵海而東 演九疇 敍八條 禮讓我雕桿 彛倫我僸侏 因以進於中國 而玆非父 民之不幸 而左海之幸耶 繼以癸卯受命 因周官釋宮制 立孔子廟于泮水之側 因王儀俎豆之 又命諸鄕 各建一祠 如泮禮 又其傍 立講堂 揭以明倫 聚鄕民之聰俊拔者 日于坐處而講明忠孝禮讓之道 其所以尊聖道立人格 維持乎國家者 蓋三百年如一日 而箕疇敎人之化 於是乎始大闡 其下順上旨 子嚴父詔 癯夫提印 百里趨命 弱孫當室 悍僕不格 而自嶺以南 今文東國之趨魯也 在國朝盛時 四先生 道學文章 因已鈐一世 擢後代而外之若杖節殉義之士 接武於危亂之時 而乃者凶徒 射天列郡靡風 擧全嶺而爲 無義士之河北 則彛倫之汨 匙莫有甚於嶺南 而明倫之堂 遂爲虛器 其使父民 生於今時 又作如何觀也 余始至鄕 慨然以明倫正名 爲先務 乃於其秋 奉酒香 行釋菜禮 序欲於明倫之堂 堂之設久而陋 城缺而夷 桷朽而圮 民生之禮 窘於寒暑 思欲易之 而難於擧嬴 遂以其翌年春 僝工改觀 速邑之章甫 落而告之曰明倫之道 盡我而已 承父母則孝 事君上則忠 友以處兄弟 和以莅室家 信以交朋友 而若其所以忠與孝者 又得本之乎天 而無古今賢愚之異 則聖人 人倫之至也 及其至也 孝之錫類 而悖子 忠之 錫類而孼臣 懷義推之 兄弟夫婦朋友之倫 各臻其當 而舉以措之天下國家 無適不然 則玆豈非 君子成己成物之效 而諸生之所講命者耶 若春秋之享 齋邊秩秩 講帳曉闢 會弁星列 峨其冠而升此堂者 各敬餘例 唯像乎魏然 當座之郡哲 由琴點瑟 洋乎如聞 則夫執不觀感而興起也哉 其子弟之興於孝 鄕俗之趨於善 必又期此而然者 其將見大嶺以外 文學魁傑之士 蔚然輩出 遂云與古之嶺等 而繼開乎聖門 賁襄乎王國 周官之治 可術於今 而斯豈非明倫之極功耶 夫然後 箕疇化民之效 煥然復明於世 而列聖朝興學作人之化 庶無愧於商庠周序矣 余以是 深有望於諸生 而抑因以又有感焉 於乎 北望中原 腥羯滿目 則君臣之倫 斁矣 華夷之辨 亂矣 蕞爾東土 倫上不墜 則無乃父民之神智聖算 坐致千歲之日 至而古百年之爲哉 先有以變我 而又以變中國耶 凡百君子 盍思所以變之 而變之之道 亦唯曰明倫而已 余未知後之躋此堂 而看斯文者 出於人心之所同然 而喟然有擊節相感者否
歲 戊辰 仲秋 金始煥記

합천향교 명륜당 중수기 
나라가 해좌海左에 위치位置하여 오랑캐라는 누명이 있으나, 중국中國의 교敎가 있음은 우리나라가 곧 그러하다. 우리 선조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으리를 가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구주九疇와 팔조八條를 펴서 예절과 사랑으로 우리의 포악함을 바르게 인도하고 떳떳한 인륜人倫으로 우리의 난장이 같음을 쳐다보게 하여 중국문화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선조들께서는 불행不幸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다행多幸함이 아니라. 이어서 계묘년癸卯年에 명령을 받아 주周나라 제도制度를 따라 공자님의 사당을 반수泮水곁에 세워서 임금이 제사지내고, 또 모든 고을에 명령하여 각각 하나씩 사당을 세우되 중앙제도와 같이하게 하고 또 곁에 강당講堂을 세워서 명륜당明倫堂이라 현판하고 향민중鄕民中에 자질이 뛰어난 자들을 모아서 날마다 거처하면서 충효忠孝와 예의禮義의 도道를 익히고 밝히니 성도聖道를 높이고 인격人格을 세워서 국가國家를 유지 하는 바가 대개 三百年인데 하루같이 하였으니 기자箕子님의 구주九疇로 교인敎人하신 덕화가 이에 비로소 크게 밝아져서 아래는 윗 뜻을 순종하고 아들은 아버지 말씀을 겁내서 어리석은 사람이 인印을 가져도 백리내百里內가 명령을 따르고 약한 자손이 살림을 살아도 포악한 노예가 이르지 아니하는데
영남嶺南은 우리나라의 추로鄒魯라. 국정國政이 융성할 때 4선생四先生의 도학문장道學文章이 이미 일세一世에 모범되고 빛났으며 그 밖에 절개를 지키고 순국한 의사義士가 위급할 때를 당해 무용武勇을 발휘하였더니 지금은 흉도를 이 하늘을 욕되게 하는데 여러 군郡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여 영남嶺南 전체가 의사義士 없는 하북河北과 같은 땅이 되니 인륜이 무너짐이 영남嶺南보다 더 심한 곳이 없고 명륜당明倫堂도 옛것이 되었다. 선조들이 이때에 나셨더라면 어찌하셨을까? 내가 처음 군郡에 와서 개연히 인륜人倫을 밝히고 명의를 바르게 하는데 선무先務로 삼아서 그해 가을에 술과 향을 받들어 제사하고 예의禮儀 절차를 명륜당明倫堂에서 행行하고자하니 당의 시설이 오래되어 누추하고 담은 무너져 평지 되고 연목은 썩어 부러졌다. 
민생民生의 예禮가 차가울 때와 더울 때에는 군속함이 있는 고로 생각은 고치고 싶지마는 다 해결하기가 어려워서 다음 해 봄에 목공을 시켜 고치고 고을 유림儒林을 청하여 낙성식을 하고 말하기를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은 나 자신自身을 다할 뿐이라. 부모를 받들면 효도하고 임금을 섬기면 충성하고 우애로 형제를 대하고 화합함으로 집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벗을 사귀어야 한다.
만약, 충효忠孝하는 바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고 고금과 현우賢遇의 차이가 없으니 성인聖人은 인륜의 지극함이라. 그 지극한데 이르게 되면 효孝가주는 효과는 어긋난 자식이 겁낼 줄 알고 충忠이주는 효과는 요망한 신하가 의리를 생각하나니 형제兄弟와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의 인륜에까지 미루어서 각각 그 당연한데 도달하고 인해 천하국가天下國家까지 조처하여 가는 곳마다 그러하면 어찌 군자君子의 성기성물하는 효과이며 제생諸生들의 강명講明할 바가 아니리요. 만약 춘추향례春秋享禮 때에 제기祭器가 정돈되고 학교 문을 새벽에 열면 같이 모여 별과 같이 나열하고 의관衣冠을 갖추고 이 당에 오르는 자者가 공경히 예를 따라 품위 있게 계시는 어른들을 본받고 거문고를 말미암아 비파를 점검하여 양양히 성인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이하면 누가 보고 감동하지 아니하리요. 자제子弟들의 효에 감동하여 향속鄕俗의 선善에 따름이 반드시 이로인해 이루어질 것이요. 또한 외지外地에까지 드러날 큰 선비가 많이나서 마침내 옛날 영남嶺南과 같이 되어서 성문聖門에서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後學을 열어주며 국가에 크게 도움이 있다고 할 것이니 이 어찌 명륜의明倫의 지극한 공功이아니냐? 그러한 후에야 기자箕子님의 구주九疇로 화민化民하는 효과가 빛나게 다시 세상에 밝아지고 열성조의 학교를 세우는 사람을 일으키는 문화가 아마도 상商나라 교육과 주周나라 학교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내가 이로써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요. 또 느끼는 바가 있느니 슬프다. 중국을 바라보면 내시內侍가 득세하여 군신君臣의 윤기가 끊어졌고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분별이 문란하다. 작지만 우리나라는 륜기倫氣가 떨어지지 아니하였으니 선조님의 신통한 지혜와 밝은 계산이 앉아서도 천년후에 다가올 것을 예측하여 百年동안에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니냐. 먼저 나부터 변하고 다음 중국을 변하게 하려 함이신가. 여러분이여 어찌 변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요. 변하는 길은 인륜을 밝힐뿐이라. 내가 후일後日에 이 집에 오를 것을 알지 못하니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인심人心이 동일同一한바 탄식하며 무릎을 치고 서로 감동할 자가 있을까?
무진년 8월에 김시환씀

 

 

陜川鄕校 大成殿重修記
國朝承麗季壞亂之後 斥佛敎 闡儒化 雖十室之邑 皆立學而祀夫子 尊聖之道 遠邁前世 於乎盛哉 然士之鼓敎游息者 講習其書 服行其敎 悅心願學 卽尊聖之實事 不如是 具文備禮 豈立學之意乎 陜川嶺南之一郡也 土地深僻 民俗儉嗇 有葛屨履霜之風 而士則積學治文詞 爲鄕里所推者 不可一二數 一日會于郡學 環視廟宇 慨然曰是 非夫子之官耶 桷朽漏薨 陋之甚矣 盍亟修諸 乃率私錢六百餘緡 用以它財 鳩工 始於五月下旬 至七月初 役告竣 於是 會多士而落成 咸相顧而慶曰 夫子之宮 今始完矣 小民不知有役 衆工克敏其事 是孰使之然 以致翼 職叨郡守 請記之 噫 是擧 乃百年一有之大事也 致其誠力 使廟貌 侖焉若新 不亦美哉 然竊嘗思之郡境百里之內 惟一區學校 對越聖賢 講學行禮 此其所也 而士未嘗有居業觀善之規 劑門 寂然長閉 梵宮佛于 則在在相望 其徒多者 數百人 晨夕呪偈 衆心齊一 彼何道而能然哉 卽輪回因果 有若利誘 一超頓悟 示以捷徑 故愚夫匡惑 奔走傾嚮 如不及 以大經之言 反謂之卑近 而世儒方浮沈 俗學講明 又不切 吾道之衰微 寧不可憂 陽盛而陰衰 元氣實 而邪沴自熄 理之常也 然則欲使異敎 不得肆要 在崇正學而已 噫 去聖已遠 微言雖絶 其不見之文章 布在方冊 誦貫思繹 則道在是矣 以夫子無窮之敎 思豈非施之於當日 而無不足 垂之於後世 而有餘裕哉 爲士者 奉持聖訓於千載之下 勿以致俗文 求利祿 爲急 學聚問辨 愉日孜孜 及其來游學舍 講道論藝 則皆君子儒也 然後今之修廟 其將永有辭於斯文 可不勉旃 請此 拭目而俟之
崇禎紀元 四癸卵菊月下澣 海州 吳致翼 謹記

합천향교 대성전중수기 
국조가 고려말 쇠란한 뒤를 이어서 불교佛敎를 물리치고 유교儒敎를 천명하니, 비록 몇 집의 작은 고을이라도 모두 학교를 세우고 공자님을 제사해서 존성尊聖하는 길이 멀리 전세前世에까지 미치니 아! 대단하다. 그러나 취학就學하여 공부工夫하는 선비가 그 글을 강습하고 그 가르침을 복종하여 기쁜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한다면 곧 존성하는 진실한 사업이라. 이와같지 아니하면 형식形式만 갖춘 글과 예절일뿐이니 이 어찌 학교를 세운 본의本意리요. 합천陜川은 영남嶺南의 한 군郡이라. 토지土地가 궁벽하고 민속民俗이 검소하여 조심하고 삼가는 풍습이 있고 선비는 학업을 닦아 문장文章을 이루어 향중鄕中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하나 둘 헤아리지 못한다. 어느 날에 고을 학교에 모여서 사당을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이곳에 공자님의 궁宮이 아니냐 연목이 썩고 기와에 비가 새니 추함이 심하다. 어찌 속히 수리하지 아니하리요. 이에 사재私財 육백여량六百餘兩을 내어서 물자物資를 도우고 목공木工을 선택하여 오월말에 시공始工하고 칠월초에 준공하였다. 이에 사림士林을 모아 낙성식을 하니 모두들 서로 돌아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공자님의 궁宮이 이제 비로소 완전完全하도다 하더라. 서민庶民들은 부역이라 느끼지 아니하고 목수들은 각자가 맡은바에 充實하였으니, 이것은 누구가 시켜서 그러하리요. 나 치익致翼의 직책이 군수郡守이므로 기문記文짓기를 청請하니 아! 이 일이 백년百年만에 한번 있는 대사大事라. 성력誠力을 다하여 대성전大成殿을 빛내고 새롭게 하였으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군경백리郡境百里안에 오직 학교學校에서만 성현聖賢을 대하듯이 학문學文을 강론하고 예절을 행함은 여기가 그곳인데 선비들이 직업삼아 선善을 보이는 법규가 있지 아니하여 향교문이 적적하게 깊이 닫혀있고 사찰과 불교佛家는 서로 보일만큼 많이 있으니, 그 무리가 많은데는 수백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염불하여 여러 마음이 통일되니 저는 어떠한 도道이므로 능히 이와같고. 윤회輪回는 인과因果한다는 그를듯하게 유인하여 한번 뛰어나서 깨우침이 첩경같이 보임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겁내고 의혹하여 분주하게 기울어지는 것이 불급不及한 듯하다.
육경六經의 말씀을 도리어 너무 비근卑近하다 하고 세상 선비가 바야흐로 속俗된 학문學文에 빠져서 강습이 또한 절실하지 못하니, 우리 도의 쇠퇴함이 어찌 근심되지 아니하리요. 양陽이 성盛하면 음陰이 쇠衰하고원기元氣가 실實하면 요기妖氣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라. 그러한 즉 이교異敎로 하여금 방자하지 못하게 하려면 요긴함은 정학正學을 숭상할뿐이라. 슬프다, 성인聖人이 떠나신지 이미 요원하고 미묘한 말씀이 비록 끊어졌으나 그 드러나지 않은 문장文章이 책속에 펴져 있으니 외우고 관철하고 생각을 두면 도道가 이에 있으리라.
공자님의 무궁하신 교육의 뜻이 어찌 당일에 베풀어 부족함이 없고 후세에 드리워서 여유가 있음이 아니리요 선비된 자들은 성인의 교훈을 천년하千年下에 받들어서 속문俗文을 다스림과 이권利權을 구함으로 급히 하지 말고 학교에 모여서 질문하고 변론하며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하고 다음 상급학교에 진학해서는 도덕을 강습하고 예술을 논의하면 다듬어진 선비가 되리니 그런 후에야 지금 대성전을 수리한 것이 장차 우리 도道에 길이 도움이 있으리니 가히 힘쓰지 아니하리요. 또 눈을 닦고 기다림을 강講하노라.
헌종 계묘 구월 하한에 해주 오치익 삼가 씀

 

 

大成殿重修記
我東晦軒安子 首以闢庠序 育人才 爲務雖窮他遐裔 莫不有鄕校 由是 文明之治 度越前古 陜之爲郡 介居山谷 實少且僻 然坊里戶口 自有古今之相殊 亦有前後之增減 其登帳之戶口 殆五千有寄 民俗則忠爲先 孝爲本 不超世路粉華 春絃夏誦 彬有禮義 此乃風敎之流傳也 邑之爲基 前有堤築 以備水道 而奧自辛丑壞決以來 沙礫日積 江水漸墾 地益卑陷 而庚辰水變 至有衙舍之傾圯 自是 屢有移邑之論 而事重力巨 未之果焉 歲在庚寅 知郡任穉宰 始定移邑之擧 建置于治爐 其地則南北稍遠 道里未均 吏民有還邑之思 郡候有輕移之懷 其後癸巳 閔侯致純 乃相土于舊治 南山之下 而還邑 鄕校則未能復舊 年代已久 風雨之迭侵 而校宮之不能無壞漏焉 則自鄕中章甫 屢有重修之論 而物力凋殘 未克成之 盖時則政家之管責蔑矣 至丙年之春三月 鄕會席 僉議峻發 以各自捐義 爛認商搉 而當時典校 尹一洙董役 裵雲孝 權大淳 柳己龍 金鍾琬 李太均甫 寔尹其役 竭誠彈力 程工募財 同意者 冶伽妙鳳四面 及大陽之沈門 內谷之李門 栗谷之權門也 過二年而殿階迭迭 牖戶昭敞 乃臒 環以崇墉 重修夫子廟 乃告成于戊申之春二月 五聖位 及從祀位神主 奉安于新廟 郡之耆老 會而落之 隣邑文士 咸來觀禮 杏園增彩 山水生顔 夫爲學 有本原 孝悌是也 孝悌也者 無所不在 在家則有家廟之事 於校則有貧菜之禮 其周旋升降 灌酳獻酬 於是乎盡其誠 在家則有父母 於校則有師長 其省謁喩諾 服勤諫諍 於是乎致其敬 在家則有兄弟 於校則有朋友 其友愛恭順 麗澤摩勵 於是乎推其信矣 荀能是矣 則學不出於黌序 而德成禮立 他日居於鄕 立於朝 無所往而不綽綽然矣 盍相與勉之哉 遂忘僭 而記其事實顚末 俾揭于楣
檀紀四三二一年 戊辰 六月下浣 昌寧 曺宰煥謹記

대성전중수기
우리나라 회헌선생晦軒先生 안유安裕께서 처음으로 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쓰니 비록 궁벽한 모퉁이와 먼 끝이라도 향교 없는 곳이 없으니 이로 인해서 문명의 다스림이 옛날보다 나아졌다. 합천의 모양이 산골에 자리하여 진실로 작고 궁벽하다. 면面과 리里의 호구戶囗가 고금이 다르고 앞과 뒤의 많고 적음이 있으나 호적戶籍에 등재된 호수戶數가 자못 오천이 넘고 민속民俗은 충忠을 먼저하고 효孝를 근본삼아 세상의 화려華麗함을 따르지 아니하고 봄에는 글을 읽고 여름에는 시詩를 외우고 빈빈하게 예의禮儀가 있으니 이는 풍속風俗의 유전流傳함이라. 읍邑의 묘지地가 앞에는 제방堤防이 있어서 수로水路를 정비하였는데 신축년辛丑年에 무너진 후로부터 모래와 자갈이 날로 쌓이고 강물이 점점 막혀서 땅은 더욱 낮고 함陷하여 경진년庚辰年 수해水害로 군청이 무너짐을 당하니 이로부터 누차 읍邑을 옮기자는 의본이 있었으나 사업이 중대하여 성사하지 못하였다.
경인년庚寅年에 군수 임건재林楗宰(임치재)씨가 읍邑 옮기는 일을 결정하여 야로冶爐에 건립建立하니 야로冶爐의 지형地形은 남南과 북北이 너무 멀고 길거리가 고르지 못해서 관사官吏와 백성들은 읍邑을 복원시킬 의사가 있고 군수도 가벼이 옮겼다는 생각이 있더니, 그후 계사년癸巳年에 민군수閔郡守 치순씨致純氏가 舊邑의 南山 아래 터를 잡아 읍邑을 복원하고 향교鄕校는 복구復舊하지 못하였다. 년대年代가 오래되고 비와 바람이 침노하여 대성전大成殿이 무너지고 빗물 새는 곳이 없지 아니하니 향중鄕中 유림儒林으로부터 누차 중수重修할 의논이 있었으나 물력物力이 약해서 이루지 못하였다. 대개 그때는 국가에서 관장하는 책임責任이 없으므로 병오년丙午年 3월 향회석鄕會席에서 여러 의논이 크게 이르나 각자各自가 의연금義捐金을 내기로 상세히 결정하고 당시當時에 전교典校인 윤일수尹一洙가 일을 관장하고 배운효裵雲孝, 권대형權大淳, 류기용柳己龍, 김종완金鍾琓, 이태균李太均 등 여러 선비로 그 일을 맡겨서 성력誠力을 다하게 하고 돈을 모으고 목수를 모으니 동의同意하는 분들은 야로, 가야, 묘산, 봉산면과 대양大陽의 심씨문중沈氏門中과 내곡內谷의 이씨문중李氏門中과 율곡栗谷의 권씨문중權氏門中이라. 2년을 경과하여 대성전大成殿의 뜰과 계단이 정돈되고 과 창과 문門이 밝게 빛나고, 흙 바르고, 단청하고, 돌아가면서 원장을 높여서 공자님 사당을 중수하고 무신년戊申年 2월에 오성위五聖位와 종사위從祀位 신주神主를 신묘新廟에 봉안奉安하며 준공을 고告하고 군내부노郡內父老를 모아서 낙성落成하니 이웃 고을 문사文士들이 많이 와서 예를 도왔다. 부원否園이 채색을 더하고 산수山水가 얼굴이 난다. 무릇 학업하는 것이 근본이 있으니 효孝와 제悌라. 효와 제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집에 있으면 가묘의 일이 있고, 향교에는 석전釋奠의 예가 있어서 두루 돌고 오르고 내리고 강신하고 술빚고 드리고 수작하니 이에 정성을 다하고 집에 있으면 부모가 있고 향교에는 스승과 어른이 있으니 보살피고 뵈옵고 응답하는 절차와 복종해 따르고 아뢰고 간諫하니 이에 그 공경을 다하고 집에 있으면 형제가 있고 향교에는 벗이 있어 그 우애하고 공손하고 도우고 독려하니 이에 그 신信을 넓힘이라. 진실로 이를 능히 하면 학업이 향교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고을에 거居하고 조정朝庭에 벼슬할 때 이로인해 조처하면 가는 곳마다 빚나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어찌 서로 더불어 힘쓰지 아니하리요. 마침내 참담함을 망각하고 사실의 앞뒤를 기록하여 현판에 붙이노라.
단기 4321년 무진 6월 하완에 창녕 조재환 삼가 씀

출처 및 참조
향내유림과 지도층의 요람-합천향교 허석기/세기사(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