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대마도 한국전망대(対馬島韓国展望臺)

천부인권 2026. 5. 2. 13:44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주차장

 

대마도(對馬島_쓰시마)의 최북단에 세운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는 우리나라 남해안과 부산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1703년 부산을 떠나 대마도로 향하던 조선의 역관 사신 일행 108명과 대마도 안내인 4명이 풍랑을 만나 전원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을 추모하는 위령비(慰靈碑)가 있어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의 좌표는 34°41'40.10"N 129°26'31.16"E이고, 지면고도는 68.48m으로 산정에 위치하다 보니 바람이 많은 편이다. 일본어로는 대마도 한국전망소(対馬島韓国展望所)’라고 쓰고 있다.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38권] 숙종 29년 2월 19일 갑오 1/2 기사 /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에 의하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甲(子)〔午〕 /日本渡海船覆沒, 譯官韓天錫等一百十三人, 盡渰死。 上命戶曹, 恤典別爲擧行。


일본(日本) 도해선(渡海船)이 침몰하여 역관(譯官) 한천석(韓天錫) 등 1백 13명이 모두 빠져죽었는데, 임금이 호조(戶曹)에 명하여 구휼(救恤)하는 은전을 별도로 거행하게 하였다.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위성사진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朝鮮國譯官並從者殉難霊位(조선국역관병종자순난령위)

조선국 통역관과 함께 수행원들이 환란을 만나 죽은 영령의 위패

 

170325(음력) 순난(殉難)118위의 영휘(靈諱)를 알지 못하여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란비(殉難碑)를 건립하였다. 최근 종가문고사료(宗家文庫史料)중에서 파해역관병종자성명(波海譯官並從者姓名)의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가 발견되어 오늘 순란삼백주기(殉難三百周忌)를 맞이하는 날에 조선국역관병종자순난령위(朝鮮國譯官並從者殉難霊位)’를 새겨 기리 추도(追悼)하고자 한다.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안내판

 

측면의 안내비는 일본어와 국한문 혼용체로 순란비(殉難碑)의 내력을 적었다.

조선 숙종 29년 계미(1703) 25(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한천석(韓天錫)이하 800명의 조선 역관 일행은 저녁무렵 대마도의 악포입항(鰐浦入港_와니우라 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한양(漢陽)을 비롯한 각지에서 선임된 사절(使節)은 정부양사(正副兩使)와 상관(上官) 18, 중관(中官) 54, 하관(下官) 2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대마도의 제3대 번주 종의진(藩主 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번주(新藩主)인 제5대 종의방(宗義方)의 습봉(襲封)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국가의 외교 사절단이었다.

강호시대(江戶時代) 쇄국체제하에서도 일본이 유일하게 정식으로 국교를 유지한 나라가 조선(朝鮮)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朝鮮)과의 신뢰를 지켜온 선린외교(善隣外交)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조선(朝鮮)에서 강호(江戶)까지 왕복했던 통신사(通信使)와는 달리 대마도의 부중(府中)이었던 엄원(厳原_이즈하라)까지 왕복했던 일행 100명 정도의 국가사절단이 역관(譯官)이었다. 강호막부(江戶幕府)가 조선(朝鮮)의 외교에 있어서 일본 측의 권한을 대마도번(對馬島藩)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진정한 선린외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역관(譯官)이라고 하겠다. 강호시대(江戶時代) 조선(朝鮮)의 사료(史料)를 보면 역관(譯官)이 대마도를 방문한 것이 무려 51회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험한 풍랑속에 묻힌 이 역관일행(譯官一行)의 배에는 4명의 대마번사(對馬藩士)도 승선하여 비운을 함께 하였다. 오늘날 점차 더해가는 한·일교류(·日交流)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정성과 믿음으로 이웃 나라와 사귐)의 정신으로 순사(殉死-목숨을 받침) 일행의 넋을 위로하며 양국간의 영원한 우호증진(友好增進)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여기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써 비()를 세워 길이 현창(顕彰)코자 한다.

 

26.4.6.대마도_악포항-한국전망대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38권, 숙종 29년 3월 5일 경술 1/1 기사 /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庚戌/引見大臣、備局諸臣。 先是, 倭譯韓天錫等, 船敗後七日, 倭人報于萊府, 府使朴泰恒, 怒其稽報, 且以屍體、器物之無拯出者, 疑或有詐, 詰責館守倭甚急, 撤館中廩米及差倭宴代、官倭開市以窘之, 居數十日, 倭始持私書來言: "拯得八屍, 具棺槨、斂襲, 別定護屍差倭, 方乘船候風。" 云。 泰恒猶不之信, 督令刻期運來, 諸屍親聞倭報至, 突入館門, 打傷三倭。 泰恒略示呵禁, 以狀具聞于朝, 至是, 上謂筵臣曰: "風濤敗溺, 非人力可容之地, 萊府致疑, 殊涉太過。 且彼旣拯得八屍, 乘風出來, 自是早晩事, 何必以飛船, 連續督迫乎? 彼人亦將笑其顚倒矣。 須速回諭, 勿復苛責。" 禮曹判書金鎭龜曰: "頃日對馬舊島主送別單, 朝廷例有回賜, 朴泰恒報于臣曹曰: ‘彼送新銀, 我國回賜, 亦宜計劣以給。’ 臣依其言, 減送, 試令量宜出給, 仍及不必爭較之意。 泰恒徑給後去別幅, 倭怒曰: ‘何比前太少乎?’ 答云: ‘汝島主所送, 非舊銀, 故如此。’ 倭又曰: ‘新銀通行已久, 回賜安可減也?’ 泰恒卽改給前去別幅, 而亦不稟議于朝, 處事顚錯, 大損國體。 宜加譴責。" 右議政申琓曰: "禮物贈遺, 事係重大, 任意改給, 有關後弊。 且倭館闌入之禁至嚴, 屍親情理雖痛迫, 何敢擅入, 打傷遠人乎? 爲邊臣者, 不能禁防, 狀本中只曰嚴責云者, 實甚踈緩。" 大司諫李健命曰: "我人闌入倭館, 而不之嚴徵, 則藉令彼人, 擅出作挐, 亦何以禁之?" 上曰: "不稟朝廷, 徑給禮物, 屍親闌入, 亦不禁戢, 朴泰恒拿問定罪。" 琓請還許供給及開市, 以示寬大之意, 從之。 刑曹判書閔鎭厚曰: "屍親闌入者, 宜令本道, 査出勘罪。" 許之。 泰恒, 竟坐奪告身。 鎭龜曰: "【鎭龜時兼判義禁】 李時夏屢受刑, 無他辭, 但曰: ‘訊杖戩與世基則可知。’ 以獄體言之, 此固然矣, 第我國待朝士有別。 金戩旣登科從宦, 不宜容易加刑, 且本府刑杖至輕, 難以取服。 通語趙大壽之狀, 戩、時夏已自服, 則兩人之罪, 不以一試官兩試官而有輕重焉。 戩雖吐實, 道一已死, 無復施罪之地, 臣謂宜速收殺。 乞詢諸臣。" 琓曰: "此獄端緖難明, 奄閱累歲, 今無憑問之階。 酌處爲宜。" 兵曹判書李濡等, 咸以爲可, 獨副提學金鎭圭、掌令朴見善以爲不可。 鎭龜曰: "諸囚中沈益昌臨科, 見道一事, 與戩事自是別款, 李礥敎順億勿引道一之說頗緊, 而但順億, 追後發告, 有難的信, 餘皆枝葉, 宜各以其罪罪之矣。" 上曰: "道一身死, 無路推覈, 詳考文案, 罪狀已著與未著者, 竝稟決。"
【史臣曰: "國家之設刑官, 所以明王法討有罪也。 以考官而私擧子, 人臣極罪。 使道一, 誠有是事, 王法不可逭也, 苟非然者, 亦不當置之黯昧之域。 始初究覈, 良以此也。 治獄者, 旣失之太緩, 又從以延拖, 閱累歲而後乃曰: ‘戩, 朝官, 不宜加刑, 道一已死, 無施罪之地。’ 人之有罪無罪, 自有公案, 其生其死, 本非可論, 而道一生則究覈, 死則酌處, 前後所爲, 得無近於爲人求罪之歸耶? 設令事發於道一身死之後, 有辭連諸人在焉, 究竟其事, 在法當然。 況事發於未死之前乎? 古所稱刑不上大夫者, 蓋謂微罪而言, 豈可指論於如戩奸細之徒也? 噫! 王綱解紐, 天討不嚴, 贓汚如祥輝、濟博, 奸惡如泰晦、聖輝之輩, 倖逭顯戮, 輿憤咸激。 至若此獄, 情節多疑, 而亦不能明其有罪無罪, 以破一世之惑, 徒使黨護者, 藉爲口實。夫國有大獄, 不一究竟, 畢竟奏讞, 不過曰酌處而已, 置刑官將焉用之? 可勝痛哉!"】
濡言: "歲饑民窮, 盜賊日起, 京中無賴又結黨, 白日剽掠於城市, 自郊外數十里, 日暮人不得行, 京師戒懼, 申飭譏捕。 捕盜部將, 詗一賊於水口門外, 卽南伐院刦掠餘黨也。 賊知幾逃出, 揮長劍踰城而走。 部將窮追遶城外, 至鞍峴, 別軍職吳時中, 適與禁軍數人, 會射, 呼使竝捕, 坐視而無應者, 又遇一禁軍騎馬者, 請借騎, 亦不許, 日暮力盡, 遂失捕。 請罪時中及禁軍, 以勵他人。" 上命施棍罰。 大司諫李健命啓曰: "大靜安置罪人吳始復, 罪狀已著於鞫廳文案, 而探問服制, 難掩無將之心, 締結宦寺, 交通幽陰之逕, 當初貸死, 已極失刑。 至於柳沅不道之語, 宜伏肆市之典, 特以原疏未徹, 屛之絶島。 濟州牧使李衡祥啓本中, 竝置之稟秩, 其罔畏國法, 偏護私黨, 可謂無忌憚之甚者。 請李衡祥削奪官爵。" 上曰: "依啓。" 又啓曰: "將兵之臣, 不得任意下鄕, 乃所以重兵柄而嚴國體也。 前例有無, 固不暇論, 而臺章峻發, 雖未準請, 公議之嚴, 從可知矣。 韓城君 李基夏, 乃幸前日之受暇, 徑往經宿之地, 其輕臺啓、任行止之習, 不可不懲。 請從重推考。" 上曰: "旣受由暇, 未知其行止擅便也。 不允。" 又啓曰: "向者有一南來守宰之子, 行到銅雀津, 發怒船人之不卽出待, 放火其家, 盡爲燒燼。 人家放火, 自有常律, 而布衣白徒, 恣行無忌。 請令嚴査得實, 依律定罪。" 上卽從之。 又啓曰: "國家不幸, 連歲荐饑, 諸道流丐, 來聚都下者, 日以增加, 有司無以接濟, 至請領還本土云。 此皆無産業、無田土之民也。 如有一分支堪之勢, 豈肯輕離鄕里, 流離道路乎? 今雖領付本道, 朝至夕發, 必無安頓之理, 只益其往來顚仆之患。 況此輩負抱携持, 仰哺京師, 實有父母孔邇之意, 而今乃一切驅迫, 使之歸死, 大乖王者惻隱之政。 且京師不能接濟, 而責外方之賑活者, 亦已舛矣。 請令賑廳, 更議設粥或乾糧, 以爲濟活之策。" 上曰: "令該廳稟處。" 金鎭圭極論李基夏縱肆之狀, 請允。 臺啓曰: "委兵柄者, 固宜優待, 而亦不可不念駕馭之道。" 上曰: "將臣雖重, 有罪當罪。 申汝哲, 老將耳。 頃年陵幸, 以失律拿入削職, 予之不專在於優待, 可知矣。 今基夏之行, 旣許由暇, 又何可從而罪之乎?" 其後屢啓爭之, 上終不許。 見善啓曰: "考官獄事, 至有酌處之命, 臣竊以爲不然也。 以獄體言之, 不爲究竟, 終涉苟且。 雖以吳道一身故, 有所參酌, 道一之有罪無罪, 未及辨別, 則何可以其身之不在, 而仍置不論也? 且獄事設有大於此者, 必以淹延爲慮, 每加酌處, 則日後之弊, 亦不可勝言。 請還收酌處之命。" 上不允。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먼저 왜역(倭譯) 한천석(韓天錫) 등의 배가 침몰된 후 7일 만에 왜인(倭人)이 동래부(東萊府)에 보고하니, 부사(府使) 박태항(朴泰恒)이 그들이 늦게 보고한 것에 노여워하고, 또 시체(屍體)와 기물(器物)을 건져 낸 것이 없다고 하여 혹시 속임이 있는가 의심하여 관수(館守) 왜인을 힐책(詰責)하기를 몹시 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중(館中)의 늠미(廩米)와 차왜(差倭)083) 의 잔치와 대관왜(代官倭)084) 의 개시(開市)를 철폐하여 그들을 곤궁하게 하였는데, 수십 일이 지나자 왜인이 비로소 사서(私書)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8명의 시체를 건져 내어 관곽(棺槨)과 염습(斂襲)을 갖추고, 따로 호시(護屍)하는 차왜(差倭)를 정하여 바야흐로 배를 타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박태항은 그래도 믿지 않고서 독촉하여 기한을 정해 운반해 오게 하였는데, 여러 시친(屍親)085) 이 왜인의 보고가 온 것을 듣자 관문(館門)에 뛰어 들어가서 8명의 왜인을 구타해 상해하였다. 박태항이 약간 꾸짖어 금하는 뜻을 보이고 장계(狀啓)로 조정에 상세히 아뢰었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풍파로 배가 침몰되었으니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처지인데, 동래 부사가 의심한 것은 매우 너무 지나친 일이다. 또 저들이 이미 8명의 시체를 건져 찾았으니 순풍(順風)을 타고 나올 것은 조만간의 일인데, 어찌 비선(飛船)으로 연달아 독촉할 필요가 있겠는가? 저 사람들도 그 허둥거림을 비웃을 것이니, 모름지기 빨리 회유(回諭)하여 다시는 가혹하게 꾸짖지 말게 하라."
하니, 예조 판서 김진귀(金鎭龜)가 아뢰기를,
"전일에 대마도(對馬島)의 구도주(舊島主)가 별단(別單)을 보냈으므로 조정에서 전례대로 회사(回賜)함이 있었는데, 박태항이 신의 예조(禮曹)에 보고하기를, ‘저들이 신은(新銀)을 보냈으니, 우리 나라의 회사(回賜)도 마땅히 나쁜 것을 헤아려 주어야 한다.’고 하기에, 신이 그 말에 의하여 수량을 감해 보내면서 시험 삼아 적당하게 헤아려서 내어주게 하고, 이내 비교해 다툴 필요는 없다는 뜻을 언급하였습니다. 박태항이 바로 준 뒤에 별폭(別幅)이 가자, 왜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전에 비해 아주 적으냐?’고 하므로, 답하기를, ‘너희 도주(島主)가 보낸 것이 구은(舊銀)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했다.’고 하였습니다. 왜인이 또 말하기를, ‘신은(新銀)을 통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회사(回賜)를 어찌 감할 수 있는가?’라고 하므로, 박태항이 곧 전에 간 별폭(別幅)을 고쳐서 주고도 조정에 품의(稟議)하지 아니하였으니, 처리하는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 국가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으므로, 마땅히 견책(譴責)을 가해야 합니다."
하고, 우의정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예물을 주는 것은 일이 중대한 것인데, 마음대로 고쳐 주었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며, 또 왜관(倭館)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는 법이 지극히 엄한데, 시친(屍親)의 정리(情理)가 비록 애통하고 박절할지라도, 어찌 감히 마음대로 들어가서 먼 나라 사람을 구타해 상하게 하겠습니까? 변경 신하가 능히 금방(禁防)하지 못하고 장본(狀本)가운데 단지 이르기를,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 것은 진실로 매우 허술하고 느슨합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왜관(倭館)에 함부로 들어갔는데도 엄하게 징계하지 아니하였으니, 가령 저 사람들이 마음대로 나와서 난동을 일으키더라도 어떻게 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 품(稟)하지 않고서 예물을 바로 주었고, 시체의 친족이 왜관에 함부로 들어간 것 또한 금지시키지 못하였으니, 박태항을 나문(拿問)하여 정죄하라."
하였다. 신완이, 공급(供給)과 개시(開市)를 도로 허가하여 관대한 뜻을 보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시친(屍親)으로 왜관에 함부로 들어간 자는, 마땅히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죄를 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이를 허락하고, 박태항은 마침내 죄를 받아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김진귀(金鎭龜) 【김진귀는 이 때 판의금(判義禁)을 겸하였다.】 가 말하기를,
"이시하(李時夏)는 여러 번 형(刑)을 받았으나 다른 변명의 말이 없고 다만 말하기를, ‘김전(金戩)과 유세기(兪世基)를 신장(訊杖)하면 알 수 있다.’고 하니, 옥체(獄體)로써 말하면 이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조사(朝士)를 대우함이 특별함이 있는데, 김전(金戩)은 과거(科擧)에 올라 벼슬에 종사하니 쉽사리 형을 가할 수 없으며, 또 본부(本府)의 형장(刑杖)이 지극히 가벼워서 승복(承服)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조대수(趙大壽)에게 말을 통한 형상은 김전과 이시하가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두 사람의 죄는 한 시관(試官)이냐 두 시관이냐로 경중(輕重)을 두어서는 아니됩니다. 김전은 비록 일의 내용을 사실대로 말하였다 하더라도, 오도일(吳道一)이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 죄를 시행할 곳이 없으니, 신은 마땅히 빨리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컨대,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소서."
하고, 신완은 말하기를,
"이 옥사(獄事)는 단서를 밝히기가 어렵고 문득 여러 해를 넘겨 지금 빙문(憑問)할 길이 없으니, 참작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이유(李濡) 등은 모두 옳다고 하였으나, 유독 부제학(副提學) 김진규(金鎭圭)와 장령(掌令) 박견선(朴見善)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김진귀가 말하기를,
"여러 죄수 가운데 심익창(沈益昌)이 과거(科擧)에 임하여 오도일을 본 일은, 김전(金戩)의 일과는 절로 별개의 사항이 되고, 이현(李礥)이 정순억(鄭順億)에게 ‘오도일을 끌어대지 말도록 시켰다.’는 말은 자못 긴요한 것인데도, 다만 정순억이 추후(追後)에 발고(發告)하였으니 확실히 믿기는 어려움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지엽(枝葉)이므로 마땅히 각각 그 죄로써 처벌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도일이 죽어서 추핵(推覈)할 길이 없으니,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죄상(罪狀)이 이미 드러난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아울러 품결(稟決)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에서 형관(刑官)을 설치한 것은 왕법(王法)을 밝히고 죄가 있는 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고관(考官)으로서 거자(擧子)에게 사정(私情)을 쓴 것은 신하의 지극한 죄여서, 오도일에게 진실로 이 일이 있었다면 국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한 애매한 지경에 둘 수 없으니, 시초에 구핵(究覈)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옥사를 다스리는 자가 이미 너무 느슨한 실수를 범했는데, 또 뒤따라 시일을 끌어서 여러 해를 지난 뒤에야 말하기를, ‘김전은 조관(朝官)이므로 형을 가할 수 없고, 오도일은 이미 죽었으니 죄를 시행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죄가 있고 없음은 스스로 공안(公案)이 있으니, 그가 살고 죽은 것은 본래 논할 것이 아닌데, 오도일이 살았으면 구핵(究覈)하고 죽었으면 참작(參酌)해 처리하는 것은 전후의 하는 일이 사람을 위해 죄를 구한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설령 일이 오도일이 죽은 뒤에 발각되었다 하더라도 관련된 여러 사람이 있으니, 그 일을 끝까지 조사하는 것이 법에 있어서 당연한 것인데, 하물며 일이 죽기 전에 발각된 것이겠는가? 옛날에 이른바 ‘형(刑)은 대부(大夫)에게 시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대개 작은 죄를 가지고 말한 것이지, 어찌 김전과 같은 간세(奸細)한 무리를 가리켜 논할 수 있겠는가? 아! 나라의 기강이 풀어지고 죄를 다스림이 엄하지 못하여, 이상휘(李祥輝)·우제박(禹濟博)처럼 장오(贓汚)하고, 박태회(朴泰晦)·이성휘(李聖輝)처럼 간악(奸惡)한 무리가 요행히 죽음을 면하여 여분(輿憤)이 모두 결렬하였다. 이 옥사에 이르러서는 정절(情節)이 의심스러움이 많은데, 역시 그 죄가 있고 없음을 능히 밝혀서 온 세상의 의혹을 풀어주지 못하고 한갓 당(黨)을 옹호하는 자로 하여금 빙자해 구실(口實)로 삼게 하였다. 대체 나라에 큰 옥사가 있는데 하나도 끝까지 조사하지 못하고, 마침내 주언(奏讞)086) 이 ‘참작해 처리하라.’고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니, 형관(刑官)을 두어서 어디에 쓰겠는가? 통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흉년이 들고 백성이 곤궁하여 도적이 날마다 일어나고, 서울 안 무뢰배(無賴輩)가 또 도당(徒黨)을 결합하여 대낮에 성시(城市)를 약탈하여, 교외(郊外) 수십 리부터는 해가 저물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며, 서울에서는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기포(諧浦)하기를 신칙하였습니다. 포도 부장(捕盜部將)이 한 명의 도적을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정탐하였는 바, 바로 남벌원(南伐院)을 겁략(劫掠)한 여당(餘黨)이었는데, 도적이 기미를 알고는 도망쳐 나가면서 긴 칼을 휘두르며 성(城)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부장이 끝까지 쫓아서 성 밖을 둘러 안현(鞍峴)에 이르자, 별군직(別軍職) 오시중(吳時中)이 마침 금군(禁軍) 두어 사람과 모여서 활을 쏘고 있었으므로, 불러서 함께 잡도록 하였으나 앉아서 보기만 하고 응하는 자가 없었고, 또 한 명의 금군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만나서 말을 빌어 타기를 청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날은 저물고 힘이 다하여 드디어 잡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오시중과 금군을 처벌하여 다른 사람을 격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곤벌(棍罰)을 시행하기를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대정현(大靜縣)에 안치(安置)된 죄인 오시복(吳始復)의 죄상(罪狀)이 이미 국청문안(鞫廳文案)에 드러났는데, 복제(服制)를 탐문(探問)하였으니 불순한 마음을 덮을 수 없고, 환시(宦寺)를 결탁하여 궁궐 안의 일을 통하였으니 당초에 죽음을 용서한 것이 이미 크게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유항(柳沆)의 부도(不道)한 말에 이르러서는 마따히 사시(肆市)087) 의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특별히 원소(原疏)가 위에 전달되지 않은 이유로써 절도(絶島)에 귀양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형상(李衡祥)의 계본(啓本) 가운데 모두 품질(稟秩)에 두었으니,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당(私黨)을 치우치게 두호한 것으로 기탄함이 심히 없는 자라고 이를 만합니다. 청컨대 이형상은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가 마음대로 시골에 내려갈 수 없는 것은, 바로 병권(兵權)을 소중히 여기고 국체(國體)를 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례(前例)가 있고 없음은 진실로 논할 겨를이 없으며, 대간(臺諫)의 상소가 준엄하게 발론(發論)되어 비록 준청(準請)하지는 못했지만, 공의(公議)의 엄함을 따라서 알 수 있었을 것인데, 한성군(漢城君) 이기하(李基夏)는 전일에 휴가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하룻밤을 지내야 할 곳을 바로 갔으니, 대계(臺啓)를 가볍게 여기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휴가를 받았으니, 그 행동이 마음대로 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번에 어떤 남쪽에서 오는 수령의 아들이 동작진(銅雀津)에 이르러, 뱃사람이 즉시 나와 기다리지 아니함을 노여워하여 그 집에 불을 놓아 모두 불살랐습니다. 남의 집에 방화하는 것은 스스로 일정한 형률(刑律)이 있는데, 포의 백도(布衣白徒)088) 가 방자하게 행동하며 거리낌이 없으니, 청컨대 엄중히 조사해 사실을 밝혀서 형률에 의해 죄를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곧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서울에 와 모이는 여러 도(道)의 거지가 날마다 증가하여 유사(有司)가 접제(接濟)할 수 없으므로, 본도로 돌려보내기를 청하는 데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산업(産業)이 없고 전토가 없는 백성인데, 만일 조금이라도 유지해 견딜 만한 형편이 있으면, 어찌 고향을 가볍게 떠나서 도로에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본도에 딸려 보낸다 하더라도, 아침에 도착되면 저녁에 떠나게 되므로 반드시 안정될 이치가 없고, 다만 오고 가면서 넘어질 근심만 더할 뿐입니다. 하물며 이 무리는 어린아이를 안고 노인을 부축하여 서울에 와서 얻어 먹기를 바라고 있으니, 실로 부모 가까이 있겠다는 뜻을 가졌는데, 이제 일체 구박하여 돌아가서 죽게 한다면 왕자(王者)의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정치에 아주 어긋납니다. 또, 서울에서 능히 접제하지 못하면서 외방에서 구호해 살리기를 책임지우는 것 또한 이미 틀린 일입니다. 청컨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죽(粥)을 마련하거나 혹은 마른 식량을 주어 구제해 살리른 계책을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김진규(金鎭圭)가 이기하(李基夏)의 방자한 형상을 남김없이 극론(極論)하여 대계(臺啓)를 윤허하기를 청하기를,
"병권(兵權)을 위임한 자는 마땅히 우대해야 하지만, 또한 제어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신(將臣)이 비록 중할지라도 죄가 있으면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한다. 신여철(申汝哲)은 늙은 장수인데, 지난해 능행(陵幸) 때에 규율(規律)을 잃은 까닭으로써 잡아들여서 삭직(削職)하였으니, 내가 우대하는 데에만 오로지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알 것이다. 지금 이기하가 시골에 간 것은 이미 휴가를 허락하였기 때문인데, 또 어찌 뒤따라 죄주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아뢰어 간(諫)했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박견선(朴見善)이 아뢰기를,
"고관(考官)의 옥사(獄事)를 참작해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옥사의 체통으로 말하자면, 끝까지 구핵(究覈)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구차하게 됩니다. 비록 오도일(吳道一)이 사망한 까닭으로 참작하는 바가 있을지라도, 오도일의 죄가 있고 없음을 미처 분별하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몸이 살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겠습니까? 또 옥사가 만일 이보다 큰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오래 끄는 것을 염려하여 매양 참작해 처리하도록 한다면, 후일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참작해 처리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註 083] 차왜(差倭) : 일본 관백(關伯)의 명을 받아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우리 나라에 보내던 사자(使者).
[註 084] 대관왜(代官倭) : 대마 도주가 보내어 왜관(倭館)에 와 있으면서 공무(公貿)·사무(私貿) 등의 일을 보는 왜인.
[註 085] 시친(屍親) : 죽은 자의 친척.
[註 086] 주언(奏讞) : 죄를 결정하여 주달함.
[註 087] 사시(肆市) : 저자에서 처형함.
[註 088] 포의 백도(布衣白徒) : 벼슬이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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