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책과 기록

효열자실록(孝烈慈實錄)

천부인권 2026. 5. 17. 14:36

 

2026512훈민정음(북코아)에서 만원에 구입한 孝烈慈實錄(효열자실록)은 한지 겹장이며,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으로 엮은 책이다. 19893월에 발행한 듯하나 인쇄의 내력은 없다. 책은 단권으로 크기는 가로 22.4cm, 세로 30cm이고, 내용은 순 한문이며 내용은 55장, 명첩록이 13장으로 총 136쪽이다.

책의 목차는 없고 권두에 정언(正言) ‘금시술(琴詩述)’이 지은 조씨효열자삼행실록(趙氏孝烈慈三行實錄)이 실렸고, 권익준(權翊準)이 쓴 안동군 북후면 보고서(安東郡北後面報狀)과 동장(洞長) 강상원(姜尙元)각동통문(各洞通文)을 비롯해 권종규(權宗奎), 장동엽(張東燁), 강상원(姜尙元) 등이 올린 정부백상(呈府伯狀; 고을 수령에게 소장을 올림)과 정순영문(呈巡營文), 정부백상(呈府伯狀), 정순상문(呈巡相文) 등의 글이 다수 있다. 책의 말미에는 오대손 우원(五代孫 友遠), 육대손 병구(六代孫 鏞龜), 육대손 병율(六代孫 鏞律)의 발()이 붙어 있고, 칠대손 명구(七代孫 命求)의 후식(後識)이 있으며, 명첩록(名帖錄)이 붙어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효열부조씨[孝烈趙氏;1792(정조 6)~1861(철종 12)]는 함안 조경호(趙景浩)의 여식으로 안동의 강사윤(姜思允)에게 시집을 갔으나 2년 만에 남편이 죽자 자결하려 했으나 사람들의 만류로 자식과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면서 행적과 이적을 행한 것에 효열(孝烈)로 보고되어 孝烈慈實錄이 만들어졌다.

아래에는 조씨효열자삼행실록(趙氏孝烈慈三行實錄), 안동군북후면보장(安東郡北後面報狀), 각동통문(各洞通文)을 옮겨 둔다.

 

 

조씨효열자삼행실록(趙氏孝烈慈三行實錄)

安東府北後面 俊才姜思允妻咸趙氏生長於窮閻 其見識不出農圃井臼之外 而惟其天性無豐嗇之殊 故猶知愛其親敬 所尊之爲可好矣 年二十歸于 姜氏夫妻相對之際 恭執婦道養 舅姑菽水之養 甘毳之供 躬自措辦艱備用 而不使舅姑知 其艱苦之狀 鄕隣觀感 而艷服雖愚夫癡兒皆 以孝婦目之敬 而不敢慢焉 居二年奄遭崩城之痛 舉復之夕 椎胷呌號幾 絶復甦者數矣 家人慮其自裁多方防護 趙氏輒掩泣 曰吾既失所天一線殘縷 固無足惜 而弟念八耋 舅姑無他子姓 吾夫臨化之託 不啻申申 則若從吾所志 是棄夫治命也 吾夫之目不瞑於地下矣 且吾夫血脉在於兩歲孤孩 而吾若溘然 則無人看護必不保殘命矣 顧此薄命爲人婦 而使夫家不祀不但 爲不孝莫大之罪也 忍使亡靈永無所依託耶 遂節哀忍痛料理喪事 自殯殮至 葬祭必誠 必愼小無遺憾 自處以罔赦罪人 而不欲舉顏對人食素三年所食者 䟽糲草具也 所服者粗布短裳也 朝夕上食輒吞聲不哭恐傷舅姑意 日上墓大痛 以洩其哀淚着墓草草 爲之枯山谿之茅 塞者研然成路行旅指點名 以烈婦洞樵牧 亦自相戒飭勿敢近塋 域義烈之感人類 此天不悔禍舅姑 以天年終趙氏哀痛哭踊尤有甚 於哭夫之日 是乃相依 爲命之餘猝當罔極思火之心 益切自不覺 其哀毁幾絕也 送終之節殫誠盡力極 其豊潔吊者咸歎 其孝烈之萃一身盖 其根於孝者 既深且篤所 以發爲烈者 自甭卓絕孝烈之本 無二殷從可驗矣 孝是其家相傳之世德 故其子娶婦承家亦 以其母所事舅姑者欲事 其母而每進珎味華服 則輒 曰此吾所未奉 於吾夫者 吾豈忍安之乎 一倂揮却一家化 而亦不近華美之物 其夫復衣輒收 以作枕塊臥 則着首坐 則置膝未嘗暫離歲久垢汚家人請澣濯輒悵 然揮淚

曰吾夫之汗澤在 是吾夫之精靈 亦安知不棲於此乎 吾夢寐之間 若或相遇 而如平生歡者 皆此枕之以也 此物當與吾身同終始豈可洗去耶 雖弊壞不可改 爲勿之洗濯也 其思慕之情 愈久而愈不忘三十年如一日 又其子久患骨疽多方藥治 而無效醫言得花蛇回復乃可療治時 當冬月萬無求得之理 趙氏晨夜號天 而祝之 曰天胡偏割 我家既奪 其父又厄其子也 其仁天廣覆之理乎 顧未亡人請代 其殘命以存夫之嗣 是固至願 而亦有藉手顯報 於地下矣 慽其辭甚可動天心矣 忽有赤蛇七首蜿然 自見於冰雪中取 而用之其病良 己玆豈非孝烈之推 而存玆而效其異者也 里人感其孝烈私復其戶

正言琴詩述撰

 

조씨효열자삼행실록 (趙氏孝烈慈三行實錄)

안동부 북후면(北後面)의 재주 있는 선비 강사윤(姜思允)의 아내 함안 조씨(咸安 趙氏)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자라나 그 견문이 농사짓고 길쌈하며 우물질하고 절구질하는 일 구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이 풍족함과 인색함의 차이가 없었기에,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스무 살에 강씨 집안으로 시집와 부부가 서로 마주할 때 공경히 부도(婦道)를 집행하였고, 시부모를 섬길 때는 거친 음식이나마 정성껏 대접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기 위해 몸소 힘들게 마련하고 끊이지 않도록 준비하면서도, 시부모에게는 그 간고한 형편을 알지 못하게 했다. 향리 이웃들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부러워하고 탄복하니, 비록 어리석은 사내나 철없는 아이라 할지라도 모두 '효부'라 부르며 공경하고 감히 업신여기지 못했다.

시집온 지 2년 만에 문득 남편이 죽는 청천벽력 같은 아픔을 당했다. 초상을 치르는 첫날 저녁, 가슴을 치며 부르짖어 통곡하다가 몇 번이나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집안사람들이 조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염려하여 다방면으로 방어하고 살피니, 조씨가 문득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내가 이미 하늘(남편)을 잃었으니 한 가닥 남은 목숨은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여든이 되신 시부모님께는 다른 자식이 없고, 내 남편이 임종할 때 당부한 말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내 뜻(따라 죽는 것)을 따른다면 이는 남편의 유언을 저버리는 것이니, 내 남편이 저승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내 남편의 혈육이 오직 두 살 된 고아에게만 남아 있는데, 내가 만약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돌볼 사람이 없어 반드시 그 남은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박명한 몸이 남의 아내가 되어 남편 집안의 제사를 끊어지게 한다면, 이는 불효 중에서도 이보다 더 큰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망령(亡靈)으로 하여금 영원히 의탁할 곳이 없게 하겠습니까?"

마침내 슬픔을 거두고 고통을 참으며 상사(喪事)를 돌보았다. 염습하고 빈소를 차리는 것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신중히 하여 조금도 후회가 없도록 했다. 스스로를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처신하여 남들 앞에 얼굴을 들고자 하지 않았으며, 3년 동안 소식을 하며 먹은 것은 거친 밥과 나물뿐이었고 입은 옷은 거친 베옷과 짧은 치마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릴 때는 문득 소리를 삼키며 울지 않았으니, 시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해서였다. 낮에는 무덤에 올라가 크게 통곡하여 그 슬픔을 쏟아내니, 눈물이 무덤가의 풀에 적셔져 풀이 말라 죽을 정도였다. 산골짜기의 우거진 칡넝쿨과 잡목들이 (그녀가 하도 다녀서) 매끄럽게 길이 되니, 지나가는 행인들이 손가락질하며 그곳을 '열부동(烈婦洞)'이라 이름 지었고, 땔나무하고 소 먹이는 아이들도 또한 서로 경계하고 단속하여 감히 무덤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의롭고 열렬한 행실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다.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았는지, 시부모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자 조씨의 애통해하고 곡하며 발을 구르는 모습이 남편이 죽었을 때보다 더욱 심했다. 이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오던 끝에 갑작스럽게 끝없는 슬픔을 당하여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니, 자신도 모르게 슬픔으로 몸을 상해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장례를 치르는 절차에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극진히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니, 조문객들이 모두 "효성과 매서운 고개가 한 몸에 모였다"라며 탄탄했다. 대개 그 효성에 뿌리박은 것이 이미 깊고도 두터웠기에, 열행(烈行)으로 발현된 것 역시 자연히 탁월했던 것이다. 효성과 열행의 근본이 둘이 아님을 이로써 증명할 수 있다.

효성은 그 집안에 서로 전해 내려오는 대대의 미덕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아들이 아내를 맞아 가업을 이을 때, 어머니가 시부모를 섬기던 법을 본받아 그 어머니를 섬기고자 하여 매번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옷을 올렸다. 그러면 조씨는 문득 말했다.

"이것은 내가 내 남편에게 받들어 드리지 못했던 것인데, 내가 어찌 차마 마음 편히 누리겠느냐?" 하고는 일체 물리쳤으며, 온 집안을 교화하여 역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남편이 살아생전 입었던 옷을 거두어 베개 모양으로 뭉쳐서 누울 때는 머리를 받치고 앉을 때는 무릎 위에 두며 한 번도 잠시 장구한 세월 동안 떨쳐두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되어 때가 묻자 집안 사람들이 빨아 입기를 청하니, 조씨가 문득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남편의 땀방울과 손때가 여기에 남아 있고, 내 남편의 정령(精靈) 또한 어찌 이곳에 깃들어 있지 않은 줄 알겠느냐? 내가 꿈속에서 혹시라도 서로 만나 평소처럼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이 베개 덕분이다. 이 물건은 마땅히 내 몸과 시작과 끝을 함께 할 것인데 어찌 씻어버릴 수 있겠느냐? 비록 낡고 허물어지더라도 바꿀 수 없으니 세탁하지 말아라."

그 사모하는 정이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못하여 30년을 하루같이 여겼다.

또 그 아들이 오랫동안 골저(骨疽, 골수염)를 앓아 다방면으로 약을 쓰고 치료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의사가 말하기를 "까치살모사(花蛇)를 얻어 회복시켜야 비로소 치료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때가 마침 겨울철이라 도저히 구할 방도가 없었다. 조씨가 밤낮으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빌었다.

"하늘은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만 치우치게 재앙을 내리시어, 이미 그 아비를 빼앗아 가고 또 그 아들을 괴롭히십니까? 그것이 어찌 어진 하늘이 널리 만물을 덮어주는 이치이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미망인인 제가 그 남은 목숨을 대신할 테니 남편의 후사를 보존케 해주십시오. 이것이 진실로 지극한 소원이며, 또한 지하에 가서 (남편에게) 낯을 들고 고할 밑천이 되겠습니다." 그 고하는 말의 슬픔이 매우 간절하여 가히 하늘의 마음을 움직일 만했다. 그러자 문득 머리가 일곱 개인 붉은 뱀(赤蛇)이 눈바람 속에서 꿈틀거리며 스스로 나타났다. 그것을 취하여 약으로 쓰니 아들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이것이 어찌 효성과 열행이 지극하여 살아있는 이에게 미치고, 그 기이한 효험을 나타낸 것이 아니겠는가?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과 열행에 감동하여 사사로이 그 집의 역()을 면제해 주었다.

정언(正言) 금시술(琴詩述) 지음

 

 

安東郡北後面報狀

北後道村里居 幼學權翊準除書目 爲牒報事即到付官下帖內 以本邑學生姜思允妻趙氏 孝烈慈實行實蹟成冊兩件 即速修整受辭并報來事行下是如乎 民居在姜思允之隣里 趙氏孝烈行蹟目之多少矣 耳之熟也 彛好之衷成美之意 自不能已敢與同好之人 上言算路矣 今橡下帖欲 爲修報則趙氏行蹟之諸般文字及哀辭 上言後留置日下 而姑未取來在 此者只戊辰年 士林之呈衣 文一張內玆敢依 本草謄上雖甚零星 此實士林之公誦也 猶可以影響 其行蹟之萬一矣 民之向來所耳目亦不外是矣 何必更爲縷煩瀆別樣文字也哉 合下伏請照驗施行須至府 爲帖諭卽到付 巡營甘結內卽到付禮曹關內節 啓下敎曺啓辭今番 上言幷依別例發關各道詳査報來事 命下矣 各人等 上言幷爲行關 於各該道守臣使之詳 探實蹟一一具由登聞後 稟處之意敢啓 牒呈者 大都護府 傳曰 知道事批下敎 是置道內儒生等 上言十五張後錄文移爲去乎 一一詳探實蹟博採 輿論必趁四月 晦前具由啓聞 爲以稟處之地 宜當向事關 是齊後錄內幼學權翊準等 爲安東學生姜思允妻趙氏孝烈關及後錄 是置有亦關辭奉審同爰辭推覓 於狀頭人處孝烈人實蹟實行詳探博採 卽速修成冊報來 以爲趁限修啓之地 爲施甘到日時先 即報來向事 甘結是置有亦孝烈人實蹟實行成冊兩件 即速修整爰辭幷 以今十八日內星火報來 以爲及時轉報之地 宜當向事

合下 仰照驗施行須至帖者

右下狀頭幼學權翊準書

 

안동군 북후면 보고서

북후도(北後道) 촌락에 사는 유학() 권익준이 서목(書目)을 갖추어 보고합니다.

첩보(牒報)할 일입니다. 방금 관청에서 내려온 첩자(공문)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은 "본 고을의 학생 강사윤(姜思允)의 처 조씨(趙氏)의 효열 실천 행적을 담은 성책(보고서) 두 건을 즉시 수정하여 작성하고, 증언(수사)을 받아 보고하라"는 지시였습니다.

(, )는 강사윤의 이웃 마을에 살고 있어 조씨의 효열 행적을 눈으로 많이 보았고 귀로도 익히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타고난 떳떳한 도리를 좋아하는 마음과 남의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주려는 뜻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더불어 상소(上言)를 올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관청의 명을 받들어 보고서를 작성하려 하니, 조씨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글과 애사(哀辭), 상소문 등의 원본은 서울에 머물러 있어 아직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에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다만 무진년(1868)에 사림(士林)들이 어사(繡衣)에게 올렸던 글 한 장뿐입니다. 감히 그 초본에 의거해 베껴 올리니, 비록 매우 소략하고 영성(零星)하나 이것이 바로 사림들의 공통된 여론입니다.

이를 통해서도 그 행적의 만분의 일이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고 들은 바 또한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구태여 다시 번거롭고 장황하게 별도의 문자를 꾸며내겠습니까? 삼가 살피시어 시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청의 지시 및 전보 내용]

순영(도청)의 감결 및 예조의 관문(공문)에 이르기를, "상소된 내용을 살펴본바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상소는 특별한 예에 따라 각 도에 공문을 보내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소서"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각 도의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 실적을 하나하나 상세히 탐문하고 그 사유를 갖추어 임금께 보고(등문)한 뒤 처리할 뜻을 감히 아룁니다.

대도후부(안동부)에서 전함:

"알았노라"는 비답(임금의 승인)이 내려졌으므로, 도내 유생들의 상소문 15장에 기록된 내용을 이첩합니다. 하나하나 실적을 상세히 탐색하고 여론을 널리 채집하여, 반드시 4월 그믐 이전까지 사유를 갖추어 보고함으로써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학 권익준 등은 안동 학생 강사윤 처 조씨의 효열 관련 기록을 받들어 살피고, 장두(대표자)에게서 행적을 추적하여 실적과 실행을 상세히 탐문하십시오. 즉시 성책(보고서)을 작성하여 기한 내에 보고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감결이 도착한 날짜와 시간을 먼저 즉시 보고하십시오.

또한 효열 실적 보고서 두 건을 즉시 수정하고 관련 증언을 합쳐서 이번 달 18일 이내에 성화(星火)와 같이 급히 보고하여 제때 전달될 수 있게 함이 마땅합니다. 삼가 우러러 살피시어 시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하(右下) 장두(狀頭) 유학 권익준 서()

 

 

各洞通文

右文爲通諭事 本洞居姜鍾輝玆母咸安趙氏 年纔二十有二奄遭崩城之痛 其當日之不即辨𠇮 以其上有八耋之舅姑 啜啜 下有二歲之孤兒 呱呱 寧不欲死 而又不忍死矣 與其自安而自裁 孰若自苦保嗣乃歛殯之 以禮葬祭之 以禮食素三年 殘縷僅保每日上墓 叩地 呌天 塚上之草 因此而枯死 山徑之間 以之成路 關制之後 迄今三十有餘年 崩陷之痛 無異於哭夫袒括之日 奉藻之誠 不下於其夫在世之時 曁于周甲之歲 而不着輕暖之衣 曰夫在之時 不得以衣者也 不食珍羞之味 曰夫在之日 不得以供者也 平生所着者 麤衣素裳 而無異三年裏服也 至老所食者 糠粃草葉 而便同居喪之素食也 又以其夫皐復餘衫 疊被成塊 以爲平生枕藉之具 歲月愈久塵垢愈汚 以其夫汗澤之猶存 使勿洗濯 而以爲盖棺前一大重寶也 夫人育孤之日 其孤偶得骨疽 幾乎難保 醫言當用花蛇 時値冬雪 無以求得 趙氏呼天痛哭 曰汝若不起 汝父之靈 將何依乎 吾薄命, 旣不能畢命於當日 而苟延縷息至今 不死者 何所望也 如是號泣者數日矣 赤蛇七首 偃然伏出於家前巖穴之中 取以用之 病卽瘳矣 此非感天之貞烈 詎能致此乎 彛所同 孰不欽聳也 玆以通諭 爲去乎 各洞各帖 一齊收送 以爲呈 官闡幽之地 千萬幸甚.

洞長 姜尙元

公事員 金興直

 

각동통문(各洞通文)

우측의 글을 통지하는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 마을에 사는 강종휘(姜鍾輝)의 어머니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나이 겨우 스물둘에 갑자기 남편을 잃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날 바로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위로는 여든 살의 시부모님이 울고 계시고 아래로는 두 살 된 어린 자식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니, 어찌 죽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차마 죽지 못했던 것입니다.

편안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며 후사를 보존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며 마침내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예로써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3년 동안 채소만 먹으며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고, 매일 무덤에 올라 땅을 치며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무덤 위의 풀이 이 때문에 말라 죽고 산길에는 절로 길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지금까지 30여 년이 흘렀으나, 남편을 잃은 슬픔은 머리를 풀고 통곡하던 그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드는 마음은 남편이 살아있을 때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예순의 나이가 되도록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지 않으며 말하기를, “남편이 살아 계실 때 입어보지 못한 옷이다라고 하였고, 진수성찬을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남편이 살아 계실 때 대접하지 못한 맛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평생 입은 것은 거친 옷과 소박한 치마였으니 이는 3년 상복과 다름없었고, 늙어서 먹은 것은 겨와 풀잎이었으니 이는 상중의 소식(素食)과 매한가지였습니다. 또한 남편이 죽었을 때 불렀던 초혼 복(皐復)에 쓴 셔츠와 남은 옷들을 겹겹이 개어 뭉치를 만들어 평생의 베개로 삼았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먼지와 때가 묻었으나 남편의 땀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하여 씻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관을 덮기 전까지 인생의 가장 큰 보물로 여겼습니다.

부인이 홀로 자식을 키우던 날, 그 아들이 우연히 골저(骨疽, 뼈에 생기는 병)에 걸려 거의 살기 어려웠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마땅히 화사(花蛇, 꽃뱀)를 써야 한다고 하였으나, 때는 마침 겨울이라 눈이 내려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조씨 부인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통곡하기를, “네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네 아버지의 혼령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느냐? 내 팔자가 사나워 당일에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지금까지 숨을 이어온 것은 죽지 않고 무엇을 바란 것이겠느냐!” 하며 이처럼 며칠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붉은 뱀 일곱 마리가 집 앞 바위 구멍에서 얌전하게 기어 나왔고, 이를 취해 약으로 쓰니 병이 곧 나았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감동시킨 정렬(貞烈)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바이니, 그 누가 공경하고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이에 통지하오니, 각 동네와 각 마을에서는 일제히 의견을 모아 관아에 제출하여, 이 숨겨진 행실을 세상에 밝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동장(洞長) 강상원(姜尙元)

공사원(公事員) 김흥직(金興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