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천변(퇴촌산 138-1번지) 하천부지에 언제 누가 왜 이런 글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암석에 위 쪽 글귀는 깨어져 없고 아래쪽에 【心灘】이라는 의미심장한 글이 남아있다.
心(마음심) 灘(여울탄) = 마음의 여울
깨어진 글자가 한글자라면 洗心灘(세심탄=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여울)은 아닐까? 하고 상상을 해본다.
이곳이 하천을 직선으로 만들기 전 옛날 구불구불 흘러가던 물길의 가장자리로 빨래터 또는 우물이 있었는지 아니면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 숙제 하나가 생겼다.
심탄각석의 출처를 1962년 김종화가 쓴 창원군지에서 찾았다.
창원군지 하권 비지碑誌 p150에 기록된 안교형묘갈명의 기록에 "마을 앞 자연석에 세심탄洗心灘이란 이름의 글자를 새겼다"고 나온다.
安教炯墓碣銘 金柄璘
君 諱教炯 字瑞章 安氏順興之世 為東方著姓 文成公晦軒先生裕其上祖也
中世有秉節校尉諱昌恭 當己卯善類毒禍 避地南下 居嶺之咸安 三傳而有茅軒諱慜 殉龍蛇亂 是生諱明甲 副護軍 我先祖參判諱遇 秋 女壻 安之卜昌原 自此始 曾祖諱守儀 祖諱斗喆 釐社倉抹民摸坊人 立碑以頌之 考諱貞錫 繕工監假監役 妣驪州李元新女 坡平尹纘周女 昌寧成戴華女 君 尹氏出也 君以 高宗庚午四月四日 生于退村里第 卒于丁已閏二月十九日 得年四十八 葬在坊內鳳林村右赤嚴峻野 中麓癸坐原 君 自幼聰慧 始上學 善記誦 同隊莫之或先 一日 知府閔宗鎬來 呼君講所讀會史 君 年方八歲 輒朗誦無錯誤 次及字義 亦無不對 閔 嗟異之 十歲 丁母憂 執哀如成人 嘗治舉業 試法不公 則去而杜門 名其室曰彝堂 遂留心經史 又占水石於村前 名之以洗心灘 暇與朋徒 往遊 嘯詠以寄懷 立宗契以奉先祀 殖社錢以恤弱民 其篤於奉先恤窮 亦多此類也 配全義李根昌女 男秉鉉 宗鎬 泰鎬 慶鎬 達鎬 女適裴翊顓 李愚占 日 秉錶 持家狀一通 及一山趙昺奎所為傳來 要余以銘 余方病昏 無以應之 而續又遣其弟慶鎬 再三不已 下獲終辭 按叙之如右 係以銘曰
卓卓晦翁 百世貽基 中葉移植 喬木一枝 承庥席陰 厥謨無險 君生是家 篤厚其姿 命胡欠融 不究猷為 子孫諾諾 尙後在茲
창원의 집에서 태어나 자란 안희상씨가 위 내용에 대한 답으로 아래의 시를 보내어 주어 이 시가 『심탄』이라 적혀있는 글귀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하여 적어본다.
步風詠坮酌戱呈安君祉鉉(보풍영대작희정안군지현)
谷口龍湫別一區(곡구용추별일구)
盈科將盡抱村流(영과장진포촌류)
溪邊活水精神莢(계변활수정신협)
洞裏淸煙淑景幽(동리청연숙경유)
取適詩心臨石面(취적시심임석면)
忘歸春興坐灘頭(망귀춘흥좌탄두)
有時坮上風乎詠(유시대상풍호영)
物外閑情伴彼鳩(물외한정반피구)
풍영대를 거닐며 안군 지현의 소요함에 바친다.
이곳 별천지 용추계곡 입구에
마을을 안고 흐르는 물이 패인 곳을 가득 채웠네.
시냇가에 살아있는 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맑은 날 마을에 안개가 그윽하니 봄의 경치로다.
시심에 취하여 바위에 글 세기니
여울지는 어귀에 앉아 봄흥취에 돌아 갈줄 모르고.
때마침 영대위에 바람 부는데
저 바깥 한쌍의 새는 한가롭기도 하구나
작자 김사백
1929년 이병연李秉延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昌原]에 의하면 “영귀대詠歸臺”를 기록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다.
【在郡南上林前 角上淸灘 白石盤陀畝 忍齋安斗馨因名 又洗心灘 忍岩 吃窩 李根玉 古琴 孫彙秀 有詩】
군의 남쪽 상림 앞 냇가에 자리 잡고 있다. 맑은 여울물과 흰 돌들이 몇이랑이나 될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어서 인재忍齋 안두형安斗馨이 이렇게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 외에 세심탄洗心灘과 인암忍岩 등이 있다. 흘와吃窩 이근옥李根玉과 고금古琴 손휘수孫彙秀의 시詩가 있다.
창원 퇴촌동 순흥안씨 족보에 세심탄洗心灘 세글자를 바위에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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