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봉암대교와 봉암나루터

천부인권 2009. 4. 14. 23:00

 

 <봉암다리 아래 사라져 가는 마을을 지키는 사자상>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왕래하는 봉암교 아래 누구도 찾지 않아 나무와 숲에 가려 역사의 기억저편으로 사라지는 유적지를 찾았다. 그 쓸쓸함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역사의 발전이란 이름은 이렇게 흘러 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지만 그 것을 예측하지 못하면 얼마지 않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속도를 미쳐 예측하지 못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봉암동의 잊혀져가는 유적을 보았다. 기념비에 적혀있는 기대는 빛이 바랬고 봉황의 알이 날아가 버린 줄도 모르고 좋아라했던 그 때가 불과 26년 전이다. 큰길이 생기면 작은 마을은 사라져 버림을 알아야 한다.

 

 

 <표호하는 사자가 오히려 슬퍼 보임은 왜 그럴까?>

 

 

 

빠른 속도의 전철이 생기고, 더 좋은 반듯한 길이 만들어 질수록 모든 것은 결국 서울로 달려 갈 것이다. 지방의 경제는 점점 피폐해지고 서울에 예속되어 어떠한 규모의 독자성도 갖추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일본에 해저터널을 뚫어 길을 낸다면 한국의 경제도 일본에게 그렇게 잠식당할 것이다. 빠르고 좋은 길이 결코 이롭지만은 않다는 교훈을 봉암동이 잘 기억하고 있다. 표호하는 사자상 아래 봉암동의 내력을 아래와 같이 적어 두었다.

 

 

 <봉황의 알은 사자가 먹었을까?>

 

 

 

봉암다리(鳳岩橋) 내역

먼 옛날 삼백오십여년 전 우리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최명당지(最明堂址) 이곳 양지바른 나룻터에 삶의 터전을 잡아 그 이름도 봉황이 봉의 알을 품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봉암이라 부르며 옹기종기 모여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언제나 국가발전의 음지에서 가장 낙후되고 추한 모습 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 봉암대교(鳳岩大橋) 건설(建設)로 봉이 알에서 깨어 그 웅비(雄飛)의 나래를 펴며 비상(飛上)을 하고 아울러 국가종합정비사업(國家綜合整備事業)으로 초현대식 봉암대교 주택단지(住宅團地)로 변모 일신되어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 화합과 안정이 넘치는 마을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금상첨화(錦上添花) 격으로 마을 입구 도로와 도로변에 포장사업과 조경사업을 완전무결(完全無缺)하게 끝내 그야말로 이상향의 마을, 낙원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 사업이 있기까지 본 동에 남다른 관심과 정열을 쏟아주신 이판석 마산시장님께 우리 동민 일동은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1983년 10월 봉암동민 일동

 

 

 

 

 <꼬시락은 간곳 없고 금석은 풍화를 하고 있다.>

 

 

기념비(記念碑)

일찍이 봉암진 옛 나룻터가 있었고 꼬시락회로 전국에 이름이 높았던 정서와 낭만의 포구 봉암은 마산, 창원, 진해 등 3개시를 영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이며, 대 마산권의 관문이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 동안 도시의 발전에 뒤져 도약과 웅비의 나래를 펴지 못하다 그 꿈이 오늘에 결실이 되어 우람한 봉암교의 건설과 더불어 면모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했다.

이모두가 봉암동민의 자기희생(自己犧牲)과 헌신(獻身)의 숭고(崇高)한 정신이 함께 응집된 대 단합의 산물이다. 이 뜻은 봉암동의 새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의 피땀 어린 보람을 이 빗돌에 새겨 여기에 세운다.

1982년 10월 1일


사업개요(事業槪要)

공사명: 봉암동종합정비사업

개  요: 연립주택건립 7동 129세대, 택지조성 및 기반조성사업 15,056㎡,

        소공원 및 녹지조성 4,738㎡, 주택철거 247동

투자비: 1,963백만원

시행청: 마산시    시공자: 합자회사 광신건설

착  공: 1982년 5월 1일      준   공: 1982년 9월 20일

 

 

봉진비의 전경

 

 

 

봉진비(鳳津碑)

전 주사 윤군옥 보시 불망비(前主事尹君玉普施不忘碑)

이비는 1919년에 윤옥이 주민 왕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사재로 토지 10무를 뱃사공에게 사주고 구입한 배 2척을 운행케 하여 웅남, 상남 주민들을 봉암나룻터에서 무료로 승선하게 해준 공을 높이 새겨 이를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19년 10월 웅남(熊南), 상남(上南) 주민들이 세운 비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비를 세워 웅남, 상남 주민들이 그를 기린지 올해가 100년이 되는 뜻있는 해가 되었다.


   <前主事尹君玉普施不忘碑>

 

 

前主事尹君玉普施不忘碑 전주사윤군옥보시불망비

買土十畝 造船兩隻 땅 천 평을 사고 나룻배 2척을 모아서

給付篙師 濟衆種德 숙련된 뱃사공의 급여를 주고 대중을 구제하며 덕을 베풀었네.

德兮德兮 深入人人 크나 큰 덕이여! 사람마다 깊이 은덕 입었고

八垠歌頌 千古貞珉 온 세상이 칭송의 노래하니 천고에 빛날 돌이로다.

 

化主 金昌厦 화주 김창하

有司 金容寶 유사 김용보

區長 劉溶華 구장 유용화

大正 八年 十月 日 (191910월 일)

馬山府 昌原面 마산부 창원면

內西面 鳳巖里 並立 내서면 봉암리에 세우다.

 

고사(篙師) : 오랜 경험을 쌓아 배를 부리는 일에 숙련된 나이든 뱃사공

제중(濟衆) : 대중을 구제함

종덕(種德) : 다른 사람에게 은덕이 될 일을 함

 

전참의 유성구 휼불망비(前參議 劉聖龜 恤不忘碑)

일제 때 유성구는 관청에서 동민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사재로 삼년간(三年 間) 대납하여 가난한 주민들의 부담을 덜게 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생년에 베푼 은덕을 찬양하여 봉암동민이 봉암동에 세운 비이다.

 

 

  <전참의 유성구 휼불망비>

 

 

유학 정유권 공덕 불망비(幼學鄭有權功德不忘碑)

상기비문(上記碑文)은 백사십오년전 마.진간(馬.鎭間) 통행의 불편(不便)을 없애기 위하여 당시 유학(幼學) 정유권(鄭有權)공(公)의 사재(私財)를 받쳐 시공(施工)하였으므로 이 공덕을 후세에 남기고저 이 비를 건립하였음이 분명한바 금반 대교건립(今般 大橋建立)으로 부덕이(不得己) 본 비석(本 碑石)을 이전(移轉)케 되므로 고인(古人)의 유적(遺跡)이 퇴락(頽落)함을 고심(苦心) 끝에 소생(小生)이 하대석(下坮石)을 제작(製作)하여 잔락(殘落)한 문구(文句)를 상기(詳記) 하고 후세에 기리 보존(保存)코저 함이로다.

서기 1982년 11월

이전건립자 : 유재봉(尹在奉)

 

 

 <유학 정유권 공덕 불망비(幼學鄭有權功德不忘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