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 청룡대 각석

천부인권 2009. 3. 31. 07:33

 

  <용원컨트리클럽을 찾아가다보면 이곳을 만난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 청룡대(靑龍臺)

 

25호국도를 따라 부산방면으로 가다가 진해시 웅동면 가동리를 찾아 가면 길가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88호인 청용대 각석(靑龍臺 刻石)을 만나게 된다. (“용원컨트리클럽”을 찾아가는 것이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리산에 은거하기 전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낚시를 즐겼던 곳이라 전한다.


자연 암석에 60cm×35cm정도를 다듬은 다음 “청용대치원서[靑龍臺致遠書]”란 글씨 석자가 남겨있으니, 천년의 풍우를 거쳐서 오늘 날까지 날아갈듯 한 반초서체(半草書體)가 더욱 뚜렷하다.


전설에 따르면 최치원 선생이 만년의 한때를 속진(俗塵)을 모두 벗고, 이곳에서 낚시로 소일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청용대치원서[靑龍臺致遠書]”란 글은 선생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신라 헌안왕 1년(857)에 사량부, 즉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의 희종 1년(875)에 과거에 급제 했다.

877년 이른바 황소(黃巢)의 난이 중원을 어지럽힐 때 격문을 썼던바, 이 격문은 오늘 날까지 명문장으로 전해 온다.


선생의 나이28세(885)에 신라로 돌아와 보성군 태수의 벼슬을 거쳐, 벼슬이 아찬에 까지 이른다. 선생은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어나 채택이 되지 않고, 간신배가 세상을 어지럽히자 894년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주유천하의 길로 나섰다.


선생의 발길이 어떤 경로를 거쳐 웅동면 가동리에 왔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그러나 마산의 월영대나 서원곡에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천년 전 흔적 하나가 우리들 곁에 있음은 자랑 할만 한 유적이리라.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역사에서 오로지 신라만이 여왕을 배출한다. 이러한 풍습은 한반도에서 유일무이 하다. 그러면 왜 신라는 그러한 일이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 항상 의문으로 남는다.

 <길 높이보다 아래에 암석이 있다.>

 <자연 암석으로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탁본을 해놓아 두었다.>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