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신라(新羅)의 고찰(古刹)성흥사(聖興寺)

천부인권 2009. 3. 31. 17:23

 

  <팔판산을 배경으로 앉은 성흥사 입구>

신라(新羅)의 고찰(古刹)성흥사(聖興寺)


웅동면 대장리(大壯里) 180번지. 팔판산(八判山)을 바라보며, 구천동(九川洞)계곡을 따라 산 중턱에 오르면 신라 고찰 聖興寺가 있다. 신라 흥덕왕(興德王) 8년(833) 무염국사(無染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전단산(栴檀山)의 고찰 우곡사(牛谷寺)가 창건된 이듬해가 된다.


창건 당시에 聖興寺는 승려수 500명의 신라유수의 대사찰이었다고 하나 오늘 날에는 그 면모를 찾아 볼 길이 없다. 다만 불모산 일대에 남아있는 암자 터가 모두 성흥사에 따른 암자들이었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성흥사는 창건 이래 유별나게 자주 화재를 겪은 사찰이다.

일설에 따르면 화재 때문에 수사찰(首寺刹)인 해인사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는 이 절의 주지가 쫓겨나고 불상을 위시해서 그 밖의 문화재를 몽땅 해인사로 실어 가버린 일도 있다고 하며, 지금 해인사 명부전에 있는 십왕상(十王像)등은 그때 성흥사에서 옮겨간 것이란 말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성흥사는 화재로 말미암아 조선 현종 9년(1668)에 지금의 대장리 서편의 九川洞에 사찰을 옮겨지었다가 정조 13년(1789)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건(移建)이나 중건등 보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웅전은 창건당시의 원형을 그 대로 보전 유지 하여 온다고 전한다.


한편 이 성흥사는 창건유래에 얽힌 전설이 하나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흥덕왕 초년, 당시 웅천지방에 왜구의 침입이 몹시 잦았으므로 왕이 고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흥덕왕의 꿈속에 백수노인 한분이 나타나 "지리산(智異山)의 깊은 산중에 한 도승이 있을 것인즉 그를 불러 왜구를 평정케 하시오" 라고 말하였다.


이틑날 사람을 보내보았더니 과연 한 도승이 있는지라 왕은 도승을 불러 간곡한 당부를 하였다. 도승이 산위에 올라가 한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한손으로 자신의 배를 몇 번 두들기니  갑자기 마른하늘에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는지라 해상에 있는 왜구들이 신라군의 포성으로 착각하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왕은 도승의 공을 높이 치하하고 많은 전답과 재물을 도승에게 내리면서, 국사의 호칭을 하사하니 바로 무염국사(無染國師)라고 한다. 이때 내린 재물과 전답으로 이곳 구천동에서 사찰을 건립하니 오늘의 성흥사 이다.


당시의 성흥사는 무염국사의 명성을 업고 신라 굴지의 대사찰로 번창하였으나 창건한지 276년 만에 대화재로 사찰이 모두 불타버리고 대장리(大壯里)로 옮겨 앉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또 화재를 만났으니, 대장리로 옮긴지 322년 만에 다시 구천동으로 옮겨 가야만했다.


그 뒤 성흥사는 몇 차례의 재난을 겪어야만 했으니 잇단 재난 속에 어쩔 수 없이 사세가 쇠퇴하였다. 현제엔 창건 당시의 건물인 대웅전과 대불상 6위,나한상 16위,나한종관상 2위,제석상 1위, 불상연화대좌(佛像連華臺座) 3기(基),연화목제대대좌 1기와 당간지주(憧竿支柱)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또 고종27년(1890) 화주스님이 그린 무염국사의 영전이 남아 있다.


최근에 와서 사세의 중흥을 위하여 성법스님과 신도회 회장 등이 앞장서서 나한정, 칠성각, 일주문, 요사 등의 준공을 마쳐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입구에 연꽃 밭이 있다.>

 <어릴 때에 절에 들어가면 사천왕상이 무서웠는데....>

 <간촐하고 단아한 모습>

 <누군가가 놓고간 부처>

 <성흥사 대웅전>

 

성흥사 대웅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52화

경상남도 진해시 대장동


이 대웅전은 성흥사의 중심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맞배집으로는 드물게 화려한 포작을 구성하고 처마 끝을 치켜 올림으로써, 맞배집의 간결함과 함께 다포집이 갖는 화려함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기둥은 막돌로 받침대를 만들고 자연석 주춧돌을 이용해 세웠다. 지붕의 처마는 겹처마이지만 서까래의고 길이가 매우 짧고 덧서까래의 길이도 짧아 비례감을 잃고 있다.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 위 조각은 화려한 연꽃과 동물로 장식하였다. 건물의 모습과 세부 장식으로 보아 근래에 중수된 것으로, 옛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어 있다.

 <종각>

 <삼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