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함안의 문화재 장춘사를 찾아(칠북편)

천부인권 2009. 4. 4. 22:32

 

 

장춘사 입구는 너무나 소박했다

 

다시 칠원면 소재지로 와서 늦은 점심으로 설렁탕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시장이 반찬 이더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칠원은 주씨들의 나라인가?” 곳곳에 주씨들의 흔적들이 산재하고 아직도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 한이 없다.

이제는 칠북면 장춘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초행길이라 무조건 네비게이션에 의존하여 달려가니 자동차가 겨우 한대 갈 수 있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 갔다. 거의 다 왔나 싶은데 네비게이션이 우회전을 하란다.  했다!

 

 

 

 

황당한 과수원의 모습 

 

비포장 산길이 끝도 없이 계속된다. 무언가 이상타고 생각은 했지만 네비게이션은 말이 없다. 한참을 가니 감나무 농장이 나오고 철문이 앞을 막는다. 아~ 틀렸다. 밀려오는 배신감~~~~ 되돌아 나와서 장춘사에 도착했다.

입구를 보고 참 정겹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다른 절을 볼 때와 다른 느낌이다.

 

 

 

 

 

 앞 마당에 있는 장춘사 5층석탑

 

장춘사 5층석탑(長春寺 五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14

 

대웅전 앞에 자리 잡은 이탑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었는지 불분명하다. 원래는 이중받침대(二重基壇)를 갖춘 5층이었지만 지금은 4층만 남아있다. 여러 장의 돌로 짜 맞춘 하층 받침대의 갑석(甲石) 윗면에는 비교적 넓게 2단으로 중간 받침을 새겨서 상층 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몸체(塔身)는 정면에서 볼 때 위가 좁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져, 네 개의 몸체가 마치 긴 사다리꼴의 돌로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탑이 위로 치솟은 듯한 느낌을 줌과 동시에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붕돌(屋蓋石)도 첫 층의 것은 비교적 얇은데 비해 위로 올라갈수록 두툼하게 만들었고 처마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렸다.

꼭대기 부분은 장식을 받치는 받침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안전감 보다는 가늘고 긴 느낌을 준다. 탑신을 사다리꼴로 처리한 특이한 형태의 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 같은 약수가 이제는 마당에서 솟아나고 있다

 

 

 

 

장춘사 석조여래좌상(長春寺 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14

 

장춘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신라를 침략하던 왜적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자, 왕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장춘사에 모셔진 이 불상은 왼손에 약 항아리(藥器)를 들고 오른손은 부처가 악마를 누르고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을 형상화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전형적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다. 광배(光背)는 두광과 신광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특히 머리 부분의 연꽃과 불꽃 무늬가 이채롭다. 현재의 불상 모습은 원래의 석불에 금박을 입힌 것이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보인다.

약사여래불은 동방의 맑고 깨끗한 유리세계(瑠璃世界)에 머물면서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하며 무지를 고쳐주는 부처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이곳 장춘사 대웅전 우측 계곡에는 한국에서 이름난 물 100곳 중 하나로 선정된 ‘약수’가 있다. 이 약수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무염국사를 모시고 수행하던 20세의 덕원 스님이 불치의 등창과 위염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를 본 무염국사가 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새 한 마리가 유난히 지저귀는 곳이 있어 가보니, 땅에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신기하게 여긴 무염국사가 그곳을 지팡이로 찔러보니 물이 솟아났는데, 그 물을 덕원 스님에게 먹였더니 병이 깨끗이 완치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그 효험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 약수를 이용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전경

 

 

 

<대웅전 뒤 벽에 그려진 그림>

 

 

장춘사 대웅전

 

장춘사 대웅전(長春寺 大雄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14

 

장춘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초창하였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사찰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며, 남아있는 석조들이 고찰(古刹)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중창한 것이다.

대웅전 뒤편에 1칸 규모의 작은 약사전이 있으며, 거기에 신라말. 고려초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금동불상처럼 보이지만 개금(改金)한 것이며, 그 때문에 본래의 석조상의 조각 수법을 알기 어렵다.

 

 

 

 

 장춘사 전경

 

장춘사에서 내려오는 길은 일방통행이라고 한다. 임도를 따라 내려와서 우회전을 하면 “칠북면의 회화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함안 칠북면의 회화나무

 

함안 칠북면의 회화나무

천년기념물 제319호

경남 칠북면 영동리 748

 

회화나무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중국에서는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다. 또한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집안에 심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기운이 흘러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고 또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회화나무는 활엽수 중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 적합하다.

 

이 나무는 1482년경 광주 안씨의 17대 조이며 성균관 훈도를 지낸 안여거(安汝居)가 영동리에 정착하면서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므로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6m이고 둘레는 6m로 가지는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라고 믿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10일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오늘의 마지막 탐방지인 광심정(廣心亭)을 향해서 가면서 「선조들은 낙동강을 어떻게 보았으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궁금해 진다. 낙동강을 따라 가면서 옛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전번에 낙동강 탐사를 하면서 “도동서원(道東書院)”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아담한 정자의 모습>

 

광심정(廣心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7호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230

 

광심정은 1664년(현종5년) 성리학자 송지일(宋知逸)이 칠원(漆原) 북쪽 자모산 기슭 낙동강 절벽 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자신의 호를 딴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나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뒷면 2칸은 2개의 방, 정면 2칸은 개방된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확 트인 전망이 정자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측면이 정면보다 넓고 한모서리를 밀면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특수한 건축공법으로 건립되었다.

 

 

 

 

 낙동강을 굽어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