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함안 칠서 무산사 무기연당((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

천부인권 2009. 4. 4. 07:29

 

국담문집책판.hwp

 

 

무산사 찾아가는 길


함안의 문화재를 찾아

칠북. 칠원. 칠서 일대의 문화재들을 보기 위해 칠원IC로 간다는 것이 북창원IC에서 진입을 하다보니 칠서IC로 나오게 되었다. 정확하게 어디에 산재하는지를 몰라 왔다갔다 헤매었지만 다음에 나처럼 이곳을 방문하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가장 빠른 방문지를 차례대로 열거해 본다.


칠서IC 진출[후 좌회전]⇒무산사(칠서면 무릉리 544)⇒함안층의 새발자국 화석(칠원면 용산리 산4-1)[칠원면 공설운동장 뒤편에 주차]⇒칠원향교(漆原鄕校)(칠원면 용산리 299)[칠원면 공설운동장 뒤편에서 하천을 따라 올라가다 우회전하여 다리를 건넌 후 다시 우회전]⇒덕연서원(德淵書院)(칠원면 용정리 965)[칠원향교를 나오면 우회전 하여 언덕을 넘어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함안 무기리 주씨고가(咸安 舞沂里 周氏古家)(칠원면 무기리 966)[덕연서원에서 칠원면으로 다시나와 사거리에서 우회전(마산방향)하여 가다보면 무기리 표지가 나옴]⇒점심 식사는 칠원면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장춘사( 칠북면 영동리 14)[들어가는 산길과 나오는 산길이 일방통행 임. 나올 때 산길이 끝나면 2차선 도로에 진입하면서 우회전]⇒회화나무(칠북면 영동리 748)⇒광심정(칠북면 봉촌리 230)[칠북면을 거처 낙동강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다 보면 산을 넘은 후 주민에게 물어 볼 것]

 

 

무산사 앞 전경


무산사(武山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544


이곳은 본래 1591년(선조 24)에 신재(愼齋) 주세봉(周世鵬,1495~1554)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가 자리에 건립한 동림서원(桐林書院) 터였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676년(숙봉2)에 ‘덕연(德淵)’ 이란 편액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이후 1868년(고종 5)에 공포 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으로 서원이 헐리자, 선생의 영정(影幀)을 종가 사당으로 옮겼다. 그러다 1919년에 사당 옆에 전각을 세워 선생의 영정을 모셨고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곧 무산 서당이다.

건물은 서당을 중심으로 그 뒤편에 무릉사(武陵祠)와 영정을 봉안한 광풍각(光風閣), 서적과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臧板閣) 등이 능선을 따라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 배치법은 앞쪽에 교육 영역을 두고 뒤쪽에 제례 영역을 두는 일반적인 서원 배치법(前學後廟)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무산사는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제례 기능만이 남아 있다. 광풍각과 장판각에 분사 . 보관 되어 있던 선생의 영정을 비롯한 모든 유품은 1998년 이곳에 설립된 유물 전시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담장넘어로 찍은 모습


무릉잡고 책판 및 수구집, 귀봉집 책판

(武陵雜稿 冊版 및 守口集 龜蜂集 冊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73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544


이곳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신제 주세붕(周世鵬,1495~1554)과 그의 아들인 주박(周博, 1524~?) 그리고 손자 주명헌(周孟獻, 1617~1703)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다.

20권 10책으로 구성된 ‘무릉잡고(武陵雜稿)’는 1564년(명종19)에 주박이 최초로 간행하였다. 그 후 1581년(선조14)에 주박이 다시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나, 이때 만든 책판은 유실되어버렸다. 1859년(철종10)에 후손들이 다시 책판을 만들었는데, 지금 보관하고 있는 ‘무릉잡고’ 책판이 바로 그것이다. ‘무릉잡고’에는 주세붕이 쓴 시와 제문등을 비롯해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특히 문집 속에는 경기체가의 한글 가사가 여러 편 실려 있어, 당시의 가곡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권 1책의 ‘귀붕집’과 4권 2책의 ‘수구집’은 1908년에 ‘무릉잡고’의 부록을 간행할 때 함께 간행하였다. ‘귀붕집’은 주세붕의 아들인 주박의 시문집이고, ‘수구집’은 손자인 주맹헌의 시문집이다.



 

남의집 옥상에서 뒤편을 찍은 광풍각과 장판각

 

무산사에서는 관리인이 없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외곽만 구경하고 나와 칠원 공설운동장 뒤편 칠원천 넘어의 작은 산 중턱에 자리한 ‘함안한국새[Koreanaonis hamanersis Kim] 화석지를 찾아 봤다.



 

칠원천에서 마주보이는 새발자국 화석지


 

새발자국 화석을 찾아 올라가는 길


 

새발자국 화석 전체 모습


함안층의 새발자국 화석

천연기념물 제 222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용산리 산4-1


이 새발자국 화석이 있는 지층은 지금으로부터 약 8천만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함안층이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새발자국들은 대부분 ‘함안한국새[Koreanaonis hamanersis Kim]의 것이며 간혹 진동새의 발자국과 초식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섞여 있다. 함안한국새는 발가락에 물갈퀴가 없으므로 멧새일 것이며 발가락의 길이로 보아 몸집은 비둘기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백악기에는 공룡이 크게 번식한 시기였기 때문에 공룡의 발자국 화석은 많이 발견되었으나, 새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함안층의 새발자국 화석은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연구, 발표된 것이다.



 

새발자국 화석 확대한 모습

 

곧장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 다리를 건너 바로 우회전하여 길을 따라 50m를 가면 칠원 향교를 만난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회화나무가 서있고 뒤편에 풍화루가 보인다.


칠원향교(漆原鄕校)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181호

경상남도 함안국 칠원면 용산리 299


칠원향교(漆原鄕校)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칠원읍지(漆原邑誌)에 따르면 현의 서쪽에 있던 건물을 1621년[광해군13]에 현의 동쪽 삼리(三里)쯤에 옮겼다가 1700년[숙종26] 현의 서쪽인 지금의 자리에 다시 옮겼다고 하는데 당시의 건물구조 및 규모는 알 수 없다. 1906년에 칠원군이 함안군에 통합됨에 따라 칠원향교도 함안향교에 병합되었으나 1961년에 칠원의 유림이 수리하여 다시 칠원향교를 세웠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外三門), 명륜당(明倫堂), 내삼문, 대성전이 일렬로 되어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경덕사와 모현정이 있다



 

12계단 위로 팔작지붕의 풍화루가 근엄하게 서있다.


 

칠원향교의 전경

 

향교를 나와 우회전을 하고 작은 산을 넘자마자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회전을 하여 가다보면 마산에서 내려오는 광려천변 언덕에 아담하게 자리한 덕연서원(德淵書院)이 있는 용정리가 나온다. “덕연서원에서는 주세붕의 향사(享祀)를 받들면서, 이 지방의 선현들인 배세적(裵世績), 주박, 배석지, 황협(黃悏), 주맹헌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3월 초여흘 안에 제사를 지낸다.”고 앞집에 사시는 박태묵 어르신이 전해 주신다.

 


 

광려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덕연서원이 있다.


 

덕연서원 전경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67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용정리 969


1591년[선조 24]에 칠원의 사림이 이 곳에서 태어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을 모시기 위해 동림서원(桐林書院)을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다. 그 후 1660년[현종1]에 다시 남고서원(南皐書院)을 지었으며, 1676년에 덕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대원군 때 헐렸으나 1911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지어 다시 주세붕의 향사(享祀)를 받들면서 덕연서연을 복원하였다. 강당은 정명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 3칸은 마루이고 양측 1칸을 방으로 하였다. 강당 뒤에 존덕사가 있고, 그 오른쪽에 있는 덕연별사(德淵別祀)에는 이 지방의 선현들인 배세적(裵世績), 주박, 배석지, 황협(黃悏), 주맹헌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덕연별사


 

존덕사(尊德祠)의 모습

 

덕연서원에서 다시 왔던 길을 따라와서 칠원사거리를 끼고 마산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무기리 「주씨고가」로 간다. 마을 입구의 공터에 주차한 후 좌측 마을 소로를 따라가면 국담(菊潭) 주재성(周帝成, 1681~1743) 이후 주씨 집안의 종가로서 그 위상을 유지해 온「주씨고가」가 나온다.


 

 

주씨고가 입구


함안 무기리 주씨고가(咸安 舞沂里 周氏古家)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상주(尙州) 주씨(周氏) 들이 이주하여 와서 생겨난 집성촌(集姓村)이다. 이곳은 국담(菊潭) 주재성(周帝成, 1681~1743) 이후 주씨 집안의 종가로서 그 위상을 유지해 온 집이다.

이 집은 대문채와 함께 사랑채인 감은재(感恩齋), 살림집인 안채, 사당인 불조묘(不祧廟) 등으로 이루어졌다. 또 국가 지정 중요 민속자료인 하환정, 풍욕루, 국담 등의 화려한 별당(別堂)과 연못이 딸린 대규모 주택이다.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향교나 서원의 내삼문에서나 볼 수 있는 웅장한 대문채가 있어 아주 독특하다. 대문에는 주재성의 출절을 기리는 충신 표시문과 선생의 장남인 감은재 주도복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 표시문이 나란히 붙어 있다. 이 때문에 이 문을 ‘충효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이라고 부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에 중앙에 대청을 둔 소박한 건물인 감은재는 주도복 선생의 서실이다. 감은재는 선생의 호(號)이기도 한데, 언제나 부모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 효심이 엿보인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안채는 가정집에서는 보기 드문 맞배지붕을 한 점이 특이하다. 불조묘는 “영원히 위패를 옮기지 말라”는 뜻으로 1728년(영조4)에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국담 선생의 공을 인정 하여 왕명으로 세운 것이다.



 

주씨고가


국담 문집 책판(菊潭 文集 冊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국담문집」은 신재 주세붕(周世鵬)의 방손(傍孫)인 국담 주재성(周帝成, 1681~1743)의 글을 모아 1908년에 후손들이 4권 2책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곳에는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 56매가 보관되어 있다. 문집에는 그가 쓴 시와 문장, 제문(祭文)과 상소문(上疏文)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특히 1728년(영조4)에 ‘이인좌의 난’ 이 일어나자, 영남의 사림(士林)들에게 호소문을 보내 토벌을 주장한 “창의문(倡義文)”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군신의 관계를 강조한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그빡에도 문집에는 ‘삼강오륜’의 도를 밝힌 “오륜론”을 비롯하여, ‘중용’과‘대학’의 어려운 구절을 해설한 “용학강의(庸學講義)”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글들은 선생의 학문적 경지와 당시 사대부의 학문적 경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직접 의병을 일으켜 난의 옆정에 나섰으며, 군수품 조달을 위해 집안의 재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놓기도 하였다. 난이 옆정 된 후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지만 끝내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무기연당


함안 무기 연당(咸安 舞沂蓮塘)

중요민속자료 제 208호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이 곳은 조선 1728년 이인좌의 난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국담 주재성선생의 유적지이다. 국담선생은 주자학의 의리 탐구와 실천에 독실했던 재야 주자 학자로, 사후에 벼슬이 올려지고 기양서원(沂陽書院)에서 제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곳에는 연당을 중심으로 정자와 누각 등이 있고, 옆에는 국담선생의 생가가 있다. 선생의 호와 같이 국담(菊潭)으로 불리는 네모난 연못은 산돌로 둑을 쌓았고, 그 가운데에는 석가산(石假山)으로 불리는 작은 인공섬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북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하환정(何換亭)이 있고, 그 동편에는 높은 기단에 자리 잡고 있는 정면 3칸 규모의 풍욕루(風浴樓)가 있다.

국담 선생을 제향했던 기양서원은 고종 때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며, 연못 남쪽에 있는 충효사(忠孝祠는) 1971년에 세워진 것이다.


 

 

풍욕루(風浴樓 )


 

풍욕루(風浴樓) 뒤편에서본 하환정(何換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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