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함안의 문화재를 찾아(산인면-고려동)

천부인권 2009. 4. 6. 00:25

 

  <고려동 찾아가는 길>

함안의 문화재를 찾아(산인면)


동마산IC에서 진입하여 내서IC로 나가는 고속도로는 나갈 때 통행료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서IC를 나와 마산대학 앞을 지나는 1004번 국도를 따라 가다 공단지역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방향 고속도로 아래로 들어가면 기와집들이 많은 곳이 보인다. 그곳이 “고려동”으로 오늘 방문지 중 하나다. “남해고속도로로 함안 방향으로 갈 때면 산인톨게이트를 지나 우측을 보면 기와집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다.”


이오(李午)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서 절의(節義)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두문동이 불타자 떠나 이곳으로 와 마을 입구에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비석을 세워 “이곳은 조선의 땅이 아니라 영원히 고려의 땅임을 표시하고 담을 쳤다고 한다.”


이집에 살고계신 임종순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여름방학 때에 서울에서 학생들이 MT를 겸해 놀러오기도 한다.”고하시며 “집이 비어있을 때 도둑이 들어 가치가 있는 것은 훔쳐가고 심지어 문살까지 떴어가 새로 문을 달기도 했다.”고 하셨다.

 <마을 입구의 "고려동학" 표지석>

 <3,000여 평의 고려전에 논을 갈고 있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유적비>

 

고려동 유적지(高麗洞 遺蹟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의 진사(進仕)였던 이오(李午)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서 절의(節義)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곳을 택하여 담을 쌓고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비석을 세웠다. 여기에서 ‘담안’ 혹은 장내(牆內)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선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고,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담 안에 주거와 우물, 전답 등을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터를 닦았다. 이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은 600년이 넘게 이곳에서 살아왔고 고려동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재령(載寧) 이씨 후손 30여 호가 모여 살면서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高麗洞壑標碑) 고려동 담장, 고려종택(高麗宗宅), 자미단(紫微壇), 고려전(高麗田)3000여 평, 자미정(紫微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井) 등이 있었으나, 이들 건물은 한국 전쟁 동안에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호상공의 생가로 알려진 주택만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으나, 그마저 200여 년 전 것이라고 한다.

 <고려교의 모습>

 

 

백운래홍첩(白雲來鴻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88호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


‘백운래홍첩’은 고종 때 귀양을 살던 효산(曉山) 이수형(李壽瀅)에게 대원군과 그의 큰아들인 이재면(李載冕)이 보낸 편지를 모은 첩이다. 이수형에 관해 알려 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순릉 참봉(順陵參奉), 성균관 교수(成均館 敎授)를 지냈고, 고종 때 부자간의 도리를 논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가 그로 인해 평안도 강계(江界)와 강원도 평창(平昌)에서 10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것과,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내려가 심신을 수련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이 첩의 이름은 편지봉투에 흰 구름 사이를 날아가는 기러기 한 마리와 숲에서 이를 바라보는 다른 한 마리의 모습이 그려진 데서 붙여졌다. 크기는 가로 30cm, 세로 28cm로, 모두 13매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동의 전경>

 <아름다운 돌담길>

월래의 담장은 앞쪽으로는 돌담이고 뒤편에는 가시나무로 된 담장이었는데 복원을 한다고 예전의 그 모습을 살려두지 않고 모두 돌담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임종순 어르신은 안타까워 하셨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길에서 꺽어 들어가게 만든 입구가 이채롭다.

  <자미정(紫微亭) >

 <뒤편에는 연못도 있다.>

  <율간정(栗澗亭)>

  <밤선생이 문을 훔쳐가 다시 만들었다고 하신 문제의 문이다.>

 <장둑대가 잘 정비되어 있다.>

 <백일홍 나무가 골목 입구 맞은 편에 이 집안의 흥망 성쇠와 함께하며 서있다.>

저 백일홍 나무에 말을 매어 두고 내려서 이곳에 살기로 결심 했다는 이 집안의 역사와 함께하는 나무이다. 다음에 배롱나무가 꽃이 필 때 꼭 한번더 방문하고 싶다. 

 

 < 율간선생 유허비>

“고려동”을 나오는 길가에 1978년 17대손이 건립한 율간선생 유허비가 서있었고 조금 더내려오니 삼절각이 있었다.

 <삼절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