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산과 낙동강이 어울어진 곳에 절경을 이룬 정자 위치>
옛 산인 간이역 자리에서 설렁탕을 먹고 내가 아는 지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반구정(伴鷗亭)』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함안 대산면 장암리 1번지”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을 찾아가보니 2006년에 “마창기술봉사단”에서 봉사활동을 온 곳이었다. 사람이 목적에 따라 이렇게 마을이 생소해 보인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용화산은 능성이가 99개로 이루어져 있는 산으로 함안조씨들의 문중산으로 이어져오다 현재에는 많은 능성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팔렸고 『반구정(伴鷗亭)』은 용화산 능성이 넘어 낙동강을 굽어보는 곳으로 남지 유채꽃밭에서 바라보면 산 삐알에 농사를 짓는 풍경이 보이는 곳이다.
<산 중턱에서 반구정으로 내려가는 아슬아슬한 산길>
용화산 능성에서 낙동강 가로 꼬부랑길을 내려가다 낙동강에서 3부 즈음에 작은 집이 한 채 외톨이로 있으며, 650년 된 느티나무가 높이 15m, 둘레 5.5m로 마당 앞에 낙동강을 바라보고 우뚝서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남지대교와 남지는 과히 절경이다.
내가 가는 날엔 집주인은 없고 백구가 홀로 나그네를 맞이하며 쉼 없이 짖어 대었다.
<반구정엔 사람이 기거하고 있다.>
<반구대 고목 사이로 저 멀리 남지대교가 보인다.>
<합강정의 모습>
이왕 온 김에 비포장 산길을 따라 반대편으로 가다보니 용화산 자락에 또 하나의 기와집이 낙동강 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 남강을 스쳐 낙동강으로 다시 접근하니 거기에 두강이 합해진다는 뜻의 “합강정(合江亭)”이 있었다.
<간송당 문집 모습 >
<금라전신록책판>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
(澗松文集冊版 및 金纙傳信綠冊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함안군 대산면 장암면
이 책판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조임도(趙任道)의 문집인 간송문집(澗松文集)과 금라전신록(金纙傳信綠)을 간행하기 위한 것이다. 생육신 조려의 오대손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효심이 지극하여 백효(伯孝)라고 불렀다. 인조반정 후 한때 공조좌랑까지 지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를 벗 삼아 학문과 수신에 힘써, 풍수음(風樹吟), 유모가(孺慕歌), 금라전신록 등을 저술하였다.
간송집은 영조 20년(1744년)에 간행한 것이며, 금라전신록은 함안의 역사와 여말 충신 이방실 장군을 비롯한 함안 출신들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순조 13년(1813년)에 간행한 것이다. 책판의 크기는 가로 44.5cm, 세로 21.5cm이고 총 190대가 전해오고 있으며, 합강정에 보존되어 있다.
<가을철 은행나무 단풍이 아름답다는 합강정>
<낙동강과 어울어져 있는 은행나무와 합강정>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은 도둑들이 훔쳐갔으나 용케 다시 찾아와 조씨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은행나무의 웅장한 모습>
합강정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약 400년 정도이고, 수고는 22m, 둘레 4.5나 되는 거목으로 조씨문중의 조창규씨가 소유주이다.
<합강정>
합강정은 조씨문중의 중요한 문서고 인데 왜 사람이 가기에 불편한 산속에 두었는지 몰랐는데, 공부를 하다보니 역사의 필연적 운명을 알게 되었다. 임짐왜란 이후 조선의 모든 문서고는 불타고 조선실록도 전주본만 겨우 살아 남았다. 그래서 전쟁에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아무도 가지 않는 산속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산속에 누구도 가지 않아 안전하다고 믿었지만 도둑들이 방치되다 싶은 문서고에 들어와 귀중한 문화재를 훔쳐가는 수난을 당한다. 역시 역사는 돌고 또 돌아간다.
사람인적 없는 합강정에서 나와 악양루(岳陽樓)[대산면 서촌리 1156]를 향해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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