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의병장 최강(崔堈)과 안민고개 그리고 안민동

천부인권 2009. 4. 10. 08:58

 

 

의병장 최강(崔堈)과 안민고개 그리고 안민동


선조(宣祖)25년(1592) 4월 도요또미(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는바 임진왜란 이다.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관군과 의병들이 이들을 저지하려고 하나 도무지 역부족 이었다.


이때 의병장 최강은 남은 관군과 의병을 수습하여 안민고개에 포진하여 왜군과 일전을 노렸다. 그러나 숫적으로 열세인지라 안민고개에서 적의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최강은 죽음을 무릎 쓰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종횡무진 적을 치니 왜군은 기가 질려 일시 후퇴를 할 때 그 틈을 노려 포위된 군사를 이끌고 빠져 나오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의 전공으로 가리포첨사에 발탁되고 뒤이어 경상좌수에 까지 오른다.


안민고개 싸움은 우리고장에서 만행을 거듭하던 왜놈에게 예기치 않은 일격을 가한 싸움으로 진해와 창원의 경계지점 일대에 걸쳐 전개된 싸움이다.

임진왜란 때 안민은 역원이 있어 침범을 면해 편안하게 산다고 안민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후 안민고개는 음력 8월 17일에 진해와 창원 면민들이 모여 놀던 곳이 되었다.(하여 해치산이라 고도 한다)


이 일대의 지명을 보자면,

[장승배기:창원부에서 30리라 쓴 장승이 서 있었다.]


[병마산:안민에서 남쪽 앞 300m 지점에 역원의 병마 훈련장]


[덕주집:선산 김도령이 김해 산동산에서 와 장복산 꼭대기에 돌집을 지어 도인으로 살아왔다. 이 김도령의 예언으로 전하는 말 "안민곡에 물이 넘어 가면 해방이 된다"고 하였다는데, 현재 성주 수원지 물이 진해로 통수(通水)된 것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리고 축지법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매바위:덕주 집 밑에있는 바위인데 안민 마을이 꿩 형설인데 위에 매가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꿩이 날지 못해 마을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복호등: 덕주 집에서 내려다보면 범이 엎드려 있는 형태의 등]


[댓걸보: 동네에서 북쪽에 있는 큰 보인데 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