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지 3층석탑(鳳林寺址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경상남도 창원시 봉곡동 18(상북초등학교)
봉림사는 신라 9산 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로, “지금의 창원시 봉림동 165번지에 그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봉림동 임대아파트 건립예정지에서 절터로 예상되는 주춧돌과 흔적이 발견되어 향후 역사학자들의 정리가 필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탑은 원래 봉림사 터(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목적으로 부산까지 팔려갔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 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심하게 파괴되었던 것을 1960년에 창원 교육청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1995년에 봉림사 터를 발굴 조사할 당시 본래 탑이 놓였던 자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2중의 받침대(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었지만 여러 차례 옮기는 과정에서 재료(部材)의 일부가 유실되고 파손도 심하여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없어진 받침 부분과 2 . 3층의 지붕돌 및 꼭대기 부분(上輪部)은 뒤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의 재질이나 조각 기법과는 차이가 있다. 이 탑에서 특이한 것을 2층 탑신에 새긴 장방형의 문짝(門扉)이다. 문짝 조각은 보통 1층의 몸통에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의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봉림사지 3층석탑 앞에 놓여 있는 탑 상층부의 일부>
운동장 저 멀리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오고 오늘도 탑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년전 봉림사를 창건한 심희대사는 이 삼층석탑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 봉림사지 3층석탑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
봉림사지에서 발견된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와 보월능공탑의 모사품이 용지공원 내에 서 있어 그 사진을 첨부한다. 그나마 이런 것이라도 있어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용지공원에 세워져 있는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와 보월능공탑의 모사품 모습>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의 해석문]
고 진경대사의 비
유당 신라국 고국사 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 비명 및 서
문하승 행기가 교를 받들어 쓰고 문인인 조청대부 전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 崔仁渷이 전액을 쓰고 내가 짓는다.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형상은 광활함을 차지하는 이름만이 아니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은 깊고 그윽함을 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저 禪에 깃든 上士와 법을 깨친 眞人이 같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한 사람만이 四大를 초월하여 즐거이 노닐며 경치를 구경하고 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거닐며 달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호가호위하는 禪伯으로 하여금 혼란한 시절에 魔□를 일소하게 하고, 법령을 쫓는 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돕게 하여, 자비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佛日이 거듭 빛나며, 外道를 모두 물리쳐 하늘 끝까지 따르고 복종하며, 비밀스런 印을 가지고서 심오한 뜻을 발휘하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서 진실한 종지를 널리 드러내게 할 수 있으니, 오직 우리 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다.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으나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 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은 鼇山의 정기를 타고, 바다의 정기에 올라서,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이 영원히 안정되고 兎郡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을 받들어 멀리 辰韓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盃相의 道는 노장사상을 높였고, 뜻은 松喬를 흠모하였으며, 물과 구름이 비록 그 한가로움을 내버려둔다 할지라도 朝野는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아쉬워하였다. 어머니 박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休□를 얻었다.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보고는 깜짝 놀라 임신을 하였다. 곧 냄새나는 음식을 끊고 그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감응하여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大中 7년(853)12월 10일에 태어났다. 대사는 기이한 자태가 넉넉히 드러났으며 신비한 색이 원융하게 밝았다. 나이 어려서도 철부지 같은 마음은 없었으며, 치아를 가는 7,8세의 나이임에도 佛事를 □□하였다.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잎을 따서 향을 바쳤다. 아홉 살에 惠目山으로 곧장 가서 圓鑑大師를 알현하니, 대사는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祗樹(절)에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성을 다하였다. 부지런히 애쓰는 데는 高鳳도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는 揚烏도 아름다움을 양보할 만 하였다. 僧□를 밟도록 하고 법당을 떠났다. 咸通 9년(868) 스승이 병에 걸려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ꡒ이 법은 본래 西天에서 동쪽으로 왔으며, 중국에서 꽃이 한 번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다. 대대로 서로 전승하여 끊임이 없도록 하였다. 내가 지난 번에 중국에 가서 일찍이 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南嶽을 이었으니, 남악은 곧 曺溪의 아들이며 嵩嶺의 현손이다. 비록 袈裟는 전하지 않았으나 心印은 서로 주었다. 멀리 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迦葉의 종지를 열었다. 그대는 마음의 등불을 전하라. 나는 法信을 부촉하노라.ꡓ하고는 아무 말 없이 涅槃에 들었다. 대사는 눈으로 이별함에 슬픔이 깊고 마음으로 사별함에 수심이 간절하였다.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실로 더하였다. 19세에 具足戒를 받았다. 이윽고 계율을 지킴에 마음이 들떠서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어찌 수고롭지 않겠는가. 일 따라 돌아다녔다. 명산을 찾아 고산을 우러러 보고, □□을 더듬어 절경까지 찾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ꡒ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여 두루 玄關을 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례하여 모름지기 큰 선비를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ꡓ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ꡒ달마가 법을 부촉하고 惠可가 마음을 전한 이래로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거늘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惠目을 참알하였고 바야흐로 꽃다운 티끌을 접하였으니,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을 가지고 뗏목을 탈 뜻을 근심하리오?ꡓ하였다. 文德 초년부터 乾寧 말년 사이에 먼저 松溪에 자리를 잡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었으며, 잠시 설악에 머물자 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숨어 지낼 수 있었을 것이며, 어찌 오직 그것 뿐이겠는가!
眞聖大王이 급히 편지를 보내어 궁전으로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외람되이 받들기는 하였으나 祖師의 業을 어찌 중단하리오.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표를 올리고 굳이 사양하였으니 가히 하늘 밖 학의 소리는 鷄林의 경계에 빨리 닿지만, 사람 가운데의 龍德을 대궐 문 옆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도다. 대사는 세속을 피하여 홀연히 운수처럼 떠나 溟洲로 가서 머무르며, 산사에 의지하여 마음을 깃들이니, 천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다. 한쪽은 사라짐과 소생함이 있다.
얼마 안되어 멀리 金海 서쩍에 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이 산을 떠났다. 그 소문이 남쪽 경계에 미치고 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이에 □□進禮城諸軍事 金律熙가 대사의 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고 가르침을 듣고자하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절을 수리하여 법의 가르침을 자문하는 것이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며,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만난 듯하였다. 孝恭大王이 특별히 정법전의 대덕인 如奐을 보내어 멀리 조서를 내리고 법력을 빌었다. 붉은 인주(紫泥)를 사용하고 겸하여 향기로운 그릇을 보냈으며, 특별한 사자를 보내어 信心을 열게 하였다.
그 나라의 임금이 귀의하니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러하였다. 어찌 肉身菩薩만이 멀리 聖□의 존중함을 입고, 靑眼律師만이 여러 어진이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으리오.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
이 보다 앞서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 明義將軍 金仁匡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숭앙하고 三寶의 집을 돕고 수리하였다.
대사는 마음에 가련히 □□하고 여생을 보낼 뜻을 가졌다.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고 큰 기틀을 이어 다스림에 道安과 慧遠의 도를 힘입어 禹湯의 운세를 누리고자 하였다. 듣건대 대사는 당시 천하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海隅(신라)에서 독보적 존재요, 북악의 북쪽에 오래도록 거처하며 東山의 법을 가만히 전수했다고 한다. 흥륜사 상좌 釋彦琳과 중사성 내양 김문식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가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ꡒ비록 깊은 산속이나 이 역시 임금의 땅이요, 하물며 (석가)의 부촉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ꡓ하였다. 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산문을 나서서 □에 이르렀다. 가마가 11월 4일에 도착하였다.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정돈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예궁으로 인도하고 난전에서 공경히 만났으며, 특별히 스승과 제자의 예를 표하고 공손히 숭앙하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대사는 법복을 높이 휘날리며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술수를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에 □□할 방책을 말하였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쁨에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날 대사를 따라 궁궐에 오른 자가 80인이니 무리 가운데 上足 景質禪師가 있어 우러러 종과 같은 맑음을 두드리고 그윽히 거울과 같은 지혜를 품었다. 대사가 □□를 치매 소리가 조용하였다. 새벽의 해는 온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에 온갖 만물의 소리가 화답하였다. 조용히 법을 설하매 세속의 바깥을 진실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끝을 알았으리오. 다음 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명하여 대사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 나란히 □을 칭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法膺大師라 하였으니, 이는 곧 남의 모범이 될만 하였다. 이는 항상 덕을 숭앙하고 삼가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함이라 하였다. 그 후에 대사는 이미 예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와 향기로운 가르침을 거듭 열어서 죽은 도에 빠진 여러 학인들을 깨우쳤으며,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자애로운 바람을 보시함은 필연적이다.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도 마치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듯하매, 무리들은 돌아가실까 의아하여 미리 죽음의 슬픔을 머금었다. 龍德 3년(923) 4월 24일새벽에 무리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ꡒ모든 법은 다 空하며 온갖 인연은 함께 고요하다. 말하자면 세상에 의지한 셈이니 흐르는 구름과 꼭 같도다. 너희는 힘써 머무르되 삼가하고 슬피 우지마라.ꡓ하고는 오른 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방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로는 70이요, 승려 나이로는 50이었다. 이 때에 하늘색이 왕성하게 오르고 햇빛이 참담하였으며,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며 풀이 초췌하고 나무가 말랐다. 산짐승이 이에 슬피 울고 들짐승이 슬피 울었다. 문인들은 통곡하며 시신을 받들어 절의 북쪽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인하여 昭玄僧 榮會法師를 보내어 먼저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21일째에 이르러 특별히 中使를 보내어 장례용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眞鏡大師라 추증하고 탑 이름을 寶月凌空之塔 이라 하였다. 대사는 타고난 자질로 지혜로이 깨닫고 산악이 정령을 내려서 자비의 거울을 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認識의 집에 걸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넓히고 지경마다 자비로움을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단단하여 잠시라도 번뇌가 일어남이 없었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하는 제자인 景質禪師 등 500여인은 모두 心印을 전하매 각각 계주를 보존하였다. 함께 보탑 곁에 머무르며 같이 禪林의 고요함을 지켰다. 멀리서 대사의 행장을 기록하여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해왔다. 과인의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을 상대할 수 없으나, 유약한 붓으로 그 선덕을 감히 드날리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을 널리 펴고자 하노라. 熊耳의 명문을 선뜻 재단하는데 어찌 梁 武帝를 부끄러워 하리오. 天台의 게송을 추억하며 짓는데 수나라 황제도 부끄럽지 않다.
詞에 이르기를
석가가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되, 오래도록 떠돌다가 나중에 오리라.
마음은 멸한데 법 흐름 언제 끊고, 도 있거늘 떠난 사람 언제 돌아오리.
위대하도다 철인은 미로를 근심하여 閻浮提 성모의 태내에 태어났도다
바다의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가야산 험한 길 三才로 돌고자.
흔연히 자리 앉으매 은색 꽃 피고, 문득 열반을 탄식하매 寶月은 사라져.
서리 젖은 鶴林에 슬픔은 길고, 鷄山의 짙은 안개 한번 걷히길 기다려.
龍德4년 甲申年 4월 1일에 세우고 문하승 性林이 새기다.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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