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진영 봉화산 마애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천부인권 2009. 4. 22. 10:34

 

  <저 멀리 봉화산 사자바위가 보이고 그 꼭대기에 사람들이 보인다.>

 

어제 오랜만에 비가 내려 그나마 말라가던 식물들이 숨은 쉬게 되었다. 바람은 많이 불지만 하늘이 깨끗하여 계획도 없이 김해 방향으로 가보기로 마음을 먹으니, 요즘 봉화산 아래 살고 있는 분의 심기는 어떨까하는 호기심도 있어「진영 봉화산 마애불」과「안곡리 3층석탑」을 찾아보게 되었다.

  <마을주민들은 마을이 바뀌는 획기적인 경험을 통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환영하고 있다.>

  

본산리에 도착하니 온통 방송국 차량과 기자들이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때처럼 몰려 있어 대한민국의 시선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 쏠려있음을 실감한다.

 <봉화산으로 오르는 길>

 

플랜카드가 즐비한 거리는 기자들이 차지하고 저 멀리 사자바위위에 사람들이 보인다. 마애불을 보고나면 내가 올라가 볼 곳이다. 산 입구는 잘 정비 되어 있었지만 계단으로 만들어 둔 것은 내가 다리가 아픈 관계로 별로 좋지는 않아 보인다.

의자 두개와 안내표지가 있지만 마애불이 없다. 허~ 이런 모습으로 있구나.

  <어디에 있지? 꼭꼭 숨어라 머리 카락 보일라>

   <묘한 곳에 새겨져 있다.>

 

진영 봉화산 마애불(進永 烽火山 磨崖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산3-10


이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조각된 앉아 있는 석불(石佛坐像)로 발견당시 산중턱 바위틈에 끼여 옆으로 누워 있었다. 양손과 왼쪽 어깨부분이 훼손되었으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불상의 머리부분은 민머리(素髮)에 상투(肉髻)모양이 크게 표현되었는데, 목에는 3개의 주름(三道) 흔적이 보인다. 코와 입은 부분적으로 마모되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지그시 감은 눈은 깊은 사색에 잠긴듯하다. 양쪽 어깨에 걸친(通肩) 옷자락(法衣)은 U자형으로 자연스레 흘러내리고 있다. 손 모양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 어깨높이에서 손가락이 위로 향하게 하였고(施無畏印), 왼손은 허리춤에서 손가락을 아래로 향해 펴고 있다(與願印). 즉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을 풀어주고, 왼손은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을 각각 상징한다. 이러한 손모양은 삼국시대에만 나타나는데, 충청남도 서산의 마애삼존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부좌를 한 채 깊은 선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구조가 잘 잡혔고 얼굴도 세련된 불상으로,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애석불은 당나라 황후의 꿈에 한 청년이 나타나 자꾸만 자기를 괴롭히므로 신승(神僧)의 힘을 빌려 그 청년을 바위틈에 넣어 김해 땅 봉화산의 석불이 되게 함으로써 생긴 것이라 한다.

  <이런 모습으로 있다.>

묘하게 옆으로 누워있는 석불의 모습을 보면서 저 불상이 똑바로 서 있었다면 저  산 아래 고민 많은 분이 이런 고민에 휩싸이지 않았을 런지도 모르겠다는 다소 엉뚱한 발상을 해본다. 일희일비(一喜一悲)가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고(苦)인 것이 라면 세상사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안~~다.

  <봉화산 이라하여 봉화대가 있나하고 보니 이런 모습이다.>

『이곳은 고등종교가 들어오기 전 원시인, 구석기인, 신석기인, 고대인들의 제사 터로서 오랜 정성이 축적된 곳이기에 정기 있는 산이라 합니다. 바위 옆과 중간에 파여진 곳은 제물을 준비하고 올린 곳입니다. 신발을 벗고 바위의 기운을 마음껏 간직하고 가십시오.』라는 문구가 있다.

  <파파라치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언론은 총 출동하여 사자바위에 진을 치고있다.>

  <사자바위에서 본 합포천과 들판>

  <세상의 고민이 가장 많은 곳>

 <호미든 석불의 모습과 요번에 산불이 난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