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낙동강과 함께한 삼강사 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천부인권 2009. 5. 11. 18:15

 

 

옛 삼랑진교

 

 

‘삼강사비’가 있는 곳을 가려면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나는 옛 삼랑진교가 “콰이강의 다리”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이곳을 통과하거나 앞을 지나게 되는데, 웅어회를 파는 횟집들이 낙동강을 따라 줄지어 있다.

 

지금은 수로를 이용하지 않아 교통의 요충지로써의 역할이 없어졌지만 밀양강과 합포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 이곳 삼랑리 나루터에 옛 조창이 있어 김해와 부산 밀양의 세금을 모아 한양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 곳이다. 세 개의 강이 만난다하여 “삼강사(三江祠)”라 이름하고 ‘삼강루’가 있던 이곳에 삼강사 비(三江祠 碑)를 세워 민씨 5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고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삼강사 비각

 

 

삼강사 비(三江祠 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631-3

 

이 비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門人) 이었던 여흥민씨(驪興閔氏) 5형제의 두터웠던 효성과 우애,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민씨 5형제는 욱재(勖齋) 구령(九齡), 경재(敬齋) 구소(九韶), 우우정(友于亭) 구연(九淵), 무명당(無名堂) 구주(九疇), 삼매당(三梅堂) 구서(九敍)를 말한다.

형제들은 1510년 (중종5년)에 옛 삼강루가  옛 삼강루(三江樓)가 있던 이곳에 정자를 짓고 함께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두터운 우애와 고결한 행동으로 이름을 남겼다. 형제들의 우애와 효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천거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그 정신을 기려 정자를 “오우정(五友亭)이라 이름하고 그 정자를 기리는 시[亭贊四韻]를 지어 후세에 남기도록 하였다.

그 후 1563년(명종 18)에 이 지역의 선비들은 정자 내에 “오우사(五友祠)라는 사당을 지어 봄. 가을로 제례를 지냈으며, 따로 비석을 세워 형제들의 효행과 우애를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정자와 사당 및 비석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남긴 문장과 저서 등도 대부분 불타버려 그들의 삶을 되새길 만한 자료가 그의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1702년(숙종 28)에 다시 서원(書院)을 짓고, 1775년(영조 51)에는 현재의 비석(三江祠 碑)을 세움으로써 형제들의 효행과 우애를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은 정암(貞庵) 민우수(閔遇洙)가 짓고, 글씨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썼다. 고 적혀있다.

 

 

 

 

삼강사 비각의 측면

 

 

그리고『밀양 삼랑진 후조창유지비석군(密陽 三浪津 後曹倉遺址碑石群)』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93호”로 조창을 운영하던 행정관들의 공덕비 9개가 압구정(押鷗亭) 아래 계곡에 줄지어 서있는데, 안내표지도 없고 누군가가 키우는 개가 묶여있는 등 관리가 부실하다.

 

 

 

조창유지 비석군의 모습, 개가 있어 더이상 접근 불가

 

 

4월 8일에는 너무 늦어 이번에 다시 갔는데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또 촬영하는 것은 실패를 했다. 그러나 그곳의 관리 주인이신 민씨 종중 어르신을 만나 좋은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현재 밀양박물관에『오우선생 실기책판(五友先生 實記冊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1호를 기증할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하시며, 앞으로는 밀양박물관에서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 하신다.

 

 

 

보수를 하여 나무에 비춰진 모습만 담았다.

 

 

정말 딱한 것은 압구정(押鷗亭)에 앉아서 확 트인 낙동강을 바라보던 것이 전철이 지나는 공사를 하면서 앞으로는 낙동강을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고속전철이 지나면서 낙동강을 가려 버렸다.

 

 

압구정(押鷗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