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군북으로 떠난 고향여행

천부인권 2009. 5. 16. 10:29

 

  

<처음 도착한 고마암 옆 숲>

 

화창한 늦봄에「봉림소식지」기자활동을 함께하고 계신 분들과 “함안 군북”이 고향이신 심영이씨의 안내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군북 일대의 고향이야기를 듣고 왔다.

“고향(故鄕)”이란 말만으로도 마음속에 애틋한 기분이 들고 어릴적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나 누구나 그리움 하나쯤은 품고 살아갈 것이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에 대한 향수는 그 곳을 다시 찾게 하는 힘이 있고, 그 곳을 다녀오면 왠지 삶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겨난다. 이러한 고향이 옛 정취 그대로 남아서 고향을 찾아오는 이를 반겨준다면 고향을 찾는 이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맙고 기쁘겠는가?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영이씨와 오늘 함께 동행한 분들은 모두 고향이 창원이고, 현재도 창원에 살고 있지만 정작 고향을 다시 볼 수 없는 애환을 가진 분들이다. 창원시가 계획도시로 탄생하면서 원주민으로 살아가던 우리들에겐 자신이 태어난 곳의 마을이 없어짐은 물론이고, 산새들이 노래하던 작은 산과 들판의 오솔길도 찾을 수 없다. 어린시절 물고기 잡으며 뛰놀던 시냇가는 흔적이 사라지고, 그곳엔 공장이 들어서고 빌딩의 숲에 가려져 기억속의 고향은 있지만  찾을 방법이 없어져 상상만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들 이다.


  

<숲속엔 비와 비각이 있다.>

 

우리 일행이 남해고속도로를 타고가다 장지IC에서 내려 군북을 지나 처음 도착한 곳이 어계선생이 낚시를 하며 꺼이꺼이 울었던 냇가에「백세청풍(百世淸風)」란 글귀가 새겨져 있는 고마암(叩馬巖)이었다. 군북고등학교를 지나 100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철길과 나란히 달리게 된다. 좌측을 보면 “고바우”가 보이고 “百世淸風”란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좌측의 숲으로 가면 비각과 비가 있고, 삼선교를 지나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요즘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서산사’라는 글귀와 마애불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영이씨의 어린시절 기억에는 없었다고 하신다. “고바우절”이라 불렀던 작은 절이 있는 곳에는 이제 제법 규모를 갖추어 가는 ‘서산사(西山寺)’가 있다.


 

<어계 조려선생이 낚시를 하던 곳엔 지금도 고기가 노닐고 있다.>


 

<삼선교를 넘어서 가면 서산사가 나온다.>


 

<백세청풍 각석>


西山(서산)
漁相登臨日(어상등림일) 어계선생 서산에 오르는 날
溪山淸復淸(계산청부청) 냇물과 산은 맑고 맑구나.
後生誰不仰(후생수불앙) 후손 그 누군들 숭앙치 않으리오
百世樹風聲(백세수풍성) 백세토록 맑은 기풍을

後孫(후손) 趙三奎(조삼규) 稿(고)
淸巖(청암)


 

<희미하게 불상의 흔적이 보인다.>


 



 <심영이씨는 고바우절이고 요즘은 서산사다. 대웅전이 번듯하다.>

 

영이씨의 친정 옆 동네인 영운리 지곡부락으로 이동을 하였다. 병풍 같은 산이 마을 감싸고 넓은 들판이 있어 예부터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법한 마을이었다. 영이씨는 “이 부락 친구들은 가수 뺨칠 만큼 노래를 잘했다고 하시며, 바람이 많이 불어 돌담장이 높게 쌓여 있다.”고 이야기 하셨다. 장미꽃이 만발한 마을은 잘 꾸며진 집들이 여러 채 눈에 띄였다.



 

 <마을회관 앞 장미가 담장을 덮고 있는 풍경>

 

 

 <골동품 같은 뒤주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돌담길을 보존하고 있어 고향의 정서를 듬뿍 느끼게 하였고, 골동품이 되었을 뒤주가 아직도 유용하게 쓰이는 마을의 모습에서 감동이 스르르 몸속으로 스며든다. 아름답게 꾸며진 어느 집에서 익어가는 앵두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먹어봤는데, 어릴적 서리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방앗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렇게 기념사진으로 남겨두고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군북에 되돌아간다.



 

<돌담이 멋진 마을이다.>


 

<마을속의 텃밭이 있는 풍경속으로 일행들이 걸어온다.>


 

<바람이 많이 불어 높게 쌓아 올린 돌담.>


 

 <함박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움을 돌담에 더한다.>


 

 <송악을 심어 멋을 부린집 담장>


 

<장독대와 창고가 있는 집>


 

 <어느 집에 있던 앵두>


  

<방앗간 흔적>

 

오는 길에 아까 지나친 “대암마을”을 가보기로 하여 들어가는데, 영이씨는 이 마을을 “특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암석에 새겨 넣은 금석문들을 보고 “특골”이란 이름을 그냥 붙인게 아니 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 하나를 보니 “서기 1923년(西紀一九二三年) 계해생 계원명단(癸亥生 禊員名單)”이라 적고 “거문고와 술로서 한가히 노는 벗들이여 계해심계(癸亥深禊) 맺은 계는 혈손은 아니라도 지친과 다름없어 착하랏고 꾸중하고, 어짐을 도우구나 예(禮)로 오는 풍속이라 믿음은 오덕(五德)의 하나니, 관계됨이 중대하고, 도의는 천명을 합칠세라, 뜻이 잘 맞아야 되느니라, 한번 맺은 친구에게 오래도록 공경하는 그 인정이 백년이나 벋으리라.”새겨 놓고, 이름과 관항(貫行), 사자(嗣子), 거주(居住)지를 1991년 3월에 새긴 것까지 기록하였다.


군북역 앞의 ‘고기묶고 밥묶자’라는 음식점에서 ‘고디탕’에 식사를 했는데, 옛날식 음식이 나와 나름 맛나게 먹었다.


 

<특골마을의 특별하고 진기한 풍경>


 

<암벽과 사람 그리고 느티나무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