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군북의 오지마을 여행

천부인권 2009. 5. 16. 13:29

 

  

<마을의 쉼터인 숲속에 1호고인돌이 있다.>

 

 

우리 일행은 맛있게 점심을 먹은 후 군북의 오지마을 “명관리 명동부락 명지골”로 향해 가면서 들판 논 가운데 서있는 “명관리지석묘”를 보면서 내려오는 길에 들러보기로 하고 지나니 숲 가운데로 길이나 있어 잠시 차에서 내렸다.

 

 

  

 <숲이 있어 아름다운 마을>

 

 

여기 안내판에는 [이곳 평광 숲은 서기 1480년(성종11년)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의 17세손인 가선대부행 경상도사 이계운이 벼슬을 버리고 여기 평광으로와 정착하면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52년 공의 6세손이요, 이괄 난 평정의 진무공신 인원군 이휴복이 숲의 규모를 확장하여 더욱 울창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1944년 간악한 일제는 조선용(造船用)으로 쓰기위해 거목을 함부로 베어내니 크게 훼손되었고, 1950년 6.25전쟁의 폭격에 의해 숲은 다시금 극심한 수난을 당했으나, 조상의 얼을 기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동민들의 정성에 의해 오늘의 휴식 공간이 되었다. 쉬어가는 길손은 주변을 깨끗이 하고 고성방가 등의 소란행위를 삼가야 할 것이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 옆 바위에는 이런 싯구가 쓰여 있었다.

 

고향이 하 보고파 양졸 숲 찾아왔더니

풀국새 우는 소리 깨닫는바 또 있구나

부끄러워 꿈 쫓아 다시 먼 길 떠나노라.

 

크기가 작은 ‘명관리 1호 고인돌’이 이곳 숲에 있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작은 성혈의 흔적도 있다. 여기 이 숲도 “아름다운 숲”으로 등제해도 될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뒤로하고 명지골로 가는 길엔 명지저수지의 아름다운 광경도 볼 수 있다.

 

 

 

  

<나무에 이런 혹이 생기는 것은 뿌리쪽에 돌들이 많으면 흔히 생긴다.>

 

 

오봉산에서 흘러내린 능성이가 백이산에 이르러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의 끝에 명지골 골짝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못 둑엔 엉겅퀴가 지천으로 피어있었고, 그 곳에서 마을 전경을 담았습니다.

 

 

 

 <명지골짝 산이 맞다은 곳엔 못이 있다.>

 

 

  <오지마을 전경>

 

 

<시골의 모습을 간직한 마을>

 

  

<산괴불주머니가 담벽에 나있고, 좁은 길은 한가롭다.>

 

 

나오는 길에 아까 지나친 새터마을에 잠시 들러 왕버드나무가 이곳의 휴식공간으로 마을입구에 3그루가 서있는데, 한그루는 이미 죽었다. “새터”란 지명이 어느 곳이나 흔히 있는데, ‘새로운 터’란 의미와 ‘마을과 마을사이에 낀’이란 의미도 있다. 보통은 새롭게 생긴 마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새터 마을 입구엔 왕버드나무가 서있다.>

 

 

 <흙담이 아직도 남아 있고 말라죽은 고목엔 새싹이 돋고 있다.>

 

 

다시 나오는 길에 ‘도천제 단서죽백(道川齊 丹書竹帛)’이 있는 ‘군북면 명관리 536번지’에도 잠시 둘러보았다. 여전히 관리인은 만날 수 없어 일행들과 다시 고인돌을 보러 나왔다.

 

 

 

<도천제 비석>  

 

 

 <도천제 입구의 모습>

 

 

들 가운데 서있는 「명관리고인돌」은 [창원문화유산해설사]과정에서 사진으로 본 것과 같았다. 그 때는 4호, 5호, 6호 7호가 함께 있는 것은 몰랐는데 4호의 커다란 고인돌과 함께 5.6.7호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공룡발자국을 보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순간 배터리가 방전이 되었다. 고인돌에 공룡발자국이 있는 것은 흔치 않고 발자국으로 볼 때 어디에서 바위를 옮겨 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어느 듯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고 국도를 따라 귀가를 하였다.

 

 

 

<명관리고인돌>

 

 

<4호 고인돌의 모습>

 

 

<4호 고인돌 위쪽의 공룡발자국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