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대 마애불
신어천과 작은 길 하나를 두고 ‘신선을 초대한다.’는 초선대(招仙臺)가 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지만 진해 용원(현재 부산시 강서구)의 ‘망산도’가 생각나는 것은 많은 부분에서 느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초선대가 내륙에 있지만 옛날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기수지역이었을 것이다. 안내판에는 초선대 마애불(招仙臺 磨崖佛)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초선대 금선사 일주문
초선대 마애불(招仙臺 磨崖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8호
경남 김해시 안동 685-1
‘신선을 초대한다.’는 초선대(招仙臺)는 ‘현자를 초대한다.’는 초현대(招賢臺)라고도 불린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点山)의 선인(仙人)을 초대하여 이곳에서 가야금과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왕이 앉은 연꽃무늬 자리와 바둑판 자국이 남아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애불은 초선대의 암벽 끝에 3cm 두께의 선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은 거등왕의 초상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전체적인 형상으로 보아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인 듯하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 세계에 머물면서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부처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게 되면 극락세계에서 다시 태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바위에 균열이 있어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는 민머리(素髮)인 것으로 보인다.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코, 두툼하고 넓은 입술의 얼굴은 입체감이 없이 묘사 되었다.
광배는 새겨져 있으나 아무른 장식무늬 없이 소박하게 처리되었다.
이 불상은 전체 높이가 5.1m이고, 몸체 높이가 4.3m이다. 경기도 이천의 영월암(聆月庵)에 있는 마애여래 입상과 같이 고려시대 거불(巨佛) 양식을 따르고 있다.
<초선대 산책로>
이곳 ‘초선대 금선사(招仙臺 金仙寺)’ 주지스님은 ‘초선대 마애불’은 ‘거등왕’이라면 연화좌대에 앉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마애불은 장유화상의 영정을 새긴 것이라 한다. 두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것은 가락국 당시 불상의 모습으로 장유화상 본인을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마애불이 서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장유화상이 서쪽에서 왔음을 암시하고 서쪽에 극락정토가 있음을 뜻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여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허탈해 할 때 이곳에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러 왔는데, 성심을 다해 기도를 했던 분들 중에는 장유화상의 영정을 만나 기도의 영험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이 마애불에 대한 기록은 장유암 스님이 남겨둔 책에 의존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믿는 사람은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 불교와 관련이 있는 부분은 삭제를 하여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마애불 전경
뒤에서 본 풍경
초선대 누각
마애불 앞에 있는 바위에는 “부처의 족적” 즉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 발자국은 각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지는 곳에 새겨 두는 것으로 ‘초선대마애불’ 앞에 발자국을 남긴 것은 이곳에서 부처의 설법이 시작한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초선대는 한반도에 처음 불교가 들어온 곳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만큼 잘 보존하여 관광지로 이용해 봄직하다.
부처의 족적
마애불 앞의 바위는 월래 붙어 있었는데 나무가 자라면서 밀려나가 떨어진 것으로 2003년 태풍 매미 때 나무가 부러져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시며, 오래된 고목을 치우려 했지만 사람들이 겁을 내어 주지스님이 염을 하고 인부를 구해 치우셨다고 한다.
벌어진 바위 사이에 좌대를 마련해 두었다.
매미 때 부러진 나무
금선사에 있는 청동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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