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재약산 표충사를 가면 권력이 보인다.

천부인권 2009. 7. 8. 08:57

 

재약산 표충사(載藥山 表忠寺)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표충사의 변천과정을 보면 역사란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자리를 차지하는 위치가 달라지고, 힘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을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사(表忠寺)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표충사(表忠祠) 전경>


표충사는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무열왕 원년(武烈王 ,654) 봄에 원효대사가 지금의 극락암(極樂庵)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어느 날 아침 재약산 기슭을 바라보니 대밭 속에서 오색의 상스러운 구름(五色祥雲)이 떠올랐다. 원효는 곧바로 하산하여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절의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하였다. 지금도 그 흔적이 절 뒤 대밭 속에 남아있다.

이후 흥덕왕 4년(興德王, 829)에는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재약산(載藥山)에 이르러 부처님 인연지라 하고 주석하였다. 흥덕왕의 3째 왕자가 풍병(風病)으로 고생할 때, 죽원정사 황발선인의 도움으로 이곳의 신비스러운 우물(靈井藥水)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으므로 절 이름을 영정사로 고쳤다.

충렬왕 16년(忠烈王, 1290)에 천희국사를 주석하고 이후 사찰은 승가에서 성화하여 ①보우국사. ②해린국사 ③보각국존일연국사 ④천희국사를 사대국사로 봉안하였다.

조선 선조 25년(宣祖, 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혜징화상(慧澄和尙)이 중건하였다.

지금의 표충사란 명칭은 헌종 5년(憲宗, 1839)에 사명대사의 8세 법손인 월파당(月坡當) 천유선사(天有禪師)가 임진왜란 때 구국을 위해 헌신한 사명(四溟), 청허(淸虛), 기허(騎虛)대사 등을 기리기 위하여 밀양군 무안면 표충사(表忠祠) 사당에 있던 3대선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와 모시면서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국비로 춘추제향을 올리게 하며 사내의 대중들은 사역과 조세를 면제토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절의 명칭인 표충사란 불교와 유교의 이념이 통합된 뜻을 담고 있다. 이 절의 독특한 유래와 연혁만큼 이 곳에는 국보와 보물 및 다양한 지방 문화재 들이 소장 되어 있다.



 

<외삼문 역활을 하는 수충루>

 

표충사(表忠寺)의 외삼문인 수충루(酬忠樓)를 들어서서 왼편을 보면 표충서원과 유물관 그 안쪽에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표충사(表忠祠)와 유물관, 표충서원 전경>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이서원은 본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당(騎虛堂) 등 세분 대사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되었다. 무안면 중산리 삼강동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사당(祠堂)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헌종 5년(1839)에 옛 영정사(靈井寺) 터인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편액을 걸었다. 이때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고쳐졌다.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이자 대유학자인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충서원 역시 건물의 구성과 배치뿐 아니라 제례절차도 일반 서원과 같았다고 한다. 고종8년(1871) 대원군에 의하여 전국 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하고 춘추향사만 중단되었다가 1911(신해)년 6월에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공포한 “사찰령”에 의하여 표충사는 31본산 중 통도사의 말사로 편입 되었다.

1926(병인)년에 큰 화재로 가람이 전소되고 오직 응진전만 남았으며, 1927(정묘)년 대광전, 표충서원, 명부전, 관음전의 복원불사를 시작하여 1929(기사)년에 완공하였으나 표충서원과 표충사의 위치가 바뀌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표충서원 전경>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과 서원의 사당이 나란히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승려들의 요구에 따라 1971년 표충서원을 경내 서편에 위치한 팔상전 자리로 옮기고 본래의 서원 건물을 팔상전으로 하였다. 따라서 지금은 당시의 서원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당시 관음전을 헐고 사당을 지어 삼대선사의 위패를 모시고 명부전을 헐고 영각을 지어 삼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또 칠문의 정문을 개조하여 “의중당”의 현판을 달고 그 좌우에 방사를 넣어 동서재로 삼고 사명당. 영각. 의중당을 중심으로 예제문 자하문 수충루 등의 부속건물을 신축하여 서원의 특징을 갖추고 사찰 이름을 재약산 표충사(載藥山 表忠祠)라 개칭 사액하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진다. 이 표충서원은 조선시대 이후의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다.



 

<표충사(表忠祠)>


표충사에는 국보 제75호인 아름다운 선과 섬세한 문양의 조각에 은입사로 다듬어진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玩)이 있으며, 보물 제467호「삼층석가여래 진신사리탑」과 민속자료 제29호 사명대사 친수 가사장삼, 연화바루를 비롯하여 유품 300여점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문화재 제14호 ‘표충사석등’, 제52호 ‘표충서원’, ‘대광전’ 외 법당건물 25동이 현존하고 있는 대가람이다.



 

<표충사 유물관>


 

<표충사(表忠祠)에서 의중당 방향을 본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