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바람
2005년 3월 23일부터 5월 22일까지 통도사성보박물관에서 고승유묵(高僧遺墨)이라는 특별기획전이 있었다. 그 내용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그대로 옮겨 적는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자료>
<鏡峰 靖錫(1892~1982), (達磨圖)>
■ 선필이란
선필(禪筆)은 말 그대로 선승과 같이 선(禪) 수행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간 사람들의 글씨나 그림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선(禪)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불가에서 선의 요체를 말할 때 흔히 쓰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나 직지인심(直指人心),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시대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인 성철(性徹, 1912 - 1993)스님이 어느 신년법어에서 갈파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 또한 산이나 물처럼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라 그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정작 본 뜻을 파고들면 알 듯 모를 듯 한 것이 사실이다.
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많은 견해를 밝힐 수 있지만 선 수행을 통해 마음이 하나가 된 상태, 즉 무아(無我)의 경지가 그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바람처럼 인간사의 모든 시비(是非), 생사(生死), 색공(色空), 유무(有無)의 경계를 넘어 절대자유(絶對自由)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淸虛 休靜(1520~1604), 『精選四家錄』>
■ 형상(形象)을 만들지 말라 : 선필의 역설(逆說)과 성격
앞서 말한 대로 선필은 선의 경지에 이른 글씨를 말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선의 요체인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암시하듯이 선은 ‘그림’이나 ‘글씨’라는 고정된 형상(形象)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선에서는 애초 상조차도 만들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즉 선기(禪機)나 선미(禪味)는 상을 만들거나 지으면서는 찾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근본 없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이러한 역설을 배태하고 있는 선필은 작자는 물론 보는 사람도 우상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을 때 그 맛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선필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글씨는 그 사람이다’고 말하듯이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선승만큼이나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다.
선열(禪悅)과 법희(法喜) 상태는 격정적(激情的)으로 때로는 무심(無心)하게 표출되기도 하고, 흑백(黑白) 곡직(曲直) 교졸(巧拙)의 극단적 대비(對比)와 균제(均齊) 속에 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은 탈속(脫俗)이기도 하고 유현(幽玄)과 정적(靜寂) 그 자체이기도 하다.
<卍海 奉玩(1879~1944), (轉大法輪)>
■ 선필에는 법(法)이 없다 : 선필에 대한 오해
그런데 이러한 선필을 두고 사람들은 법(法)이 없이 막 쓴 글씨라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깰 법이나 틀도 만들지 못한 글씨를 두고 한 말이기도 하고, 스님이 쓴 글씨가 모두 다 선필이 될 수 없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대로 발견되는 뛰어난 선필은 당대 글씨의 보편적 흐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법과 선미(禪味)가 동시에 충족되어 있다. 그리고 서법을 바탕으로 그 틀을 깨고 나온 파격(破格)과 일탈(逸脫)은 글씨가 진정한 예술의 정수임을 알 수 있게 한다.
<坦然(1069~1158), (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碑片)>
■ 선필의 역사
이러한 선필은 사회나 시대의 흐름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교국가였던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김생(金生, 711 - ?)이나 영업(靈業, 8세기), 탄연(坦然, 1070 - 1159), 혜소(惠素, 12세기) 등의 고승들이 당시 글씨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도학자(道學者)나 문인(文人) 사대부(士大夫) 글씨가 주를 이루었고, 근 현대에 들어와서는 프로서예가들의 글씨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청허(淸虛, 1520 - 1604), 사명(四溟, 1554 - 1610)이나 영파(影波, 1728 - 1812), 아암(兒岩, 1772 - 1811), 초의(艸衣, 1786 - 1866)등의 선사가 있어 조선서예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근 현대에 들어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정보화 사회를 겪으면서도 경허(鏡虛, 1849 - 1912), 만해(卍海, 1879 - 1944), 경봉(鏡峰, 1892 - 1892), 서옹(西翁, 1912 - 2003)등의 선사가 있어 우리 글씨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어 오고 있다.
<鏡峰 靖錫(1892~1982), (圓相)>
■ 선필의 종류
그러면 이러한 선필을 중심으로 하는 고승의 필적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현판, 시문, 사경이나 일자서(一字書), 원상(圓相), 묵화 등을 선필로 들 수 있는데, 불가(佛家)에서는 그 성격상 다음과 같은 것이 중요시된다.
- 전법게(傳法偈) :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을 전하는 글. 특히 법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가에서는 법의 수수(收受)를 공식화 하는 전법게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법호(法號), 법명(法名) : 제자에게 호와 이름을 지어주고 적은 글.
- 법어(法語) : 제자나 대중에게 불법의 존엄을 고취시키는 글.
- 게송(偈頌), 유게(遺偈) : 게송은 산문체인 법어와 내용이 같지만 오언(五言), 칠언(七言) 등의 시로 표현되는 것. 같은 맥락에서 유게는 입적을 앞둔 선승이 깨달음의 세계를 시로 읊은 것을 말하는데, 이외에도 편지이나 영찬(影讚), 방함록(芳啣錄) 등 각종 불사(佛事)에 관계된 기문(記文)이 있다.
<鏡虛 惺牛(1849~1912), (五言對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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