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한 탱화 보물들

천부인권 2009. 7. 31. 17:57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한 불교미술의 중요한 자료들 중 보물급의 탱화이다 모든 자료와 내용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발표한 것들이다.

 

신원사 괘불탱
국보 제299호

신원사는 계룡산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이다. 창건은 백제 의자왕 11년에 보덕화상이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말 도선에 의해 중창되어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876년 보연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사찰이다. 현재 계룡산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쪽 사찰에 속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괘불탱은 전국에 90여 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신원사 괘불탱은 길이 971, 620cm 크기로 삼베에 그려졌으며, 조선 숙종 때인 1664년에 봉안되었다. 주존의 광배에는(圓滿報身盧舍那佛)이란 존명이 기록되어 있고, 배경에 화려한 파상문의 서운이 펼쳐진 가운데 시방세계에서 불보살들이 영산회 도량으로 막 강림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특히 수덕사 괘불탱과 함께 주존이 노사나불로 표현된 독특한 도상으로 괘불탱의 도상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불화로 꼽히고 있다.
올해로 13회째를 맞는 괘불탱 특별전에는 국보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원사 괘불탱화를 전시함으로써, 티베트와 우리나라에만 현존하고 있는 괘불탱화의 아름다움과 그 큰 규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된다. 개막식은 오전 12시 중앙괘불전에서 진행된다.

 진안 금당사 괘불탱
보물 1266호
조선후기 / 1692년, 삼베 위에 채색, (870×474cm)

금당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814년(현덕왕 6) 중국 승려 혜감(惠鑑)이 창건하였다. 사찰은 여러 차례 중수하였는데, 약 300여 년 전에 현재의 대웅전이 건립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금당사 괘불탱>은 1692년(숙종18)에 조성된 작품으로 규모가 세로 870cm, 가로 474cm 크기의 삼베바탕에 채색을 한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는 거대한 광배(光背)를 갖추고 화려한 보관을 쓴 재관보살형(載冠菩薩形)의 입상불이 연꽃 위에 서 있고 양 손에 연화가지를 쥐고 있다. 본존 주변에는 오색찬연(五色燦然)한 방광(放光)의 물결을 배경으로 좌우에는 각각 10위씩 총20위의 화불이 본존불을 호위하듯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화불의 배치는 무량사(1627), 축서사(1768), 개심사(1772) 괘불탱에서도 볼 수 있다.
본존불 머리에 쓴 보관의 금구(金具)는 연꽃과 모란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중앙과 정상부에 각각 7위씩 총 14위의 보관을 쓴 얼굴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보관 좌우에는 각각 2마리씩 총 4마리의 봉황이 백옥구슬에 엮인 화려한 수식을 입에 물고 있으며, 뒤쪽에는 머리카락을 묶은 흰 매듭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이 화려하면서 진귀한 보관의 모습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단부에 마련된 붉은 화기난의 묵서를 통해서 그림의 제작에 참여하고 시주한 사람들과 당시 금당사에서 직무를 수행한 스님들에 대해 알 수 있다. 특히 시주물목(施主物目)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기입되어 있어 그림의 채색안료 및 바탕재료, 납입품 등 당시 그림제작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기록은 주로 17세기 불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림의 제작을 이끌던 수화사는 명원(明遠)이며 그와 함께 처헌(處軒) ? 위청(偉淸) 등 총 4인이 참여하였다.

진천 영수사 괘불탱
보물 제1551호
1653년, 삼베에 채색, 813X554cm,   

보물 제1551호로 지정된 영수사 괘불은 국내에 전하는 불화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인 1653년에 조성된 작품이다. 세로 813.0cm, 가로 554.0cm 크기의 삼베바탕에 안료를 베푼 작품으로, 삼베 17폭을 횡으로 연결하여 한 화폭을 이루고 있다. 화면은 전반적으로 안료의 박락과 구김 현상이 심하여 최근 보존처리를 거쳤으며, 부분적으로 보채한 흔적이 확인된다.화면은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빼곡히 둘러싼 구도로서, 본존 대좌의 전면에 표현된 비구형 청문자를 중심으로 화면은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된다. 먼저 상단부는 본존을 중심으로 18보살, 가섭?아난, 16나한, 범?제석천, 사천왕?팔금강, 용왕?용녀, 신중, 비천, 타방불, 청문자, 청중 등 약140위의 존상을 화면 가득 배치한 영산회 설법도량을 묘사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영산회상도 중에서는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불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산청 율곡사 괘불탱
보물 1316호.
조선중기 / 1684년, 명주 위에 채색, 900× 471cm.

율곡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통일신라 경순왕 4년(930년) 감악대사가 중창한 후 지금까지 몇 차례 중창을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보살형의 인물만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탱으로 겉에 백· 청· 황· 육색의 테두리를 한 둥근 머리광배를 구비하였으며, 머리에는 중앙에 5불을 모신 보관을 쓰고 있다. 둥그스럼해진 얼굴에 치켜 뜬 듯한 눈썹과 긴 코, 작은 입, 적당히 큰 귀 등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그리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보관 중앙에는 길상좌에 합장하고 있는 부처를 중심으로 아래쪽에 세 분· 위쪽에 두 분을 배치하여 모두 5불이 안치되어 있다.
불의형(佛衣形) 법의와 내의 끝단· 소매자락· 내의 윗부분 등에 걸쳐 여러 형태의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겉옷의 왼쪽 하단 끝자락을 금란가사(金란袈裟)로 처리하여 특징적이다.
두 손으로는 백색· 적색 꽃송이가 피어난 연꽃가지를 들고 있으며, 당당한 양 어깨 위로는 귓바퀴를 한 번 감아 흘러내린 보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넓은 가슴에는 큼직한 연꽃을 매단 영락장식이 되어 있고, 귓불에는 국화모양의 귀고리를 착용하였다. 적색 연꽃 받침을 딛고 서 있는 두 발 또한 원숙한 솜씨의 손과 함께 탄력적이며,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그림 바탕 좌우로는 8열로 대칭되게 모란꽃이 그려져 있는데, 녹색 잎사귀에 적· 백· 분홍· 회· 주황 등 다양한 꽃 색을 하여 화면의 명랑한 분위기를 북돋우어 줌은 물론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하겠다.
화면 하단에 마련된 화기(畵記) "…화원 법림비구 숙련비구 자명비구(畵員 法琳比丘 淑連比丘 自明比丘)…강희이십삼년갑자(康熙二十三年甲子)…"로 보아 이 괘불탱은 강희 23년인 1684년에 화원 법림과 숙련, 자명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수기(重修記) "…화원 명열비구 신영비구 최우비구(畵員 明悅比丘 信暎比丘 最祐比丘)…옹정칠년기유초하 중수(雍正七年己酉初夏 重修)"에 의하여 옹정(雍正) 7년인 1729년에는 화원 명열(明悅), 신영(信暎), 최우(最祐) 등이 중수했음 또한 파악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인물의 두 발 사이에 주상과 왕비와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천추(王妃殿下壽千秋) 세자저하수제년(世子邸下壽齊年)"이라는 묵서가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탱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반적인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단정하고 세련된 필선과 우아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 호화로우면서도 안정감 있고 조화로운 색채,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 표현 등이 매우 뛰어나다.

 안성 청룡사 괘불탱
보물 1257호
조선 1658년, 마본채색(麻本彩色), 918 × 650cm,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본거지로 알려진 경기도 안성의 남쪽, 충청남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솟은 瑞雲山에 자리하고 있다. 청룡사 괘불은 1658년(효종 9) 조성된 영산회괘불로 세로 9.18m, 가로 6,50m(畵高7,39×畵幅6,05m) 삼베바탕에 채색을 한 것이다. 화면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문수,보현,미륵, 제화갈라, 관음, 대세지 등 6대보살과 10대제자?사천왕, 대범천왕 제석천왕, 약사불,보승불,아미타불,부동존불,연등불,미륵불, 4금강 용왕, 용녀 등이 둘러서고, 하단에는 법을 청하는 사리불의 뒷모습이 표현된 군도형식이다.
영산회괘불 가운데 하단에 聽聞者가 표현된 도상은 법화경 방편품과 비유품의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는 지혜제일이라는 사리불을 통해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참 뜻을 깨우치고 있는 것으로, 법화경의 중심사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사리불을 청문자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청룡사 괘불은 1653년 영수사괘불의 도상을 모본으로 하여 조성한 것이지만 좌상형식의 영산회상도가 대체적으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비해 청룡사괘불은 유일하게 설법인의 수인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화면의 하단에 기록된 화기를 보면 청룡사괘불은 1658년(효종 9) 5월에 司果朴蘭, 明玉, 應尙, 淨心, 法能 등 5명의 화원이 조성하였다. 조성배경에 있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청룡사가 인평대군의 원당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인평대군의 쾌유를 비는 뜻으로 왕실에서 조성을 독려하였을 것으로 추정을 된다. 이는 효종실록에 나타난 효종의 인평대군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도화서 화원으로 추정되는 司果 박란이 청룡사의 불사에 참여하고 있어 그 신빙성을 갖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