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청령포에서 권력을 물었더니

천부인권 2009. 8. 3. 01:25

 지인의 고향이 단양이라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고 안내해 준다하여 아들과 함께 단양 일대를 다녀왔다. 1박2일로 계획을 했으나 일기 관계와 현지 사정으로 새벽 밤에 집으로 귀가를 하였다.
제일 먼저 청령포가 생각이나 글을 적어 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으나 청령포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그곳에서 주는 유인물을 보면 너무나 설명이 잘되어 있어 누구나 알 것이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16일 명승 제50호로 지정된 곳이다. 비운의 왕 단종(端宗)은 세종대왕의 맏아들 조선5대왕 문종과 현덕황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사이의 원자로 태어나 8세(1448)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고, 1452년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나이로 제6대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계유정난 이후 1455년 6월11일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상왕이 되었으며,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사건(1457)이 일어나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 사사되자 서인으로 내려지고 하필 그해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집이 떠내려가자 영월 동헌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으나, 결국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세조는 관풍헌의 방문을 모두 잠건 후 아궁이에 단종이 죽을 때까지 장작불을 지펴 죽게 하는 아주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한가로운 풍경속에 죽음으로 몰고가는 권력투쟁이 있었다.>


 

<주차장에서 청령포 방향으로 오다보면 노래비가 서있다.>


 

<청령포 맞은 편에 있는 이 표지석은 2004년에 아름다운 숲으로 등록 됨>

 

천만리 머나 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위 시조는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는데 그때 사약을 가지고 간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지은 글이다. 그는 마음의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고, 벼슬을 버리고 배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그의 시조가 권력의 무상함을 더욱 애절하게 한다.



 <좌측에서 배가 오고 있다, 우측에 잘 다듬어진 길은 예전의 뱃길이다.>



 <배를 타고 청령포에 도착하는 모습>



 <이 몽돌밭은 강물이 날라온 것들이라 한다. 많은 땅이 생겼다.>



<소나무 숲사이로 어소가 보인다.>

 

 청령포 안내표지와 유인물에는 단종어소와 사랑채, 단묘재본부시유지비, 관음송, 망향탑, 금표비 등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소는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의 모습, 열려진 방 마다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죄없는 이여인의 한은 누가 알아 줄꼬?>


 

<사랑채에서 어소를 바라본 모습>


 

<담묘재본부시유지 비와 어소 마당 전경>


 

<호장 엄흥도 인지, 어계 조려인지는 몰라도 단종을 찾아 온 충신들과의 만남>


 

<단종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둔 모습>

 

비는 총 높이 162cm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 고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 새기고 후면에는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竪石」이라 기록되어 있다.



 

<담묘재본부시유지 비각>


 

<담묘재본부시유지 비>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은 높이가 30m, 가슴 높이의 둘레가 5m이며, 지상 1,2m 높이에서 두 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 3,3m와 2,95m이다. 나무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왕조 제 6대 임금 단종(1441~1457)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부르는 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하여 볼觀, 들었다하여 소리音자를 써 관음송이라 전한다.




<관음송의 한쪽가지는 곧게 서있고 한쪽은 한양을 향해 비스듬이 누워 있다. 곧은 것은 떠나지 못하는 자신이요, 서울방향으로 비스듬한 것은 왕후를 그리는 마음이라 한다.>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단종이 만들었다는 탑>

 

 영조2년(1726)에 세운 금표비의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淸泠浦 禁標」, 뒷면에는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금 숭정구십구년「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崇禎九十九年」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차후 진흙이 쌓여 생겨난 땅에서도 금표나 금송에 대한 채취를 금지한다는 뜻으로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다. 단종이 약 2개월 동안 이곳에 있을 때에도 비슷한 제약을 당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청령포금표 앞면>

 

단종의 애절한 한을 담은 어제시(御製詩)가 어소의 현판에 걸려 있어 말을 해주듯 권력에 밀려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 원한 맺힌 청령포에서 죽어서 민심을 사로잡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나는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어쩌면 단종과 노무현은 닮은 곳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청령포에 들어가는 배는 지금은 나룻터에서 좌측의 모래가 쌓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지만 예전에는 나룻터 정면에서 들어갔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나룻터 오른쪽 “청령포 금표비”의 앞면이 바라보는 쪽에 나룻터가 있었다. 강물이 땅을 움직였고 그 땅의 모양은 나룻터를 점점 좌측으로 이동 시켰다.
강물이 땅을 움직이듯이 권력도 강물처럼 움직이는 민심에 의해 이동할 것이다. 청령포 이곳에서는 세조가 역적이 되는 것처럼 봉하마을에서는 이명박이가 역적이 될 것이다.  




<어소의 현판인 어제시>

 

 어제시(御製詩) - 단종

 

千秋無限寃 寂寧荒山裡(천추무한원 적령황산리)
萬古一孤魂 蒼松繞舊園(만고일고혼 창송요구원)
嶺樹三天老 溪流得石喧(영수삼천노 계류득석훤)
山深多虎豹 不夕掩柴門(산심다호표 부석엄시문)

 

천추의 원한을 깊이 품은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