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통도사 하위영역의 건물들

천부인권 2009. 8. 7. 07:48

 통도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범종루(梵鐘樓)와 하위영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락전이 보인다. 범종루에는 보물 제11-6호인 통도사 동종의 모사품이 있어 성보박물관에서 사진으로 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범종루 앞 안내판에는 동종의 내력을 이렇게 적어 두었다.

 <통도사 범종루>

 

양산 통도사동종(梁山 通度寺銅鐘)
보물 제 11-6호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조선 중기에 승려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종이다. 이 종은 맨 위의 용뉴(龍?), 종 몸통의 상대와 하대, 유곽(遊廓) 등을 모두 갖춘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이다. 상대에는 위아래 두 줄로 범자(梵字)가 배치되었고, 유곽 안에는 아홉 개의 유두가 있는데, 중앙의 하나가 특별히 돌출되었다. 종 몸통 가득히 명문이 새겨진 까닭에, 유곽 사이의 보살상은 작게 표현되었다. 종으로는 유일하게 팔괘(八卦)가 돌려 새겨져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종의 명문에는 1686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인비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 50여 년 동안 경기, 경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종 만드는 장인(匠人) 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종의 모습>

 

극락전 앞 안내표지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봉안하는 극락전은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도 하며, 또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가 다스리는 곳이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이기 때문에 극락전은 언제나 중심 불전의 서쪽에 위치하여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향하도록 세워져 있다. 극락정토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염원하는 사람은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염불을 외우며 극락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極樂往生)을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 신앙은 그 어떤 신앙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여, 6 . 7세기 무렵부터 이미 대중 속에 자리 잡았다. 삼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생겨난 수많은 희타 신앙으로 귀의(歸依)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세워진 건물이다. 그만큼 아직도 아미타여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함께 그 좌우에 관음(觀音)과 대세지(大勢至) 보살을 봉안한다. 이곳 통도사 극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이 극락전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초에 중건(重建)되었다. 이 건물은 통도사에 있는 세 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下爐殿)에서 중간 위계(位階)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관의 평면 구조 역시 그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도 화려하고 대웅전에 버금갈 정도로 내부 장식도 많은데, 이 극락전 역시 그렇다. 작은 건물임에도 팔작지붕에 받침기둥(活柱)을 갖추고 있다.

 

  <극락보전>

 

단청이 거의 사라진 극락전 벽면에는「반야용선」의 그림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http://cafe.daum.net/ad48/Wvlt/123>에 의하면 반야용선은 절에서 천도제를 하거나 큰 제를 지낼 때 등장을 하며, 또한 무속인들이 굿을 할때 등장 하는데, 앞머리는 용 모양으로 되어 있고 꼬리도 용꼬리라 편의상 그냥 용선이라고 한다. 이 용선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 또는 진리나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타고 가는 배이다.
한마디로 반야용선은 진리의 등불이자 중생을 이끄는 구원의 불빛과도 같다. 반야(般若)란  불교용어로 "진리를 깨달은 지혜" 라고도 한다. 따라서 지혜를 얻은 자들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배를 타고 해탈의 바다를 건너 저쪽 해안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불교에서 쓰는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뜻하기도 한다. 이 배는 중생들에게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주어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함으로 누구든지 반야용선에 승선하면 지혜를 깨달아 고통 없는 부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역동적인 모습의 그림이 두 개 있는데, 머리위에 쓴 것을 볼 때 “손오공”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반야용선>

  <손오공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이 벽화는 무엇일까?>

  <극락보전의 내부>

 

만세루는 법요식을 거행할 때 사용했으나 지금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정리해 두었다.

만세루(萬歲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만세루는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樓閣)이다. 이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644년(인조 22)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의 외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이 높고 그 간격이 넓어 실물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본래 누각은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간 2층의 다락집으로, 기둥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그런데 이 건물은 낮은 받침(基壇)위에 단층 건물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사면 기둥 사이에 모두 창호(窓戶)를 설치함으로써 오히려 불당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들 창호는 제작 수법이나 재질로 보아 근래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바닥을 낮게 만든 이유는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한 데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산지에 위치한 절의 누각은 산지 경사로 인해 2층 누각그이 2층으로 오르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통도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곳이 2층의 누각이었다면 의식을 거행할 때 오르내리기에 크게 불편하였을 것이다.
건물의 규모로 보아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전국 승단 행정(僧團 行政)을 총괄하던 으뜸 사찰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잘 나타내는 건물이라 하겠다. 건물은 장식을 별로 하지 않은 익공계(翼工系) 팔작(八作)집으로 누각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랐다. 정면 중앙에 있는 양기둥 위의 건물 밖으로는 용의 머리를 새기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용꼬리를 장식하여 출입구로서의 중심성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만세루’라 는 건물의 현판은 6세의 신동(神童)이 썼다고 한다.

  <영산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 내부>

 

재미 있는 것은 건물 안에는 물고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건물 밖에 나오면 용으로 변해 있다. 이는 중생들이 만세루 안에서 설법을 듣고 밖으로 나올 때에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용처럼 되라는 의미를 새긴 것이라 한다. 만세루에 가시면 나오 실 때 꼭 득도하시고 세상의 진리를 얻어 오시기 바랍니다.

  <만세루 안에 새개둔 물고기 꼬리>

 <밖에는 용이 조각 되어 있다.>

 

만세루 맞은 편에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을 안내하는 표지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어 두고 있다.

영산전(靈山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가르침(佛法)을 제자들에게 전한 곳이다. 바로 이 영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한다. 이 영산전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통도사의 세 영역 가운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하위영역의 중심 불전으로 동서로 양옆에 약사전과 극락전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구성은 조선 후기의 불화(佛畵)에서 흔히 삼세불(三世佛)로 표현되었다. 삼세불은 중앙에서 자리 잡은 현세의 부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왼쪽에 자리 잡은 과거의 부처 약사불(藥師佛), 오른쪽에 자리 잡은 미래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말한다. 세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는 바로 이러한 삼세불의 배치와 일치한다.
영산전의 건축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송곡선사(松谷禪師)가 중건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사찰의 중심 불전으로는 드물게 소박한 형식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마 통도사 전체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격을 맞추기 위해 꾸민 것으로 짐작된다. 외형상으로 보면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범한 건물이지만 정면의 기둥간격이 넓어 외관이 위풍당당 하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내부 벽에는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품격 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는 1775년(영조 51)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영산전>

 <다보탑 그림>

 

하위영역(爐殿)의 마당 가운데에 보물 제1471호인 통도사 삼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단아한 석탑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만세루에서 바라본 삼층석탑>

 

통도사 삼층석탑(通度寺 三層石塔)
보물 제1471호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극락전 앞에 위치한 이 3층석탑은 잘 다듬은 4매의 큰 돌(地臺石)위에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이중 받침돌로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상층 받침돌의 가장자리에는 각각 모서리 기둥(隅柱)을 새기고, 그 사이에 받침기둥(撑柱)을 두어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하층 받침돌의 각면에는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으로, 이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3층의 몸체(塔身)는 모서리기둥만 새겨두었을 뿐 별다른 조각이 없다. 4단의 받침대 위에 올린 지붕돌(屋蓋石) 역시 당대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꼭대기 부분에는 받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여러 장식을 올렸는데 현재 장식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인 조성 방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엽이나 고려시대 초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1987년에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그 당시 상층 받침대 부분 안에서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탑이 조선시대에 개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층 받침대 아래의 다진 흙 속에서는 금동의 소형 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현재 이곳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탑기단 안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물은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며 땅을 다질 때 묻은 것(鎭壇具)이거나 혹은 탑의 건립과정에서 행하였던 여러 단계의 의식(儀式)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삼층석탑>

 <약사전에서 바라본 삼층석탑>

 

사람들이 절을 찾는 이유중에는 이 약사전의 효험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 많을 듯 싶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구복의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본다면 아프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약사전 앞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약사전(藥師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이 건물은 동방의 유리세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별시키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불성(圓滿行)을 닦도록 도와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세계를 다스리므로 언제나 약사전은 중심 불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약사여래는 과거세계에서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12가지의 소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상징하는 부처이자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약사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는데 당시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였다.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병에 걸렸을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염불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국난이 닥쳤을 때마다 약사도량(藥師道場)을 열어 부처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을 만큼 약사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69년(고구려 공민왕 18)에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중건된 것이다. 건축구조로 보면 통도사의 3개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의 중심 불전인 영산전과 유사하나 영산전과는 위계적 차이가 있다. 우선 건물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전면의 기둥 간격도 영산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장식 역시 간소하다. 이러한 차이는 중심 불인 석가모니불과 약사불의 위계적 차이를 표현하는 건축 수법을 보여준다.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장식 솜씨 등이 오히려 건물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약사전>

  <약사전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