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통도사 중노전의 봉발탑과 용화전

천부인권 2009. 8. 14. 12:19

 통도사를 안내해주실 분이 계신지 물어보니 해설사 분이 계신다하여 찾아가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해설을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통도사를 방문하지만 해설을 요구하는 분들은 의외로 많지 않아 해설사 분과 둘이서 통도사 중간영역(中爐殿)과 上爐殿 경내를 다니며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불이문>

 

불이문 앞의 안내 표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어 불이문의 역할과 유래를 알 수 있었다.
통도사 불이문(通度寺 不二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이곳 불이문은 대웅전(大雄殿)과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인 동시에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중간 영역(中爐殿)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문이다. 불이(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는 이 문을 통해야만 만날 수 있으며, 이 속에서 참된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실현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을 통해 참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모든 번뇌를 벗게 되기 때문에 이 문을 다른 말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통도사 불이문은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의 건물이 언제 중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세부 기법으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중앙 기둥의 간격이 넓어 훨씬 웅장한 느낌을 준다. 정면에는 벽이 벗이 각 칸마다 판문(板門)을 설치한 점과, 다포계(多包系)의 팔작(八作)지붕을 연출한 점이 천왕문과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불이문을 경계 삼아 나누어진 중간 영역(中爐殿)과 하위 영역(下爐殿)의 위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듯하다. 특히 중앙에 대들보를 쓰지 않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로 받쳐서 지붕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독특하다. 그리고 기둥도 통도사 건물 중에는 가장 뚜렷하게 배흘림 양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건축 연대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이문 안에서 대웅전 방향>

 <불이문에서 하노전 방향>

 

불이문을 들어서서 오른 쪽을 보면 황화각이 있는데,통도사에는 강원(승가대학)이 황화각, 감로당, 원통방, 화엄전 등 이 있다. 황화각은 3~4학년의 고급 승려가 공부를 하는 곳으로 몽고의 난(1238년, 고려 고종 25년) 때 신라 삼보 중 하나인 황룡사9층목탑이 소실되자, 김유석, 이식 등을 보내어 금강계단은 어떠한지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고 전하며, 황건적의 침략 이후 고려 왕족이 머물렀던 정각이라고 한다.

 <황화각>

 

 용화전 앞에는 봉발탑이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할 때 가사와 바루를 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미륵부처에게 법을 전한다는 뜻으로 봉발탑이 있다고 한다. 용화전과 삐딱한 이유는 금강계단과 동일 선상에서 본다면 방향이 맞다고 한다. 안내표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통도사 봉발탑(通度寺 奉鉢塔)
보물 제471호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발탑(奉鉢塔)은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이다. 발우란 스님들이 공양할 때 사용하는 식사용기이자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전법(傳法)의 상징물이다. 이처럼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용화전 앞에 봉발 56억 7천만년 후에 이땅에 내려와 부처가 되라는 석가모니의 뜻을 받들어 미래에 출현하실 미륵불의 출세(出世)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형태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하대(下臺) 위에 간주(竿柱)와 상대(上臺)를 설치하고 그 위에 육중한 뚜껑을 지닌 발우를 안치하였는데 이러한 조형물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봉발탑>

 

용화전에는 미륵부처님이 계시고 미륵부처님은 아직 이 땅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없는 하얀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미륵은 바깥에 모셔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용화전 안에 모시고 있다. 용화전에 대한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고 있다.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용화전은 미륵불(彌勒佛)을 봉안한 건물로 미륵불이 출현할 곳이 용화 세계(龍華世界)의 용화수(龍華樹) 아래라는 데서 이 명칭이 유래하였다. 또 미륵불을 모시기 때문에 미륵전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涅槃) 한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이 땅에 출현하여 석가모니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부처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이 희망의 부처로 삼국시대부터 폭넓게 신앙되었다.
이 용화전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원년)에 청성대사(淸性大師)에 의해 중건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으로, 정면의 중앙 기둥 간격이 넓어 직사각형의 평면 구조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당은 측면의 앞쪽 가장자리에 출입문을 두지만, 이 용화전은 특이하게 건물 측면 중앙 칸에 문이 있다. 외부 장식은 정교하거나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중앙 기둥머리에 용머리를 연출하는 방식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내부에는 용머리와 연꽃, 봉황의 머리 등을 조각하여 이상 세계의 하늘을 연출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미래에 미륵불이 다스리는 용과 봉황이 날아다니고 연꽃이 만발한 풍요롭고 안락한 용화 세계를 상징한 듯하다.

 <용화전>

 

용화전 벽면에는 당태종 이세민이 수륙재를 지내기 위해 삼장법사를 초청하여 법을 들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유일한 미륵하생도인『서유기』의 내용이 있다. 성보박물관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용화전 안에 모신 미륵불>

 

 현장병성건대회도(玄裝秉誠建大會圖)
『서유기』 12회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린 것으로 당 태종이 저승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를 주관할 고승으로 현장을 뽑아 수륙재를 성대하게 치르는 장면이다. 벽화는 제단 앞에 나아가 용을 밟고 향을 꽂는 태종과 더불어 줄지어 선 승려들의 가장행렬 앞쪽에 머리에 관을 쓴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현장병성건대회도(玄裝秉誠建大會圖)>

 

일경공회정욕희도(一娙空懐精慾喜圖)
『서유기』94회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린 것으로 천축국 부마로 선택된 현장玄奘이, 손오공의 권유로 요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간 뒤의 이야기이다. 벽화는
공주로 변신한 요괴가 손오공 등이 방해할까 두려워 왕에게 손오공 일행을 성 밖으로 내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인 것이다.

 <일경공회정욕희도(一娙空懐精慾喜圖)>

 

봉선군모천지우도(鳳僊郡冒天止雨圖)
『서유기』87회의 내용 가운데 하늘을 모독한 죄로 가뭄에 든 천축 변방의 봉선군鳳僊郡에 비를 내리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손오공이 천궁에 올라가 옥황상제를 만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봉선군모천지우도(鳳僊郡冒天止雨圖)>

 

 도고혼소우정공문도(度孤魂蕭禹正空門圖)
『서유기』12회의 내용 가운데 재상 소우蕭禹가 불교의 바른 이치를 말하여 수륙재를 열 수 있었음을 그린 것으로 벽화는 당 태종의 명으로 수륙재를 주관할 고승을 선발하는 위징과 소우, 장도원 등을 묘사한 것이다.

 <도고혼소우정공문도(度孤魂蕭禹正空門圖)>

 

 난멸가지원대각도(難滅加持圓大覺圖)
『서유기』84회의 제목을 화제로 쓰고 85회의 초반부 내용을 그린 벽화로 멸법국滅法國에 도착한 현장 일행이 승려들을 죽인다는 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들어간 궤짝이 도적들 때문에 소동을 겪고 왕에게 받쳐진 장면이다.

 <난멸가지원대각도(難滅加持圓大覺圖)>

 

흑송림삼중심사도(黑松林三衆尋師圖)
『서유기』 81회의 내용 가운데 선림사에서 쉬다가 요괴에 잡혀간 현장을 찾던 손오공이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로 변해 광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흑송림삼중심사도(黑松林三衆尋師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