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무척산 모은암(母恩庵)은 효심으로 지은 절

천부인권 2009. 8. 23. 10:26

 민속학을 하시는 “우현”님이 사진으로 보여주신 미륵바위와 모은암(母恩庵) 이야기를 듣고 기회가 오면 무척산(無隻山)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가질 못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모은암(母恩庵), 부은암(父恩庵), 자은암(子恩庵), 해은암(海恩庵)이 있다고 하여 찾아가보기로 했다. 이 4개의 암자들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허황후가 돌배(浮石船)를 타고 무사히 이곳 김해까지 도착해 수로왕과 혼인을 하게 된 은혜에 감사함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라 한다.

  <남근을 상징하는 미륵바위>

  <단풍마, 산초나무, 등골나물, 붉나무>

 

모은암은 생림면 생철리에서 무척산으로 진입하는데, “석굴암”이란 암자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오늘은 자동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계속 차를 몰고 올라갔다. 모은암 110m를 남겨둔 곳에 작은 공간이 있어 주차를 하고, 50m 콘크리트 포장길을 오르니 인간의 때가 덜 묻은 오솔길이 마중을 한다. 오로지 몸으로 움직여야 갈수 있는 이런 오솔길을 걷다보면 자동차로 몇 시간을 달리는 시간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풀어서 조합하게 되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자동차가 절까지 들어가면 절이 돈을 많이 벌어들여 물질적으로 부유하겠지만 정신은 황폐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두당 얼마인지 돈으로 환산하여 처다 보게 된다.

  <오솔길을 가다보면 만나는 모습>

  <오솔길 모습>

  <사람이 다니는 오솔 길>

  <암자 입구에서 바라 본 전경 저멀리 낙동강 다리가 보인다.>

 

모은암 주위는 온통 커다란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어 옛날에 이런 곳에 불사를 하자면 얼마나 많은 공을 드렸을지 짐작이 간다. 감히 왕의 능력이 아니라면 이 험한 곳에 인력동원을 하여 절을 짓는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암자 입구에서>

  <암자의 입구>

 

모은암 창건설이 2개인데, 하나는 허황옥이 자신의 근본뿌리인 인도의 아유타국에 있는 부모님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여 지었다는 설과 가야국 2대 거등왕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고 자손의 번창을 위하여 창건했다는 설이 전한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거등왕 창건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남근과 여근이 함께 공존하는 장소가 그렇게 많지도 않겠지만 절 우측에 우뚝 솟아있는 미륵바위와 관음전으로 사용하는 동굴이 음양의 조화를 이룬 곳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연약한 심성은 자연의 신비로운 형상과 조화에 두려움을 느껴 그러한 곳에 정성을 다하고 기도를 하면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 질것이라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웅전 마당의 절반을 차지하는 모암바위(허황후바위)가 있어 거등왕 창건설을 더욱 유력하게 입증하고 있다.
가야국의 1대 수로왕은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여 인도의 앞선 사상인 불교가 필요했을 것이고 아유타국의 공주와 결혼을 통하여 불교를 수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수로왕의 시대가 끝나고 2대 거등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은 이때 왕권이 완료되어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할 정도로 강열한 힘이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등왕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이런 영험한 장소에 절을 지어 자자손손 대대로 영원히 잘살도록 빌었을 것이다.

  <대웅전과 모암바위>

  <대웅전 내부>

  <대웅전>

  <관음전 가는 길>

  <요사체 뒤쪽>

  <관음전 내부모습 >

  <모음각 종루>

 

모은암은 창건이후 흥망성쇄를 거듭하다가 1805년(순조5년) 정오스님께서 모암 나한전 소종지정 24년 3월 7일(1364년)이라 쓰인 종을 이곳에서 발견하시고 모은암을 지으셨다. 현재 부산 범어사 14교구 말사이며, “묵제스님”이 주지로 계신 곳이다.(전화번호 : 055-332-9200)

 <산신각에서 본 절 전경>

 <산신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