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의령 성황리 삼층석탑 이야기

천부인권 2009. 11. 13. 08:06

 

 

 

성황리라는 지명을 처음 대했을 때 이는 우리 전통의 ‘서낭당’과 관련이 있는 마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황당’은 ‘서낭당’의 원말이며, ‘서낭당’은 다른 마을로 들어가는 경계가 되는 지역인 고갯마루에 보통 만들어져 있다. 이런 곳의 마을엔 무당이 살기 마련이고 무당의 역할로는 소통과 상담의 역할, 의료의 역할 등을 주로 담당했다. 고등종교가 들어오면서 이런 역할을 대신하였고 불교가 왕성했던 시절엔 절에서 이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남씨들의 집성촌인 ‘성황리’는 상. 하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는데, 마을의 입구인 아랫마을 우측 계곡에 “성황리 3층석탑(城隍里 三層石塔)”이 서있다. 이곳을 주민들은 탑골이라 부르고 있어 신라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탑으로 가는 길은 마을에 주차를 하고 계곡으로 나있는 또랑을 따라 100m 정도 오르다 보면 나온다. “성황리 3층석탑(城隍里 三層石塔)”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성황리 삼층석탑(城隍里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

 

『탑이 서있는 이곳은 일명 탑골이라 불리는 마을 뒤쪽의 옛 절터이다. 탑 주위의 정황으로 본다면 이 탑은 본래 대웅전 앞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나 절의 이름이나 그 밖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신라 때 이곳에 있었던 절이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는 이야기만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탑은 이중받침(二重基壇)과 정사각형의 삼층 탑신을 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중으로 구성된 받침은 큰 돌 하나로 처리하였으나 상층 받침의 면석은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추었다. 상대 받침 위에 놓인 갑석()의 아랫면에는 각진 형태의 덧서까래를 두었으며, 윗면에는 두툼한 2단의 탑신 괴임을 두어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몸통부분은 받침부분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고, 각층 탑신의 모서리마다 기둥(隅柱)을 조각한 것 이외에 별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탑신에 비해 넓지는 않지만 낙수면과 지붕받침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삼층 탑신과 꼭대기 부분은 모두 유실되었다. 이 석탑은 받침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탑신부, 그리고 탑신부에 비해 작은 지붕돌이 특색이다. 각 부분이 과감하게 축소되어 있고 간략한 조성 방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