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징검다리 껑충 건너 반계정(盤溪亭)으로 가다.

천부인권 2009. 11. 28. 22:02

 

 

 

밀양 표충사를 향해 달리다 보면 대추산지에 대한 안내 표지석이 밀양천 안에 서있는 곳에서 50m가다 보면 밀양천 반대쪽에 예사롭지 않은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 범도리 181번지에 위치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6호인 “반계정”이 밀양천위에 떠있는 듯 홀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곳이다.

 

가는 길도 아름다워 온갖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데, 옛 향수를 자극하는 밀양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놓여있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반계정(盤溪亭)을 향하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집 입구에서 나그네를 맞이한다. 숱한 세월을 느끼게 하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배롱나무들이 이집의 역사를 대변해 준다.

 

이집은 벼슬을 마다한 산림처사라 칭송 받든 반계 이숙(盤溪 李潚)이 지인들과 사담을 나누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이곳에 정자를 짓게 된 사연은 ‘매를 날려 사냥을 하던 중 매가 돌아오지 않아 매를 찾아서 산 위에서 내려와 보니 이 반계정 터에 앉아 있는 매를 만났다고 한다. 자신도 이곳에 앉아서 밀양천을 쳐다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반계정 옥호가 걸려있는 정자는 옛 모습 그대로 이고 커다란 암반이 집터가 되어 있다. 우측의 ‘반계정사’ 건물과 생활을 하고 있는 건물은 예전에 불이나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여름에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밀양천의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아래서 신선이 된 듯이 밥상한번 받아보고 싶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반계정(盤溪亭)은 산림처사였던 반계 이숙(李潚)이 1775년(영조51년)에 학문과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이숙(李潚)은 연산군 때 밀양으로 내려온 교위 이사필의 8세손으로 손사익(孫思翼), 신국빈(申國貧), 안인일(安仁一), 남경의(南景義) 등 고을 명사들과 이곳에서 어울려 지냈다. 건물은 강가의 넓은 바위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고종 때 5대손인 이소구(李韶九)가 건물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후손들이 계속 보수해 왔다. 정자에는 이 곳의 경치를 반계정십이경(盤溪亭十二景)으로 담은 역대 문인들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반계정기(盤溪亭記)

반계(盤溪)는 응천(凝川)의 궁벽한 곳이다. 밀양 땅은 산수로 이름나 명현이 깃들어 쉬는 곳이 바둑알을 놓은 듯한데, 모두 성내와 마을 곁에 있어 인가의 연기와 접하고 닭소리 개소리가 들려 아침저녁 오갈 수 있으나 반계는 고을 동쪽 30리 밖에 있어 구름과 산안개를 뚫고 험한 곳을 건너 하루 종일 힘을 들여야만 다다르기에 지극히 독실하게 좋은 자가 아니면 살 수 없다. 이에 처사(處事) 이공(李公)이 이곳을 얻어 그 위에 집을 지어 이름을 반계정(盤溪亭)이라 하였다. 시내는 예전에 이름이 없었는데 이공(李公)은 그 반석이 평평하게 펼쳐지고 물이 그 위로 흘러가는 것을 사랑하여 마침내 이름을 내리고 또 그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나믐 일찍이 정자 위에서 이 어른을 받들어 모신 적이 있다. 정자는 모두 세 칸인데 두 칸은 남쪽을 향한 방이고, 당은 그 전면에 있는데 넓이는 방의 반쯤이다. 방의 동쪽이자 부엌의 남쪽은 방장실(方丈室)인데 사방이 모두 창이어서 동남으로는 산광수색(山光水色)이 통하고, 북으로는 부엌과 통하며, 서쪽으로는 두 칸의 방과 통하고, 서쪽 창의 남쪽에 지게문을 두어 당(堂) 아래로 통한다. 한 자 남짓한 층계가 있고 층계 아래에 몇 평되는 뜰이 있는데 모두 저절로 만들어져 한 치의 흙이나 한 조각의 돌이라도 보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조물주의 뜻이 있는 듯하다. 담장을 쌓아서 뜰을 에워싸되 그 높이가 냇물을 보는데 걸리지 않게 하였으며, 그 서편으로 문을 내고 문 밖에는 예닐곱 명이 앉을 만하게 마치 대패로 깎아낸 듯 평탄한 곳은 대게 뜰의 나머지 이다. 대문의 서편으로 10보 꺾인 곳에 바위가 있고 곁에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어 감상할 만하므로 그 바위 이름을 상련대(賞蓮臺)라 하였다. 상련대의 너비는 몇 칸 집을 지을 만한데 북쪽으로 바라보면 푸른 병풍 비취 절벽이 귀신이 도려내고 깍은 듯하여 춘분히 풍악(楓嶽)의 한 부분이 되기에 족하니, 대개 산수가 기묘한 곳이다. 응천(凝川)의경치를 두루 논하자면 이곳이 그중 가장 정채 있는 곳이니 공이 매우 사랑하여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야 백곡(柏谷)과 월연(月淵) 사이에 돌아보면 어찌 선인(先人)의 사업을 계승하여 부칠만한 한 뙈기 땅이 없어서, 오직 이 험하고 적막한 물가를 취하였겠는가? 이는 구양수(歐陽脩)가 이른바 산수의 아름다운 곳을 다 돌아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찾아 올 곳이니 공도 또한 지극히 독실하게 좋아하는 분이라 할 만하다.
공은 내게 이미 그 속에서 유숙할 것을 허락하고 내게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6,7년이 지나도록 더욱 애써 청하였다. 나는 이 정자를 사랑하여 굳이 어슬렁거리며 감탄하여 구경하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여기서 한껏 노닐며 평생을 마치고 싶으나 그것이 안된다면 차라리 그 정자 위에 이름 올리는 것을 영광으로 삼으리라. 또한 초연하게 산수 사이에 자신을 맡겨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었음을 사모하여 즐겁게 글을 쓴다. 공의 이름은 숙(潚)이고 자는 유청(幼淸)인데 맑고 간결하여 욕심이 적으며 숭상하는 것이 세속과 다르다. 그러므로 그 좋아하는 바가 이러하다고 하리라.
갑인년(1784) 양월(陽月 10월) 16일
지연산인(止淵散人) 남경희(南景羲) 쓰다.



盤溪亭記
盤溪凝川竆處也。凝川之地。以山水名。名賢棲息之所。往往棊置。皆在城市邑里之側。烟火之與接。鷄犬之相聞。可朝夕追逐。而盤溪乃在州東三十里之外。穿雲嵐 涉險阻。日竆力疲而後至焉。非至篤好者。不可居也。於是處士李公得之。築室其上。名曰盤溪亭。溪盖舊無名。李公愛其盤石平鋪而水流其上。遂錫之名。且以名其亭焉。余嘗獲陪杖屨於亭上。亭凡三間。二間向陽而室。堂其前。廣如室之半。室之東厨。厨之南又方丈室。室四方皆牕。東南通山光水色。北通厨。西通二間室。西牕之南置戶通堂。堂之下有盈尺之階。階之下有數步之庭。皆自然削成。不容寸土片石之補。造物者若有意焉。爲之墻以圍庭。令其高不碍於觀水而門其西。門外可坐六七人。平如鏟削。盖庭之餘也。門之西屈折十餘步而有石。石之傍可鑿池種蓮而臨賞。故名其石曰賞蓮臺。臺之廣可置數間屋。北望蒼屛翠壁。如神剜鬼刻。足當楓嶽一面。盖山水之奇者也。歷論凝川諸勝。此其爲眉目。宜乎公之甚愛而居之也。不然柏谷月淵之間。豈顧無一畒之地可以托肯搆之業。而惟險阻寂寞之濱是取哉。此歐公所謂竆山水登臨之美者之所必之。而公可謂至篤好者矣。公許余留宿其中。托余爲之記。歷六七年而請愈勤。余之愛斯亭也。固已徘徊歎賞而不忍去矣。欲爲之優遊卒歲於斯 而不可得也。則無寧載名其上。以爲榮耀。且慕其能超然自放於山水而好人之所不好。樂爲之書。公名潚字幼淸。淸簡寡欲。習尙異俗。故其所好如此云
閼逢攝提格 陽月 旣望 止淵散人 南景羲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