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밀양 부북면 제대리 추원재 追遠齋

천부인권 2010. 7. 15. 07:22

 

 

추원재는 김종직 선생의 생가이기도 한 곳으로 부북면 제대리(한골)에 위치하며 뒷산에 선생의 묘지가 있다. 제대리 사거리를 지나 무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한골로 들어간다. 마을 입구 보호수를 지나면 마을에 곧장 닫는데 이곳에 주차장이 있고 선생의 흉상이 서있다.
 

 

 

선생의 흉상 뒷면에는 선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1431~1492)

 

공의 휘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선산(善山)인으로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세종 13년 6월 이곳 추원재(追遠齋)에서 부친인 강호(江湖) 숙자(叔滋)공과 모친인 밀양 박씨 슬하의 3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세조 5년 문과에 급제했고 30여년동안 외직인 영남병마사, 함양군수, 선산도호부사, 경기도, 전라도, 황해도관찰사, 한성부좌윤를 거쳐 내직으로 도승지, 이조, 공조, 병조참판, 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당시의 정치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관직에 거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간략함을 따르고 번거로움을 막았으며, 정(靜)을 주로삼고 동(動)을 제재하였으므로 형적을 드러내지 않고도 일이 다스려지고 백성이 차마 속이지 못했다.
조선초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종장(宗匠)으로서 성리학의 정착과 조선중기 사림정치 수립에 기초를 놓은 경술(經術)과 문리(文吏)를 겸비한 성리학자 겸 문장가로서 청렴정직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중시한 학문의 꽃을 피워 문하에 정여창, 김굉필 같은 도학의 거유와 조위, 김일손, 유호인, 표연말, 만효온 등 문장의 명사를 많이 배출했고 중론을 조화시키며 풍속을 바로잡아 교화에 힘썼다.
시호가 문충(文忠)이며,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시다. 저서로 문집은 점필재집(佔畢齋集), 당후일기(堂后日記),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與地勝覽) 등이 있다.

 
‘밀양의 정신이 살아있는 예림서원

’에서 조의제문과 무오사화의 이야기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추원재 입구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추원재(追遠齋)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1
 이곳은 강호산인 김숙자(江湖散人 金叔滋)가 처음 거처한 곳이며 그 아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생장하고 별세한 곳이기도 하다. 두 부자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관인으로 활약한 업적도 적지 않지만, 길재()의 학통을 이어 성리학의 도통을 세우고 뿌리를 내리게 한 사상적 역할이 특히 중요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로 인하여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파 유학자들의 정신적 고향 같은 곳으로 간주되었으며, 많은 유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두 분의 학문적 정신을 추모하고 기렸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란과 세월이 흐르면서 두 분의 유적은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집채도 많이 낡거나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후 1810년에 사림과 후손들이 건물을 개조하고 중건하였으며, 그것이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재사(齋舍)를 추원재(追遠齋), 당호(堂號)를 전심당(傳心堂)으로 정한 것은 그 때였다. 전심은 도학(道學)의 의리 정신을 전하였음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재실은 6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이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살림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죽음을 맞이하여 뒷산에 묻힌 제대리는 무오사화의 무서운 폭풍을 맞아 그러한지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다. 추원재를 나와 선생의 묘소로 가보고자 했으나 위양못에서 경남문화재 위원을 만나기로한 시간이 촉박하여 다음을 기약하고 급히 나와 부북면 위양리를 향해 차를 몰았다.

 

2021.11.18. 전심당傳心堂 편액
2021.11.18. 전심당창건기傳心堂創建記

전심당창건기傳心堂創建記는 2010년 방문 당시에 한문을 몰라 그냥 지나친 편액들이 었다. 사람은 아는것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지금에야 글을 읽고 그 내용을 옮겨 둔다.

 

傳心堂創建記
堂在密西之高巖山下大洞 洞故朴監正墟 昔我江湖公始贅居 而佔畢公實生其址 山自雲門來 其扶輿淸淑之氣 宜其爲毓靈鍾傑之地 而其上盖有兩先生衣履之藏焉 自經戊午之禍 子姓散落 不能保先盧 而守墳墓者 殆將十有餘歲一省掃 見桑梓連巷 松楸繞隴 則有愀然如復之感 而至於恣牲之供 一任村廚齋宿之所 借占民戶 崇祖尙賢之典率多未備 則此堂之不可無作 而累世之經營 而未遑者也 佳洞族叔大集父 嘗有慨于玆 戊寅春 爰發創建之議 惟我不腆孱孫 鳩財合力 而大集父 實尸其役. 靈之踞密殆二同之遐 而客志營幹  奔走蕉廬凡半歲乃成 棠之廣輪幾筵 東西兩齋室幾楹 廚次第告訖 額其堂曰傳心 盖吾東心學  圃冶傳之江湖 江湖傳之佔畢 佔畢傳之暄蠹 而吾祖爲國朝傳心之初祖也 眉其齋曰追遠 盖自吾祖蔇 今三百餘年之遠 而樽俎之享克追其孝 則是子孫永世追遠之意也 是歲十月 余自京師還 因叅歲事之禮 羣族咸會齋宿于堂 各定有司 眡滌濯烹飪 蕨明上墓行事 籩豆增其腆 牲酒增其潔. 登降進退 依彝尊錄儀節 杉莎生色 龜獜動彩 密之人士 咸來觀禮焉 旣事退 序坐中堂 行飲嘏禮. 余盞而賀曰  祖後凡幾年 吾宗中凡幾人 而迨今日 成玆堂 而光宗者 其誰力焉 大集父逡巡而避曰 事有待時 功有量勞 今玆之功 實賴僉宗 若士友 若賢太守 左右之 庇護之力也 士林若賢太守 所以左右之庇護之者  玆葛故焉. 實由我賢祖遺風餘敎之力 貓不肖 其何力焉 然吾祖之力 旣愈遠而愈深 則子孫之誠 亦當愈遠而愈追 惟我諸宗 盍顧命齋之義 世追其誠 而以及於百世之遠乎 余曰 追遠之義 旣聞命矣 請以傳心之說 畢之 夫心子 吾人之同得於天 而仁禮義智孝友信睦 皆是心已 古來聖賢 以是相傳 而吾祖得之 父傳於子 則爲吾祖之孫者 固當世傳之義也. 吾宗苟能體仁 而爲尊祖之心 修禮而爲奉先之心 居家有孝友之心 處族有信睦之心 吾輩以吾祖之心爲心 吾輩之子孫又以吾輩之心爲心 則追遠之道 自在於傳心之中矣. 吾宗各自勉之哉. 僉曰 善 遂書之 又賡之以詩 兩世遺墟架一堂 荒原溪栢宛羹墻 巖山顧祖蹲蹲立 凝水深源滾滾長 數畝新亭徐子墓 百年餘澤鄭公鄕 孱孫自幸追先志 賀酒因傾萬祿觴
屠維單閼 大簇 上浣 後孫 繼善 謹稿
  
전심당창건기
전심당은 밀양 서편의 고암산高巖山 아래 대동에 있는데, 대동은 고 박감정朴監正의 터이다. 옛날에 우리 강호공께서 처음에 췌객贅客으로 와서 살았고, 점필공佔畢公이 실로 그 터에서 났다.
고암산은 운문산에서 뻗어왔는데, 그 떠받친 맑은 기상이 신령한 기운을 모아 인걸을 만들어낼 땅이거니와 그 위에는 그 두 분 선생의 형체를 묻은 곳이 있다.
무오년의 사화를 겪으면서부터 자손들이 흩어져서 선인의 오두막을 지키지 못하고 분묘를 지키는 자도 거의 10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니, 뽕나무ㆍ가래나무로 이어진 골목이나 소나무ㆍ추자나무로 둘러싼 선산을 보면 서글피 되돌아올 듯한 느낌이 있었다. 희생물을 공급하는 것도 한결같이 시골 부엌에 맡겨 놓고, 재숙하는 장소도 민가를 빌어서 사용하니, 조상을 높이고 현자를 숭상하는 법도를 구비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 당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었으나, 여러 세대에 걸쳐 계획하면서도 미처 서둘지 못했다.
가동佳洞 족숙族叔 대집大集씨가 일찍이 이 일을 개탄하여, 무인년 봄에 창건하자는 논의를 발의하고, 우리 넉넉하지 못한 잔약한 후손들이 재물을 모으고 힘을 합하였는데, 대집씨가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다. 고령은 밀양에서 거의 2백리나 되도록 거리가 먼데도, 객지에서 일을 주관하여 분주하게 다니며 마음을 졸인지 거의 반년 만에 완성하였다. 당의 너비는 자리 몇 개 정도이며, 동서 양편 재실은 몇 칸이고, 주방도 차례로 공사를 마쳤다. 그 당의 편액을 전심傳心이라 하였는데, 대개 우리 동방 심학은 포은과 야은이 강호에게 전하였고, 강호江湖는 점필재에게 전하였고, 점필재佔畢齋는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蠹에게 전했으니, 우리 선조가 조선조 전심傳心의 초조初祖여서이다. 그 재실의 편액을 추원追遠이라 한 것은 대개 우리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300여 년이나 되는데, 준조의 제기로 향사를 모셔서 능히 그 효성을 받들고 있으니, 이는 자손들이 영세토록 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이 해 10월에 내가 서울에서 돌아와 세사歲事의 예에 참여하였는데, 일족들이 모두 모여 당에서 재숙하면서, 각기 유사를 정하여 제기를 세척하고 음식을 익히는 일을 돌보았다. 이튿날 묘소에 올라가 행사를 하니 변두의 제기는 풍성함을 더하였고, 희생과 제주는 정결함을 더하였다. 오르내리고 진퇴하는 절차는『이준록』의 의식 절차대로 하였는데, 삼나무와 잔디까지 생색을 내고 거북과 기린이 광채를 내었으며, 밀야의 인사들이 모두 찾아와서 예를 보았다. 이를 마치고 물러나 중당에 차례대로 앉아서 음복의 예를 행하였다. 나는 잔을 들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 뒤로 무릇 몇 년이며, 우리 종중 사람들이 무릇 몇인데, 금일에 이르러서야 이당이 완성되어 조종을 빛나게한 것은 그 누구의 힘인가?” 하였다. 대집大集씨는 머뭇거리며 피하여 말하기를 “일에는 때가 있는 것이고, 공적에는 노고를 헤아려야 하는데, 이제 이 동적은 실로 여러 종인들의 힘이며, 사우나 어진 태수가 좌우에서 도와 비호해 준 힘이다. 사림이나 어진 태수께서 좌우에서 비호해 준 것은 그 무슨 연고인가? 실로 우리 현명한 선조께서 끼친 기풍과 남긴 가르침의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보잘것없는 불초가 그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선조의 힘이 이미 멀어질수록 더욱 깊어지니, 자손의 정성 또한 멀어질수록 더욱 추모하여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여러 종인들은 어찌 재실의 이름 지은 뜻을 돌아보며, 대대로 그 정성을 뒤쫓아 백세 멀리까지 지켜가지 않을소냐?”라고 했다.
나는 말하였다. “먼 조상을 추모하는 뜻은 이미 들었으니, 청컨대 전심傳心의 이야기로 마치고자 한다. 무릇 마음이란 우리 사람들이 하늘에서 같이 받는 것으로서 인예의지효우신목이 모두 이 마음이다. 옛날부터 성현이 이를 전해왔는데, 우리 선조가 얻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였으니, 우리 선조의 후손된 자는 진실로 대대로 전해야 할 뜻이다. 우리 종인들이 참으로 인을 체득하여 조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하고, 예를 닦아 선조를 받드는 마음으로 하며,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족간에는 믿고 화목한 마음을 가지며, 우리들은 우리 선조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우리들의 자손들은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마음으로 한다면, 먼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가 전심하는 가운데 절로 있을 것이다. 우리 종이들은 각자 힘쓰도록 하자.”하였다.
모두 좋다고 말하기에 그대로 쓰고, 또 시를 바쳐 올린다.

兩世遺墟架一堂 두 세대 옛 터에 당 하나 지었으니
荒原溪栢宛羹墻 거친 언덕 시내와 잣나무에 추모의 마음 완연하네.
巖山顧祖蹲蹲立 고암산은 조산을 돌아보며 우뚝우뚝 서 있고
凝水深源滾滾長 응천 강물 깊은 연원 출렁출렁 길구나
數畝新亭徐子墓 몇백 평 새로운 정자 서유자의 무덤과
百年餘澤鄭公鄕 백년 동안 남은 은택 정공의 고장이로다
孱孫自幸追先志 잔약한 후손은 조상 뜻을 추모함을 다행으로 여겨
賀酒因傾萬祿觴 축하의 술 기울여 잔에 가득 붓노라.

도유단알屠維單閼(기묘:1819) 정월 상순
후손 계선繼善 삼가 짓다.

 

출처 및 참조

국역밀양누정록-밀양문화원/제작 신지서원(1995.12.11)-발행 2008.2.29

 

2021.11.18. 추원재追遠齋 편액
2021.11.18. 추원재중수기 追遠齋重修記

追遠齋重修記 추원재중수기
祖上의 遺志를 繼承하고 그 遺跡을 保全함은 爲人子孫者當然之道理이며 崇祖追遠之誠이다. 惟我密陽郡府北面堤大里大洞追遠齋는 그 基地가 故朴監正墟로 我江湖先祖의 始贅居地이며 佔畢齋先生實生之址이다. 先生晩年에 門弟들과 經史를 講論하고 吟風詠月하든 雙樹亭도 있었고 그 後山에는 선생의 幽宅이 있는 聖地이다. 戊午之慘禍로 子孫들이 散在하고 여러차례 騷亂을 겪는 동안 生家等遺蹟들이 原狀을 保存하기가 어려웠다. 
純祖十年庚午에 士林들과 後孫들이 合議하여 建物을 改造重建하고 이때 正楣를 追遠齋라 하였고 堂名을 傳心堂이라 하였으니 傳心이라함은 吾東方心學이 鄭圃隱吉冶隱으로 해서 江湖에게 傳했으니 江湖는 我東方心學傳授의 初祖이며 그는 其子佔畢齋先生에게 傳하고 先生은 다시 金寒暄堂과 鄭一蠹에게 傳했으니 先生을 朝鮮朝心學의 傳授者라는 뜻에서 이다. 
그 後累次補修하였으나 歲月과 함께 頹落을 免하기 어렵던 차 民官協同으로 鄕土出身尊顯發揚事業으로 佔畢齋先生記念事業會가 發足되어 活潑히 事業이 進行되든 中 先生의 生家欥建인 追遠齋가 檀紀四三一九年 丙寅에 地方文化財資料第一五九號로 指定되고 그 翌年인 檀紀四三二○年 丁卯에 當局의 支援을 받아 傳心堂 建物과 食水井을 重修하였으며 垣墻과 其他附帶施設을 옛 形態로 復元하였다. 이 工事의 設計 및 監役에는 先生의 後裔인 現密陽副郡守 金榮洛의 苦衷과 精誠이 담겨져 있어 公私의 道를 함께 빛낸 그 뜻을 기리고저 여기에 表한다.
檀紀四三二一年 戊辰夏 日
密陽郡守 李球燮 謹稿
靈山後人 辛容玉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