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의 일출을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436-7번지 곡강정(曲江亭)에서 찍어볼 요량으로 새벽에 출발하여 검암리에 당도하니 곡강정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열려있지 않아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가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이곳에 사시는 분이 곁으로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뜨는 방향을 물으니 곡강정 뒤 산위에서 떠오른다고 하신다. 곡강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찍으려면 낙동강의 반대편 창원 대산으로 가서 망원렌즈로 찍는다면 마음에 그려둔 풍경을 볼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것이 최선이다. 다음에 찾는다면 일몰 시간을 맞추어 와야겠다.
이곳에서 곡강정 방향으로는 수산다리가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본포다리가 보인다. 낙동강은 커다란 용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듯이 굽이쳐 흐르다가 이곳에서 또 다시 굽이를 치며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시골은 아침이 빨리 오는 것 같다. 해가 뜨기도 전에 곡강정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고 다시 보니 곡강정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열려있다. 이곳에 사시는 분의 허가를 얻어 곡강정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 곡강정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소유로 성산군 이식(星山君 李軾)께서 처음 밀양에 오면서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에 그 아드님인 덕창(德昌)께서 지은 것으로 400여년간 후손들이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 목조기와로 만들었고, 가운데 방한칸을 넣었는데 양쪽으로 문을 올려둘 수 있게 만들어 전체가 하나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낙동강을 바라보며 마당이 있고 그곳에 팔각정을 요즘에 만들어 두었고 그 옆엔 낙동강과 경계하여 150년 된 팽나무가 1982년 11월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서있어 운치를 더한다.
곡강정중수기(曲江亭 重修記)
세상에서는 강산의 낙(樂)을 논하여 삼공(三公)의 고귀함을 얕볼 수 있다고 하는데 삼공의 고귀함을 어찌 구한다고 얻겠는가? 간혹 거기에서 얻지 못하기에 여기에다 낙을 붙이지만 그 낙은 참된 낙이 아니다. 오직 구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초연히 강산의 경치에 자득한 자라야 그 참된 낙을 얻었다 하리라.
옛날 성산군(星山君) 이공(李公)은 중종(中宗)께서 반정(反正)할 즈음에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 때 훈신(勳臣)이 조정을 마음대로 하여 부귀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고 황각(黃閣)*¹) 보기를 바깥사랑 정도 여겼다. 공은 그런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는데 벼슬길에 나아갈 줄만 알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일신에 다가오는 물건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공은 외물(外物)*²)이 허물이 됨을 알고서 떠남에 과감하여 마치 그것이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듯 하였다. 그러므로 관직이 부정(副正)에 지나지 않았고 품계도 2품에 그쳐, 공허한 호칭만으로 평생을 마쳤다.
그가 조정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북문(北門)의 화가 일어나 한 시대의 선량한 인사들이 남김없이 제거되었는데 공은 홀로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안개 낀 물가에서 소요하며 물고기와 더불어 거처하고 갈매기와 더불어 노닐며 편안하게 자적하면서 세상의 어떤 낙이 이 낙과 바꿀 수 있을 것인지 알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강산의 참된 낙이요 백 세대 뒤에도 오히려 그 고상한 기풍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른바 곡강정(曲江亭)은 곧 그가 지팡이 짚고 다니던 곳으로 아름다운 경치는 낙동강 일대의 으뜸이다. 대제동(大堤洞) 10리에 걸친 연꽃과 이궁대(離宮臺)와 사인암(舍人巖)의 천길 깎아지른 절벽은 보기에도 놀랍고 바람 소리와 갈매기, 안개 구름과 대나무가 아래에서 날마다 자태를 지어내니 지나는 이는 누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깨고, 멍하게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거니와, 하물며 부귀를 하찮게 여기며 물외(物外)에 노닐어 자득한 사람에 있었으랴! 애석하게도 징험할 문헌이 없어 그 낙이 어떠했는지 실상을 알 수 없다.
가정(嘉靖) 연간에 공의 아들 통판공(通判公)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대개 부친의 뜻을 받들어 지은 것으로, 지리지에 이른바 고강정(高江亭)이 곧 이곳이다. 강물이 급한 협곡에서 내려오는 형세가 매우 높게 보이므로 그렇게 일컫는 것인데 정자가 없어진지도 오래 되었다. 지금 임금 6년(1806)에 자손들이 힘을 합하여 부조(父祖)의 뜻을 계승하여 건축하였는데 수백년 사이에 강물의 흐름은 거듭 바뀌어 옛날 가파르던 형세는 완만해지고 높았던 것은 평평해 져서 정자 아래로 물이 감돌아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형세가 있기에 지금 이름인 곡강정으로 바꾸었다.
정자가 완성됨에 강산의 풍경은 더욱 돋보이고 구경하는 자는 베틀에 북이 들락거리듯 자주 드나들면서 반드시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데 기문(記文)으로 적어 놓지 않으면 먼 옛날 선현의 유적임을 어찌 알겠는가? 이씨가 나에게 부탁함에 내가 명을 받아드린 의도가 여기에 있으므로 그 이름이 있게 된 유래는 간략히 적고, 대를 이어 건축한 내력과 근본을 상세히 서술하여, 구경하는 자로 하여금 배회하고 상상하면서 높은 산 긴 강물 사이에서 얻음이 있도록 하고자 한다.
금 상 9년 도유대황락(屠維大荒落: 기사己巳, 1809) 초봄 하순
영양(寧陽) 남경희(南景羲) 쓰다.
황각(黃閣)*¹) : 제상이 집무하는 관청
외물(外物)*²) : 정해진 분수 밖의 물건. 여기서는 부귀영화를 가리킨다.
曲江亭記
世論江山之樂。謂可以傲三公之貴。三公豈可求而得哉。往往不得於彼而寓樂於此。其樂非眞樂也。惟求之可得而棄之如敝屣。超然自得於江山者。乃爲得其眞耳。故星山君李公策勳於 中廟改玉之際。是時勳臣專朝。富貴在其掌握。而視黃閣如外舍。公翺翔其間。知進而不能去。則自來逼身之物。孰得以禦之。公知外物之爲累而去之果。猶恐其凂己。故官不過副正。階止於二品。而擁虛號以終其身。其去朝未幾。北門之禍作。一時善類芟刈無餘。公獨杖屨逍遙於烟波之上。魚蝦之與居。鷗鷺之與遊。得得然自適。而不知世間何樂有可以易此。此江山之眞樂。而百世之下。尙可以想高風也。今所謂曲江亭者。卽其杖屨之所。而勝賞爲洛江一帶之最。大堤十里荷花。離宮臺舍人巖千仞削壁。見之可驚。風颿沙鳥烟雲竹樹。日獻態於下。過者不覺犂然而心醒。窅然而形釋。而况傲富貴遺外物而自得者乎。惜乎。文獻無徵。無以尋其所樂之如何也。嘉靖中公之子通判公作亭其上。盖所以肯搆。而輿地誌所謂高江亭是也。江從急峽下勢甚高故云。而亭之廢久矣。今上六年。子孫合力而肯搆之。數百年之間。江勢屢易。向之急者緩高者夷。匯於亭下而有流觴曲水之勢。故易以今名。亭旣成。江山之勝益著。觀者如織。必問主人爲誰。不有以記之。惡知先賢遺澤之遠哉。李氏之托不佞。景羲之承命在是。故略乎其所由以得名。而詳於其肯搆之所由本。俾觀者徘徊想像而有得於山高水長之間焉。
上之九年 歲在屠維大荒落 孟春下浣 寧陽 南景羲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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