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밀양의 정신이 살아있는 예림서원

천부인권 2010. 7. 14. 09:39

 

 

 

예림서원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여기서 밀양시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라 풍광이 좋은 곳임을 알게 된다. 독서루를 지나니 감물을 들인 천들을 말리고 있었다. 오랜 고택과 천연염색을 한 천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또 다른 상상을 하게 한다.
이곳 예림서원은 밀양의 정신을 낳은 김종직 선생을 모신 곳으로 선생이 남긴 꿈속 이야기로 인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일을 겪는데 이를 무오사화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함양 학사루에 걸려있던 유자광의 시를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김종직이 내려버린 것에 앙심을 품고 있던 차에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던 것을 〈성종실록〉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이 ‘조의제문’은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해석하여 “조의제문은 겉으로는 초나라의 회왕(의제)이 꿈에 나타나 이를 조문한다는 내용이었으나, 항우에게 죽은 의제는 실제로는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이을 문제 삼아 훈구파는 유자광과 더불어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바쳐 피비린내 나는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여기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조의제문과 국역문을 옮긴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원문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孫心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조의제문(弔義帝文) 국역문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낭탐(羊狠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의 노필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출처 : http://blog.naver.com/dansan1/100024638946

 

 

 

‘조의제문’을 그냥 있는 대로 해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꿈속 이야기이다. 그러나 미운 상대를 어떻게 하던지 해하려 한다면 글을 글로보지 않고 각색을 하여 소설을 써내려 간다. 그러다 보면 소설이 진실처럼 각색이 되어 일반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키게 되고 소설이 진실인양 만들어 진다. 그 속에는 권력의 개가 된 총알받이가 나와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 마련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그러한 소인배가 사람을 해하지 못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니고 있다. 역사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끝없이 충고하지만 그런 교훈은 쉽게 잊고 산다.

 

 

 

 

예림서원이 이곳에 있기까지의 내력을 보니 명종 22년(1567년)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가 밀양유림의 요청으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지금의 밀양시 활성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 하였다가 인조 13년(1635년)에 상남면 예림리로 옮겼으나 숙종 6년(1680년)에 모든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자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왔다.


고종8년(1871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澈廢令)에 따라 강제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1년(1874년)에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과 동서제(東西齊)등 부속건물을 크게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 후에는 사액(射額) 현판을 다시 달았으며, 육덕사(育德詞), 정양문(正養門),강당,동재,서재,양몽재(養蒙齋),독서루(讀書褸)등의 건물이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예림서원(禮林書院)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79호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179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대유학자인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 서원은 조선 전기 대학자였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명종 22)에 덕성서원(德城書院)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634년(인조 12)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예림서원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669년(현종 10)에 왕이 편액을 내렸다. 현재의 모습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진행된 복원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림서원은 독서루와 구영당, 육덕사를 일직선으로 배치하여 앞에는 교육영역을 두고 뒤에는 제례의 영역을 두는 일반적인 서원의 건물 배치방식[전학후묘(前學後廟)]을 따르고 있다. 앞쪽 강당인 구영당은 유생의 교육. 회합 및 토론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좌우에 있는 돈선제와 직방제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공부하는 곳이다. 사당인 육덕사에는 중앙에 점필재를 좌우에 오졸재 박한주(오졸재 박한주 :1459~1504)와 송계 신계성(송계 신계성 :1499~1562)을 모시고 있다.
독서루 아래의 삼문은 정문의 기능을 하고, 2층의 누대는 유생들이 쉬면서 손님을 대접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서원 내의 장판각에는 김종직 선생의 저서와 문집을 간행하기 위한 책판(冊版)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