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서원곡 관해정을 찾아보니

천부인권 2009. 12. 22. 11:52

 

 

서원곡 입구 주차장에 내리니 매서운 겨울바람이 휙~ 소리를 내며 귀가를 스친다. 교방천을 가로 지르는 아치형 목교가 관해정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관해정(觀海亭) 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커다란 은행나무다. 1982년 마산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은행나무는 수령이 460년, 수고 13m, 나무둘레 4.5m로 정한강, 허미수선생의 식수로 원목은 폭풍에 절단되었으나 1996년도에 외과 수술을 하여 관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을 겪어 신령스러운 면도 있겠으나 가만히 살펴보니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연리목(連理木)이 되어 있다. 연리목은 부부의 금실이 좋음을 의미하고, 이상적 부부의 상징을 부여하다보니 시골에서는 사랑나무라고도 부른다.  “제발 촛불 쫌 켜지 마세요!”라는 경고문구가 왜 있는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관해정을 이곳에 세울 때에는 교방천이 축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증되는데, 교방천의 바닥을 보니 넓적한 바위들이 하얀 속살을 내보이며 펼쳐져 있어 축대만 없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으로 보여 졌다.


관해정에 앉아서 바다에서 솟아나는 태양이 교방천 암반 위를 흐르는 물결에 투영되어 나오는 경관은 어떨까하고 아무른 의미 없이 상상해 본다.

 


 


관해정 옆 오솔길은 무학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관해정 근처에는 곳곳에 화강암이 있어 주인 없는 돌이라고 생각하여 금석문을 새겨 두었는데, 의미 없는 “미륵존불” 같은 글귀는 왜 새겼는지 모를 일이다.

 

 

 

바다를 바라본다는 관해정(觀海亭) 앞 안내표지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관해정(觀海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호
마산시 합포구 교방동 492


관해정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제자들이 선생의 향사(享祀)를 모시기 위해 세운 회유서원(檜柔書院) 경내에 있던 건물이다.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고 관해정만 남아있다. 정구(鄭逑, 1543~1620)는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자신도 뛰어난 학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이다. 건물 앞에는 한강이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있다. 봄가을에 그의 제자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향사를 모신다.



 



 觀海亭記
余於丁卯冬 侍曺先生函文於盆城之山海亭 喜其兼山海之趣 而合幽貞之吉也 窃有慕焉 丁亥秋始得此地 又愛其儒仙舊跡之親切也 偶因朋友會叙 酒且半 題此詩「我欲爲亭近海灣 坐中誰作蔡西山 梔橘梅筠須早植 莫敎風雨六年間」坐中有取以爲坦當之計者 謂好事可以旣就 未幾 時世多事 旋遭壬辰兵火 十六七歲月 忽然飄過矣 癸卯冬 余始返故山 越明年 咸州士友輩 相與結茅數緣 長文載 適假居其傍 協力成就 纔十年而屋又傾頹 則勢將還爲路傍之棄地 文載 更闢址列礎架樑覆瓦經營數載費盡辛苦 余因沿海而來 輪奐之美 結構之精 不惟不啻前之草舍 而又非余當初所望也 窃幸三十年宿願 畢竟得遂 而顧余衰敗己甚 方在積病瀕死之中 又安得窮山海之勝 極幽遐之壯觀 有如盛年期許也 只有終日杜門而己 然衿期之爽 仁智之樂 則何可與他境界比喩也 仍念舊時同遊 無一存焉 今所追隨 多是丁卯以後之人 寧不爲之府仰長懷 慨然興嗟也耶
文載 請刊此時 遂略序顚末 以志焉寒岡鄭逑書


관해정기(觀海亭記)
내가 정묘(丁卯) 겨울에 분성(盆城)의 산해정(山海亭)에서 남명 조(曺)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을 때 그곳이 산과 바다의 정취를 겸하고 있어 즐겼고 그윽하고 곧은 예법에 합당하여 은근히 연모하였다.
정해(丁亥) 가을에 비로소 이 땅을 얻었는데 또한 최고운의 옛 행적이 절친하여 더욱 아꼈다. 우연히 벗들이 함께 모였을 때 술이 반이나 된 뒤 이 시를 지었다. 「내 정자를 바다 곁에 지으려니 이 자리에 누가 채서산(蔡西山)이 되리. 치자, 귤, 매화, 대는 일찍 심으리니 비바람 치는 육년간은 가르침이 없을 것이네.」 좌중의 사람들이 이것을 취하여 담당할만한 계획이라 여기고 좋은 일이니 성취될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지 않아 세상에 일이 많은데다 연이어 임진년의 병화를 만나면서 16, 17년의 세월이 홀연히 지나가 버렸다.
계묘(癸卯)년 겨울에 내 비로소 옛 산천으로 돌아와서 다음 해가 되었을 때 함주(咸州)의 선비 벗들과 서로 더불어 초가집을 몇 칸 엮었다. 장문재(長文載)가 마침 그 곁에 살아 협력하여 성취하였다. 겨우 10년 세월이 지나 집은 이미 기울어지고 무너져 그 정세가 마치 도로 길가에 버려진 땅과 같이 되었다. 문재(文載)가 다시 터를 닦고 초석을 세우고 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 기와를 덮는데 일을 한지 몇 년에 비용은 다없어지고 매우 고생을 하였다. 내가 바닷가를 따라서 돌아오니 그 외형의 맑고 아름다움과 엮은 구조의 정갈함이 뜻맊에 이전의 초가집뿐만이 아니었고 또한 당초에 내가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다행이 30년 숙원을 결국에는 이루게 되었다.
내가 몹시 늙고 쇠약해져서 바야흐로 오랜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것을 생각하면 또 어찌 산과 바다의 景勝을 다 감상하고 그윽하고 아득한 장관을 다 즐기겠는가. 만약에 젊은 나이라면 기약함이 있을 것이나 다만 종일 문만 걸어닫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벗과의 약속이 또렷하고 어진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이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함이 연전하니 어찌 다른 곳의 경치와 비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옛날 같이 놀던 것을 생각하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따르는 사람들은 거의 정묘년 이후의 사람이 많으니 어찌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면서 길이 생각하고 강개(慷慨)하여 탄식하지 않으리오.
문재(文載)가 이 시를 새길 것을 청하여 드디어 대략 그 전말을 서술하여 기록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씀


[출처 및 참고]

창원향교지(2004.11.1)-창원향교

관해정 안내표지판



 

한강 정구의 예언시

 

我欲爲亭近海灣(아욕위정근해만) 나는 가까운 바다 만에 정자를 지으려 하는데

坐中誰作蔡西山(좌중수작채서산) 좌중의 누가 채서산(蔡西山)이 되려는가?

梔橘梅筠須早植(치귤매균수조식) 치자 유자 매화 대나무는 반드시 일찍 심어두고

莫敎風雨六年間(막교풍우륙년간) 세월 험한 6년간은 가르치지 못할 것이네.

(창원부읍지에 전하는 한강 정구의 시 회원서원 관해정 터을 잡고 제자들 앞에서 지은 시)

*"세월 험한 6년간은 가르치지 못할 것이네." 임진왜란을 예견한 구절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