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국채보상운동 시발지 창원향교

천부인권 2010. 2. 6. 08:17

 

 

창원시 용호동에 있는 ‘경남도민의 집’에 가면 뼈아픈 역사의 한 토막을 절절히 알려주는 ‘국채보상운동 회문(國債報償運動 回文)’의 사본이 놓여 있다. 이 회문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IMF(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사태가 일어났던 1997년 말 지도자의 판단 실수로 나라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굴욕을 겪었을 때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일이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IMF사태가 일어나기 90년 전인 1907년 2월 11일에는 창원 향교의 교생들이 망한 조선을 구하고자 전국에 회문(回文)을 보내어 분연히 일어난 사건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지도자가 실수를 하여 나라가 망하게 한 것을 민초들이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조건 없이 내어 놓았다. 그러한 일들이 있었음에도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있었는가하면 왕이란 작자가 일본의 천황에게 작위를 받아 자신들의 안위만 챙겼다. 지도자들은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야 하는 도덕적 신념이 더 많은 법인데 그러한 것을 자신들의 직위 유지에 양심도 영혼도 일본에 팔아 자국의 민초들을 오히려 짓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몸을 의지하고 살고자 하는 민초들은 나라가 진 빚을 갚고 일본의 지배에서 벋어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국민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고 일말의 희망을 제시 했지만 결국 못난 지도자들이 뭉치지 못해 나라가 망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고자 한 그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국채보상 운동’의 회문을 ‘한국금융사 박물관’에서 해석을 해 두어 소개한다.
http://shinhanmuseum.co.kr/sch/full.cgi?opt_s=1&v_db=1&v_doc_no=00001374

 

회문 해석
위 글을 논고하는 일. 무릇 나라가 있으면 임금이 있고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있다. 나라에 임금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가 되며 임금에게 백성이 없으면 임금이 어떻게 임금이 되겠는가?   우리 온 나라의 신서(臣庶)들은 모두가 다 오백년동안 교화 생육 속에 자라난 혈기로되, 이렇듯 국가가 위태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털끝만치라도 국가를 무시하고 광구(匡救)한 도리가 있다면 비록 힘을 다하고 생명을 바치며 살같이 닳고 뼈가 으스러지더라도 어떻게 다른 마음을 가져 힘쓰지 않겠는가? 오호라 안타깝도다. 현금 국용(現今 國用)이 모자라서 외국의 부채차관이 벌써 1,300만원이나 되는데 이것은 온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일대 관건이다. 만약 한갓 미봉책만 일삼는다면 장차 나라가 아니요 백성이, 백성이 아닌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하자니 저절로 성장하면 가르치나니 그 자애로운 사랑과 돌보아 주신 은혜가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마는 자녀가 다른 집안에 장가들고 나서는 그 부친의 아한에 그 자식이 알지 못하고 그 모친이 병들어 누었는데 그 자식이 돌보지 않는다면 그 부모 된 자는 그냥 두고서라도 그 자식이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며 여유 있게 산다 하더라도 과연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이러하다면 세상에 어찌 산천과 부처에 기도하여 자식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차라리 절사하고 집안을 없애서 당초부터 이런 따위의 축원하는 일이 없는 것이 나올 것이다. 금일의 일은 이와 어찌 다르겠는가? 이리하여 서울 본부로부터 무릇 우리 군부의 신자 된 자로서 인륜의 도리에 의거하여 공의를 높이 확장하여 일반 사람이 같은 말로 단연회라 이름 하여 각도에 통문을 발송하여 조액을 수취하니 소문을 듣는 이들은 누구나 충의에 감격하여 팔뚝을 뽐내고 발을 굴리며 앞 다투어 의연금을 내는 이들이 그 몇 천 몇 만인지 알 수 없다. 우리 고을은 비록 먼 변방에 처해 있지만 동일한 우리 요순 같은 임금의 신민인즉, 어찌 용맹한 뜻으로 다투어 나아가 만에 하나의 티끌만한 보답이라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우선 본(창원)향교에서부터 이에 감히 우러러 포고하노니 의연금의 다과를 막론하고 서로서로 권고하여 힘에 따라 의연금을 내고 본교에서 회합하여 위로는 성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신민의 금수 같은 수치를 씻기를 바라노라.
초하루날 기록한 내용. 해당 동리에서는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 각기 그 동네 집집마다 설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또 모이는 날은 오는 장날인 17일로 정하니 이렇게 알 것.
丁未(1907년) 2월 11일 發文校任   曺喜正, 金柄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