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망우정에서 굶어죽은 홍의장군을 생각한다.

천부인권 2010. 2. 10. 10:51

 

 

 

낙동강을 굽어보는 도천면 우강리 언덕에는 임진란의 영웅,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를 기리는 유허비와 망우정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낙동강을 따라 많은 문화재들이 있는데, 낙동강 함안보가 완성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기에 미리 자료를 남겨 놓는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곳에는 전면에 “충익공망우곽선생휴허비(忠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라 적고 후면에 “숭정기원후삼기유사월(崇禎紀元後三己酉四月)” 이란 각자와 배동석, 조언성, 이기성, 신영북, 신계동 등의 이름을 새겨둔 비석과 비각이 있는데, 이는 이곳의 유림들이 장군의 의로운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워 둔 것이다. 그리고 장군에게 제사도 지내고 유림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망우정을 세워 두었다. 이비석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어 두었다.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忠翼公 忘憂堂 郭再祐 遺墟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931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름난 의병장(義兵將) 곽재우가 전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세운비석이다.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래 함안, 영산, 창녕 등지에서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리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장군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이 뜻을 모아 1789(정조13)년에 높이 180cm, 너비 70cm인 유허비를 세운 것이다.』

 

 

의령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懸鼓樹)에 북을 매달고 사재를 털어 누구도 생각 못한 의병을 일으킬 때 홍의장군 곽재우를 따르는 사람은 겨우 1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지략과 빼어난 용병술은 불패의 신화를 남기며, “바다에는 충무공, 육지에는 홍의장군이 있다.”는 신화를 남기게 됩니다.
이 불패신화의 영웅들은 임금을 잘못만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우당 곽재우선생은 아버지 곽월(郭越)이 처가살이를 하던 세간리에서 진양강씨(晉陽姜氏) 어머니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지었다는 용연정(龍淵亭)에서 글을 배웠고 자굴산 보리사에서 15세까지 공부를 하였으며, 운명적 스승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남명선생의 외손녀와 16세에 혼인을 하였습니다. 만약 남명선생을 만나 ‘경(敬)의(義)’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행동하는 선비가 되었을까” 그리고 65세의 나이에 스스로 굶어 죽는 길을 선택하였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달그리메님의 '망우당, 망우정에서 삶의 허무를 보다.에 쓰여 있는 글귀를 옮겨 둡니다. 

 

관직을 내어놓고 다시 한양을 떠나 성주에 이르자 재우는 집으로 가지 않고 해인사 백련암 산꼭대기 암자에 들어가 다시 벽곡을 시작했다.
재우는 물과 솔잎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재우는 깊은 명상에 들어가 과거가 주는 고통을 조금씩 다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 악연을 잊고 조금씩 무념무상 하는 데에 이를 수 있었다.
"이제야 하늘의 도를 알겠구나. 나는 세상의 모든 삶으로부터 벗어났다."
재우가 해인사 암자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하루 종일 홀로 지내도 사람이 그립지 않았다.
과거 고통도 사라지고 현실 근심도 사라졌다.
재우의 몸에서 기운이 조금씩조금씩 빠져나갔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졌다.
곡기를 끊었으니 더 이상 치유할 도리가 없었다. 재우는 죽음을 예견했다.
어찌 할 바 모르는 아들이 통곡했다. 재우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 평생 의(義)를 좇기는 했지만 거기 이르지는 못했다.
강호에 머물 때는 행복했으나 창의(倡義)한 뒤로는 나날이 근심이 깊어졌다.
이제 강호로 돌아와 숨어 지내도 근심은 한 번 생겨 떠나지 않았다.
의로운 사람은 세상을 구하고 슬기로운 이는 세상을 피해 산다고 했다.
나는 세상을 구하지도 못했고 세상을 피하지도 못했다.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다."   

 

 

 

 

 

이곳에는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과 여현정(與賢亭)이라는 현판이 있어 짧은 지식을 원망하면서 여현정(與賢亭)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니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그런 상황을 가장 절실히 반영하는 뜻을 담은 글귀가 망우정(忘憂亭)과 함께 있는 여현정(與賢亭)이란 현판에서 읽을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버리고 백성도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중국으로 도망을 간 선조 일행을 향하여 백성들이 돌을 던져 야유를 하였다. 이러한 선조는 충무공과 충익공의 활약으로 전쟁에서 조선을 구해내자 이들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까하는 의심을 하게된다. 그 의심이 너무 깊어 이순신은 적의 조총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망우당은 스스로 굶어 죽는다.

 

한자 실력이 짧아 여(與)자를 흥(興)자로 오기를 하여 전혀 다른 뜻이 된 것을 댓글로 지적을 해주신 분이 있어 찾아보니 '여현정(與賢亭)'이 옳은 표기인 것으로 판명 됩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여현정기(與賢亭記)'를 해석해둔 글이 있어 복사해서 옮겨 둡니다. 혹여 이글을 보시고 망우정을 찾으시는 분이 계신다면 좋은 정보가 될 것으로 사료 됩니다.

 

출처 : 곽재우 장군과 망우선자

 

여현정기(與賢亭記)

 

여현정은 영산현에서

(당시는 영산이 현이었다. 현재는 창녕군 영산면이다)

10리 정도 남쪽에 있다.

 

북으로는  산기슭을 깍아서 베고

남으로는 낙동강에 임하였다.

푸른 절벽은 병풍처럼 빙 둘러쳐있고

앞 강과 모래는 눈처럼 펼쳐져있다.

사방은 탁! 틔어서

멀리 보이는 산과 산에는

구름이 감돌아 빛나고 있으니

진실로 하늘이 빚어 낸 절경이로다.

 
그런 곽장군의 망우당 정사가 지금은 李君(이도순 선생)이

가지게 되었으니,

어찌하여 망우정이 여현정으로 바뀌게 되었는가

이는 곽장군이 현철한 선비인 이군에게 물려줬기 때문이다.

내 일찌기 곽공께서 이군에게 양여하는 글을 읽었으니,

이르기를

 

"요임금께서는 순에게 천하를 넘겼고

나는 이 강사를 현자인 이군에게 양여함이니

요과 순에게 천하를 물려줌과 비교하면

비록 넓은 하늘과 좁은 못에 비함과 같으나

그 마음의 깊은 뜻은 요순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리라.

 

나는 아름다운 곳에 정사를 지은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러나 이를 능히 지키는 자가 드물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혜롭고 현명한 자에게 이를 양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망우정을 사유하지 않고 이군에게 주는 것은

자네가 자연을 벗하고 학문을 좋아함이 뛰어나

능히 내 정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함이다"

 

나는 여기서 상공이 이군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는지

 이군은 곽공에서 무엇을 받고자 하는지 그 깊은 마음을 알 수 있겠노라.

 

곽공께서는 젊은 시절 강산에 은둔하시어 장차 일생을 마칠 것 같더니

왜란을 당하여 선비의 몸으로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고

이름에 일세에 떨쳐 벼슬이 이품에 올랐으나

신발을 벗음과 같이 스스로 물러나 속세를 초연하여

신선의 도에 의탁하여 곡식을 물리치고 솔잎을 먹으며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하며 평생을 마쳤으니

속인의 뉘우침과 괴로움이 없었다.

밝고 현철하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군은 본시 평정공의 풍도를 이어받고 충간공의 아름다움을 체득하였으니

그 문체와 기품이 타문중과 달라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다하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모남이 없고 속된 습속을 끊어

속세에 때묻지 않고 초연하니

현명하지 않고서야 이러하겠는가.

 

나는 말하노라.

곽공이 어찌 이군의 어짐을 알지 못하고서 강사를 물려주었겠으며

이군이 어찌 곽공의 현철함을 알지 못하고서 이를 허락하였겠는가.

이는 밝음과 어짐이 서로 합쳐져 이러한 좋은 일이 이루어졌으니

장차 후세에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이군은 곽공의 외손서라.

곽공께서는 자손이 많지 않아 이군에게 강사를 의탁함도

이러한 까닭도 있음이라.

나는 곽공과 이군의 명철함과 현명함을 믿도다.

그래서 정자 이름을 여현정이라 함이 좋지 않겠는가.

청하건데 망우정을 여현정으로 바꿈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여현이란 말이 곽공의 글에서 나온 말이니 여현정으로 고쳐 부름이

나 또한 옳다고 생각하노라.

 

헌데 이군은 어찌 스스로 허물하여 굳이 강사를 물려 받음을 피하는가.

자네에게 부탁하건데 자그만 허물을 피하지 말고

그 성실함에 힘쓰는 것이 인간의 도리로다.

이군이 어떻게 함이 그 성실함에 힘쓰는 것이냐 하고 물으면

나는 대답하기를

 

"아름다운 자연속을 한가로이 노닐며 세상 욕심을 씻어내

곽공께서 구름과 물처럼 자유로이 살아가며

풍월을 즐기던 삶을 잊지말고,

시와 음주를 즐길 줄 알며,

곽공께서 좋아하셨던 낚시와 나룻배 그리고 거문고와 다기 등을

쓸쓸하게 놓아 두지 않으면

곽공이 비록 멀리 떠날지라도 그 분께서 남기신 자취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라.

곽공이 이군에게 의탁하는 뜻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대는 힘쓰고 힘쓸 것이며 또 힘쓰고 힘쓸 것이다.

 

드디어 이군이 이를 승락하노라 말하니

내가 이 글을 쓰게 되었노라.

 
趙任道記

 

왕안석(王安石)이 흥현(興賢)에서 한 말에서 나왔다는 흥현의 뜻은 이러하다.

국이임현사능이흥(國以任賢使能而興)
나라는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흥성하고

기현전기이쇠(棄賢專己而衰)
현명한 사람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만하면 쇠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