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양산 효자리비는 적의 예리한 칼날을 녹였다.

천부인권 2010. 2. 14. 08:33

 

 

 

효자비 두개가 나란히 있다는 양산 중부동 미션문화센터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도로였다. 짧은 거리를 꽤 오랫동안 가다 서다를 반복하여 도착하니 양산 교육청이 보이지 않아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지나는 주민 분께 물어보니 잘 모르신다. 느낌상 네비가 알려 줬던 곳인 미션문화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화단에 비석 두개가 보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8호인 ‘효자리비’이다.


 

 

 

안내판을 읽다보니 고려 우왕 때에는 낙동강을 따라 왜구가 많은 침략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낙동강을 따라가면 많은 사람들이 왜구와 싸우다 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창의 비를 읽으니 “모하당(慕夏堂) 사야가(沙也可)”라는 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이었으나 동래에 입성 후 조선에 항복을 하고 귀화를 한 인물이다. 선조가 그에게 내린 이름이 ‘김충선’으로 사성 김씨의 시조가 된다.


그가 귀화를 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은 어느 해안을 쳐들어가는데 한 촌부가 늙은 어머니를 엎고 도망을 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을 가면 충분히 살수 있겠지만 저렇게 엎고 가면 잡혀 죽을 것으로 그의 눈에는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사야가는 “내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내 군대가 나약해서도 아니다 다만 조선의 높은 문화가 나의 예리한 칼날을 녹인다.”하였다. 우리나라의 깊고 높은 문화는 종종 왜구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히려 그들을 굴복케 하는 힘이 있었다.


 

 

이곳의 안내판엔 이렇게 적어 두었다.
『효자리비(孝子里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8호
양산시  중부동 153-3

 

이곳 효자리 양산 미션문화센터 앞 화단에는 비석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의 효자마을(孝子里)이라고 쓰여 있는 비석은 고려 우왕 때 진사를 지낸 박창(朴暢)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왼쪽의 효자의 마을(孝子之里)이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은 이공미(李公美)라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2기의 비석이 어떤 연유로 이곳에 나란히 서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두 비는 비문의 내용이 심하게 닳아 읽기 어려운 상태이나 양산군 읍지(梁山郡 邑誌)에 기록이 남아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박창의 효자비는 비석 가장자리에 2cm 가량의 선을 새겨 테두리를 두르고 큰 글씨를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박창이 부친상을 당하여 깊은 골짜기에 초막을 짓고 밤낮으로 통곡을 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이때 두 명의 왜구가 칼을 들고 왔다가 그 까닭을 물었는데, 박창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크게 감동하여 문간에 깃발을 꽂고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공미의 효자비는 비석의 모서리 부분을 5cm 가량 깎아서 모를 죽였다. 윗면에 큰 글씨로 ‘효자지리(孝子之里)’라고 쓰고, 그 아래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무덤을 지킨 이공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