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가 지정한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이 있는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호는 마산의 월영대 였다. 그리고 제2호는 관해정인데 현재 1호인 월영대가 1993년 1월 8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가 되어 1호는 공석이 되었고 2호부터 번호가 매겨져있다.
이 월영대의 옛 모습을 보면 갈대가 있는 바닷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바다가 한참 아래까지 내려가 있다. 댓거리에서 밤밭고개로 가는 길의 좌측에 도시의 건물 속에 있어 월영대 인줄은 알지만 이상하게도 작심하여 가지 않으면 항상 지나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월영대에 가보니 문은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고 담장 밖에서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전봇대와 전선줄 때문에 사진으로 남기기엔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자료를 만들었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마산 월영대(月影臺)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
마산시 해운동 8-4
이곳은 신라 말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이 해인사로 들어가기 전에 말년을 보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장소이다. 지금은 해안이 매립되어 옛 모습을 잃었지만 옛날에는 이곳 바로 아래에 백사장이 있어서 합포만(合浦灣)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이곳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월영대’라고 쓴 2.1m 높이의 비석이 있는데 선생이 직접 쓴 것이라 한다. 본래는 이 비석 앞.뒤에 글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알아볼 수사 없다. 1691년(숙종17)에 최위(崔瑋)가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로 부임하여 이곳을 정비하고 “천세 만세에 유린되지 말라.”고 하는 비석을 새웠다. 또 1932년에는 최씨문중에서 선생의 추모비(追慕碑)와 비각(碑閣)을 세웠다고 한다.
선생은 12세 때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한 다음, 관직 생활을 하였다.
879년(신라 헌강왕 5)에 당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그 난의 부당함과 진압을 호소하는 글(討黃巢檄文)을 지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885년 28세 때 귀국하였으며, 894년(신라 진성여왕 8)에는 ‘혼란한 시국을 개혁하기 위한 10개조[時務十條]’의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혼란한 신라의 정국에서 선생의 개혁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말년에 이곳으로 들어와 생활하였다. 선생이 죽은 뒤 이곳은 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였다.
현재 추산동에 있는 마산시립 박물관 뜰에는 고려. 조선시대에 이곳에 들렀던 13인의 선비들이 쓴 시를 새긴 비석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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