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녕 관산서당에서 서원철폐의 현장을 본다.

천부인권 2010. 3. 2. 08:55

 

 

‘창녕 관산서당’은 고암면 사거리에서 고암우체국을 끼고 우회전을 한 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천리 마을 끝부분 길가에 있어 찾아 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이 관산서당은 1620년(광해군 12)에 창건되었으며, 정구(鄭逑)·강소(姜訴)·안여경(安餘慶)의 위패를 모셨다. 1711년(숙종 37)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뒤 복원되지 못했다. 2009년에 이곳 관산서당의 신주가 땅에 묻힌지 140년 만에 발견 되었던 모습이 있어 옮겨 적어 둔다. 현재 주인은 ‘김희순’씨로 되어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원철폐령으로 묻은 위패, 창녕 관산서원서 첫 발견

 


140여년 전 이‘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은 경남 창녕의 사액서원인 관산서원 사당터에서 땅에 묻힌 위패가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옹관에 담긴 채 묻힌 위패를 발견했다”며 21일 실물을 공개했다. 이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매주(埋主) 시설이다.

 

 

 

이곳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창녕 관산서당(昌寧 冠山書堂)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35호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431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로 전면의 반칸을 퇴칸으로 한 형식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우측방의 전면 툇마루는 한단 올려 대청과 높이가 다르게 시설하였다. 방의 창호는 모두 세살문을 사용하고 있다. 좌측방에는 두짝, 우측방에는 외짝의 세살문을 달았고 대청의 뒷벽에는 판장문을 달아 고급스럽지 않지만 소박한 형태이다. 3량 가구 형식으로 중앙부에 대들보를 걸고 전면의 퇴칸에는 퇴보를 걸어 연결하였으며 큰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박공지붕 형식이다. 건립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19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며, 퇴칸의 사용이나 간결한 가구기법 및 장식적 기법 등 조선후기 건축양식과 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로 학술적 가치가 있고, 창녕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